템빨 83권 - 2화
‘아아,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마는가...’
‘...허? 설마?’
‘안 돼... 역시 이대론 안 된다.’
‘이럴 수가?’
독방에 갇힌 짧은 시간 동안.
여울랑은 폭삭 늙어버렸다.
등선하여 신선이 된 보람이 없게도 얼굴 곳곳에 옅은 주름이 생겼다.
그리드가 깊은 지하로 발을 들였단 사실을 알게 된 시점부터다.
불쑥 등장한 압도적인 존재감의 악마가 그리드를 습격했음을 눈치 채고 노심초사 했다가, 그리드가 점차 승기를 잡는 기척을 읽어 십년감수하고, 망령의 등장을 알아챘을 땐 혼절 직전까지 가는 등.
무척 심한 감정의 기복을 체험한 여파가 컸다.
“...”
숨을 고르는 여울랑의 마음이 차츰 안정되어간다.
그녀의 기감은 초월자 중에서도 상위에 속했다.
존재감을 숨기지 않고 사투를 벌이는 절대자들의 기척을 읽지 못할 리 만무했다. 절대자의 말과 검에 깃든 의념마저 느꼈다.
“그리드 님께서 망령 공을 꺾으셨다.”
매 초마다 좌절하고, 환희하고, 다시 또 절망하고 벅차하길 반복한 끝에 지친 여울랑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비녀로 곱게 빗어 올린 풍성한 머리카락은 군데군데 삐져나와 산발이 되기 직전이었고, 주름 한 점 없던 도포는 땀에 젖은 채 흐트러져 눈 둘 곳이 없게 만들었다.
올바른 몸가짐과 품행으로 모범이 되어야 하는 신선의 모습으로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여울랑은 개의치 않았다.
마냥 기뻐할 뿐이다.
급기야 속세의 인간마냥 환한 미소를 그린 그녀가 슬며시 두 눈을 감았다.
영원불멸 전승 될 성전에 기록되는 그리드의 말을, 뜻을 음미하듯 귀 기울여 감상했다.
[그대 홀로 짊어진 책임의 무게가 컸음을 안다.]
[고뇌를 반복한 끝에 악의가 없음에도 정도를 벗어난 그대를 나는 가엾게 여긴다.]
너를 이해한다.
올바르게 될 너를 기대한다.
그러므로 너의 죄를 사하노라.
온 누리에 빗물처럼 스며드는 유일신의 의념은 이와 같은 뜻을 품고 망령을 보듬어주었다.
여울랑의 가슴마저 뭉클하게 만드는 따스함이 있었다.
망령 본인은 오죽하겠는가.
과연 망령은 고개를 조아리는 것으로 보은했다.
여울랑에겐 최선의 결과였다.
천상의 신들을 최대의 적으로 규정하는 그녀 입장에서 그리드와 망령은 세계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들이었는데, 그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도리어 손을 잡았으니 이보다 기쁜 일도 적었다.
‘어서 두 분을 만나 뵈러 가야겠다.’
여울랑은 신들의 통치에 익숙했다.
신선들의 터전인 무릉도원은 예로부터 천상의 지배를 받았으니까.
아스가르드의 신들과 환국의 신들에게 신선은 입맛대로 이용당하기 일쑤였다.
하여 여울랑은 신들의 본질을 안다.
신들은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성격이며 태도가 늘 똑같기 보단 상황이나 필요에 따라서 바뀐다.
그리드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리드가 선한 건 사실일지언정 온갖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을 것임을, 여울랑은 충분히 헤아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서둘렀다.
지하에 묻힌 것.
그것의 가치에 따라 그리드는 필히 욕심에 시달릴 터.
여울랑은 미리 그의 곁으로 가서 조언하고 중심을 잡아줄 계획이었다.
‘주제넘다는 건 안다. 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야.’
여울랑은 너무 많은 신을 보았다.
온갖 이유로 타락하는 인간마냥 변모하는 신을 여럿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유일신 치우도 그중 하나다.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끼익...
문을 열고 나오자 단 둘의 리치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머지 지팡이들은 진즉에 망령을 도우러 떠났으리라.
“순순히 길을 열게. 내 비록 맨손이라 해도 그대들 둘쯤이야 능히 감당할 수 있네.”
망령의 뜻에 의해 독방에 갇히면서.
여울랑은 검과 법보, 그리고 부적들을 모조리 압수당했다.
하지만 기개를 잃지 않고 옛 시대의 초월자들을 똑바로 마주봤다.
““잠시 기다려라.””
크르릉...
짐승의 거친 숨결처럼 울리는 리치의 말이 여울랑을 저지했다.
‘지원이 올 동안 시간을 벌 심산인가.’
싸우는 수밖에 없겠군.
판단한 여울랑이 주술을 외웠다.
심상을 종이 삼아 의념으로 글씨를 새겨 보이지 않는 부적을 만들었다.
터엉!!
여울랑이 허공으로 뻗는 손끝으로 투명한 파동이 발생했다.
무형의 부적이 무형의 검으로 완성 된 것이다.
“한시가 급하니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겠네.”
선언한 여울랑이 순식간에 리치들의 틈새로 파고들었다.
수정구를 통해 누군가와 교신을 나누고 있던 리치들 입장에선 의외의 기습이었다.
기겁한 그들이 뒤늦게 세운 마력 실드로는 여울랑의 검을 막지 못했다.
““크윽... 이게 무슨 짓이지? 그리드 님께 그대를 풀어줘도 되겠느냐고 여쭤보는 중에 다짜고짜 공격을...? 등선의 최소 조건은 해탈이라 들었는데 망나니처럼 날뛰는 그대의 태도를 보아하니 낭설인 듯하군?””
“...망령 공이 아니라 그리드 님께 허락을 구하는 중이었다고?”
““앞으론 그리드 님을 섬기라는 것이 망령께서 끝으로 남긴 명령이셨다. 이런 제기랄, 막 베인 늑골 여섯 대가 도통 붙질 않는데, 무형검에 재생 불가의 주술을 걸었나? 손속이 악랄한 것이 과연 신선보단 망나니에 가깝다.””
“...”
섬기는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일까.
리치들의 말투에서 약간의 격조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욱 더 민망해진 여울랑이 무형검을 거두고 물었다.
“내 사죄하겠네. 그보다 그리드 님께선 뭐라고 하시나? 당연히 나를 풀어주라고 하시겠지?”
“가두라신다.”
“뭣이?”
여울랑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후총이라는 세계의 격변을 목격한 탓에 흥분해서 잠시 망각한 것이다.
자신이 그리드의 앞길을 가로막고 칼춤을 췄었다는 사실을.
그리드 입장에선 아직 여울랑에게 호의를 베풀 이유가 없었다.
여울랑 혼자서만 그리드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럴 리가 없네! 뭔가 잘못 된 거야!”
““지고하신 존재의 뜻을 거역할 셈인가?””
“아닐세. 나는 단지 재차 확인해주길 바랄 뿐일세.”
““그리드 님께 번거로움을 느끼시게 하라고...?””
“아니 난 꼭 그분을 만나야...”
설득하려던 여울랑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깨달은 것이다.
지금 상황에선 뭐라고 지껄여봤자 손해라는 사실을.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큰일이구나.’
내가 곁에서 중심을 잡아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데...
여울랑의 근심이 몹시 커졌다.
그리드와 동행하던 정신 나간 관짝의 상태를 돌이켜보면 걱정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항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그리드의 뜻에 거역했다간 앞으론 영영 눈 밖에 나는 수가 있었으니까.
어두운 표정으로 방에 돌아온 그녀는 그리드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그리드가 흔들릴 일 따위는 없다는 사실도, 그리드의 중심을 잡아줄 사람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많다는 사실도.
***
무후총의 지하는 생각보다 더 깊었다.
붉은 살덩이가 있는 곳에서부터 무려 10층을 더 내려갈 수 있었다.
규모의 거대함이야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층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도시 규모군.’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겠다던 망령의 계획이 진심이었음을 엿볼 수 있는 광경이다.
‘헛된 계획이지만.’
무후총이 아무리 거대해봤자 지상의 지극히 일부였다.
고작 이 정도 규모로는 지상만큼 거대한 지옥을 온전히 담지 못한다.
만약 망령이 이곳에 지옥을 재현했다면.
그녀가 만든 지옥은 반드시 무후총을 넘어서 지상 전역으로 뻗어나갔으리라.
‘소름 돋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리드는 무후총이 이렇게 중요한 장소일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뭐가 묻혔는지 짐작조차 못했다.
정보가 부족했으니 당연하다.
‘템빨함 격 올려줄 생각 못하고 오는 걸 차일피일 미뤘으면... 진짜 걷잡을 수 없었겠어.’
일이 터진 뒤에야 땅을 치고 후회하지 않았을까.
2개의 지옥을 상대로 싸웠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정말이지 끔찍하다.
2마리가 된 바알이 합심해서 미친 짓을 일삼았다면 템빨계를 제외한 지상은 멸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땐 처음부터 망령과 협력하는 식의 퀘스트가 발생했을 수도 있지만...
‘내가 망령을 신뢰하지 못했겠지.’
-왜 그래?
-응? 뭐가?
망령의 작고 동그란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며 걷던 그리드가 루비의 귓속말을 보고 문득 정신을 차렸다.
루비가 다소 파리해진 얼굴로 말했다.
-망령을 죽일 기세 같길래...
“...”
나도 모르게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나보군.
조심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그리드가 표정을 가다듬을 때였다.
“야탄 신께선. 상냥하신 분이셨다... 마치 그대처럼.”
그리드와 루비의 눈앞으로 영상이 펼쳐졌다.
과거의 어느 시점이다.
지금과는 달리 밝은 표정을 지은 망령이 누군가의 거대한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등허리까지 기르고 있는 사내였다.
아니, 머리카락이 아니다.
새카만 신성이 겹쳐서 장발로 보일 뿐이다.
그리드와 같았다.
무지막지한 존재감마저도.
“하여 늘... 이번 세상 역시. 잘못 되었다고... 한탄하셨지.”
쇠를 긁는 듯한 망령의 목소리가 끊기는 횟수가 잦아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는 야탄의 신성을 그리드와 싸우며 무리하게 운용한 대가였다. 루비가 치료해주겠다고 제안 했지만 망령이 거절했다. 응당 치러야 할 대가라면서.
‘메르세데스도 강신을 자주 쓰면 몸에 부담이 심할까? 메르세데스를 생각하니까 아이린이랑 유라도 보고 싶네. 바사라는 국정을 돌보느라 또 무리하지 않을까 걱정이고.’
늘 소중한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그리드였다.
그나마 지슈카는 이번 원정에 동참해서 다행이었다.
지슈카는 그리드의 연인 중에 유일하게 순한 면이 있어서 눈에 안 보이면 가장 걱정이 됐다.
‘겉으론 제일 빈틈이 없어 보이는데 말이지.’
돌이켜보면 첫 만남부터 빈틈이 많긴 했다.
지슈카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서 처음으로 그리드를 만났을 때 말이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만취해서 길바닥에서 잠들지 않았나.
유라도 똑같기는 했지만...
‘설마 걔들, 그때부터 이미 나를 좋아하고 있었나? 나를 놓고 경쟁하다가 얼떨결에 주량을 초과했던 거야?’
지슈카는 충분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유라는... 일부러 취한 척하고 지슈카와 함께 끌려왔을 가능성이 높고.
‘둘 다 그때부터 귀여웠구나.’
너무 늦게 진실을 깨닫고 흐뭇해하는 그리드였다.
루비에겐 오빠가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망령이 과거의 한 장면까지 보여주며 진지하게 말하는 와중에 혼자서 히죽히죽 웃어대는 꼴이 정상으로 보일 리 없다.
정작 망령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드 덕분에 메마른 감정이 다소 회복 됐다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정상인과 거리가 멀었다.
그리드가 상황과 맞지 않는 감정의 기복을 보여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그리드가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도 했고.
그리드의 집중력은 보통의 범주를 초월한다.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상황에 집중할 수 있었다.
“세계에. 인간을 위협하는 요소가... 너무 많음을 지적하셨다.”
스아아아악!
그리드와 루비의 의식이 눈앞에 투영되던 과거의 한때로 빨려 들어갔다.
필시 과거일 터였다.
“흐음?”
한데 어째서.
“흥미로운 존재들이군.”
악신 야탄은 우리를 보며 웃는가.
그리드 남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