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3권 - 1화
그리드의 융합 검무는 연환식이다.
둘 이상의 검무를 합쳐서 융합기인 것으로, 검무의 모든 타격이 대상에게 적중하지 않는 이상 완전한 스킬 효과를 기대하긴 힘들었다.
전투 초중반.
망령이 6융합 검무의 폭격을 쉬이 견뎌낸 배경이다.
그녀는 그리드의 검무를 대부분 도중에 차단했다.
필중하는 극(極)의 검로를 자칫 허용하는 순간에도 다음 검로를 읽고 사전에 회피, 혹은 방어하는 식이었다. 궁극의 무가 발현 될 기회 자체를 억제해버렸다.
시간의 개념을 엿가락처럼 늘려대고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절대자의 권한을 지닌 탓에 가능했다. 실시간으로 그리드를 약화시키는 권능을 위시해 수월하게 해냈다.
한데 이 순간.
입장이 역전되고 말았다.
그리드는 봉쇄 효과로 온전한 격을 되찾은 반면 망령은 급격히 약해졌다.
그리드에게 위협을 느끼고 사용한 비장의 한 수가 뮐러 탓에 무용지물이 된 여파다.
“...그대가. 부디 옳기를.”
급기야 무릎 꿇은 망령이 쥐어짜낸 음성이 마지막 유언으로 남는다.
수천 년의 노력이 헛된 것으로 전락하게 생겼으나.
의외로 망령은 평온했다.
자신의 계획을 좌초시킨 눈앞의 사내를 인정해서다.
뒷일을 맡겨도 좋을 것 같다는 허황된 믿음이 샘솟았다.
드디어 쉴 수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
망령 본인은 애써 외면해온 사실이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당연하다.
너무나도 거대한 운명을 홀로 짊어진 채 영겁의 세월을 견뎌오지 않았나.
‘다만... 아쉬울 따름입니다.’
망령은 무후총의 가장 깊은 지하에 묻힌 존재를 떠올렸다.
신(神).
그녀가 유일하게 섬겨온 신의 일부가 이곳에 잠겨있다.
현실을 외면하듯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채.
‘당신께서 사랑하신 세상을 진즉 되찾지 못한 죗값은... 이제 곧 죽어 영원토록 받게 될 형벌로 치르겠나이다.’
쩌적! 쩌저저저적!!
망령의 단단한 영혼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곧 다가올 죽음에 대비하는 것이다.
망령은 자신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사슬로 엮을 계획이었다.
이 영혼을 취하게 될 존재를 구속하는 힘이 되어줄 사슬.
베리아체에게 배운 주술이다.
수백 년 전.
망령은 베리아체를 찾아갔다.
마리로즈를 출산한 대가로 죽음을 앞둔 그녀의 육신과 영혼을 모조리 취할 심산으로.
베리아체가 당연히 협조해줄 거라고 믿었다.
바알에게 복수 할 일념으로 마리로즈를 낳은 그녀는 자신의 몇 안 되는 이해자였으니까.
한데 의외로 거절당했다.
베리아체는 육신보다 중요한 영혼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것이 바알을 불완전하게나마 구속할 도구가 될 거라면서.
...결과적으론 아모락트를 구속하는 도구가 되고 말았지만... 아무튼 그때 배운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자신이 실패하게 됐을 때.
자신 역시 바알의 구속에 일조할 수 있도록.
‘바알. 네가 소망해왔을 나의 죽음이 네게 지독한 저주가 되리라.’
망령의 영혼이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우뚝!
망령을 난도질하던 6융합 검무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마지막 단계로 망령의 목을 베기 직전에.
그 탓에 죽음을 면한 망령의 두 눈에 의문이 맺혔다.
“무엇이... 그대를 멈추게 했지?”
그리드는 망령의 이념이 잘못 됐다고 단언했다.
죽여서라도 그녀의 계획을 막겠노라 선언했다.
이제와 새삼스레 멈춘 이유를, 망령은 알 도리가 없었다.
“...”
물론 그리드도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덕공이 강제한 시스템이니까.
‘아니, 정녕 강제가 맞나?’
덕공은 망설이는 내게 호응했을 뿐이 아닐까...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해본 그리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덕공이 만들어준 상황이 헛되지 않도록 솔직한 속내를 털어내 보았다.
“나는 당신이 가엾다.”
“...?”
“혼자선 빡세니까.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 지경에 이른 걸 거 아니야.”
“그대 홀로 짊어진 책임의 무게가 컸음을 안다. 고뇌를 반복한 끝에 정도를 벗어났을 테지. 악의가 없음에도.”
그리드의 말이, 뜻이.
후로이의 입을 거쳐서 비로소 완성된다.
템빨단의 정예들 사이에서 활약하던 후로이의 붉게 충혈 된 두 눈이 그리드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넝마가 된 모습.
이번엔 심지어 몸의 절반이 날아가버렸다.
탐욕으로 빚은 다리가 그의 상체를 부자연스럽게 지탱하고 있었다.
커다란 책임을 짊어진 끝에 매번 자신을 희생하는 그리드의 모습과 망령의 모습이 조금쯤 닮았다고, 후로이는 생각했다.
그리드가 망령에게 자비를 베푼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다.
하여 그리드의 말에 담긴 진의를 파악하고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차라리 나와 협력하는 건 어때? 단, 나의 방식을 따른다는 조건이다.”
“내가 그대의 짐을 나눠지고 그대를 인도하리라.”
“...”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후로이는 공식 석상 등에서 늘 그리드의 뜻을 대변해왔다.
몹시 포장해서 전파했다.
왈왈 짖어도 사람의 언어로 통역 될 수준으로 의역을 일삼았다. 심지어 그리드에게 무조건 유리하게.
다소 낯 뜨거운 면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적응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서사시에 영향을 줄 정도야. 전적으로 후로이에게 맡기는 편이 옳다.’
후로이의 가치는 특별했다.
라우엘이나 스컹크처럼 물리적으로는 식별하기 힘든 가치다.
그리고 예로부터 그리드는 그런 유형의 인재들을 적극 활용해왔다.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파악하고, 인정하고, 타인의 힘을 빌려왔단 말이다.
“자존심 상할 필요 없어. 당신의 방식을 버려야 한다고 해서 당신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니까. 오래 살았으면 알 거 아니야? 실수는 누구나 해. 누구에게나 부족한 면이 있지. 실수를 극복하고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타인과 협력하거나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거다. 그게 삶인 거고.”
“...”
이번에 후로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흐뭇한 미소를 지은 지슈카가 그리드를 자랑스레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서다.
그러자 오히려 더 민망해진 그리드가 머쓱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를 물끄러미 올려보던 망령이 입을 열었다.
“나는... 실수를 한 적이 없다.”
‘고집 보소?’
눈살을 찌푸리던 그리드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실수가 아닌. 죄를. 범해왔을 뿐...”
죽어선 안 될 자들.
무릇 이와타 뿐만이 아니다.
망령은 수많은 인간들을 제멋대로 규정하고 언데드로 만들어왔다.
인신의 한계를, 약함을 신뢰하지 못하고 사냥하기도 했다.
그들의 선함을 뻔히 알면서도.
언젠간 반드시 죽어 바알의 양분이 될 거라는 근심으로 그들의 권한을 찬탈했다.
지옥을 수복하기 위해 제2의 지옥을 만들고자 했던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바알과 닮아진 것이다.
“이런 내가... 그대와, 타인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한다? 흐흐... 그 누구도... 나 자신부터가. 용납할 수 없다...”
망령이 허탈하게 웃었다.
내내 무표정했던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다.
미소가 아닌 것이다.
그녀는 소리 죽여 오열하고 있었다.
여태껏 그녀가 쉬지 않고 달려올 수 있었던 이유.
자신의 이념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처참하게 부정당했고, 본인 또한 틀렸음을 인정하고 말았다.
굳건한 마음에 엮여있던 무게추가 모조리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를 지독한 자기혐오가 채워버렸다.
이제 망령은.
나아갈 수 없게 됐다.
“죽여라.”
망령이 단호하게 말하는 순간이었다.
“당신이 범해온 죄를 내가 짊어지도록 하지.”
“...?”
뿌드드득.
탐욕으로 만든 하반신이 기이한 소음을 내며 굽어진다.
망령과 눈높이를 맞춘 그리드가 올곧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방금 확신했다. 당신은 살아가야 돼. 나와 함께하면 분명히 세상에 이로울 존재니까.”
서사시는 여전히 작동 중이다.
끝내 신벌을 감당하지 못한 망령이 쓰러지고 말았다는 문구가 떠오른 이후에도 계속, 계속.
그리드와 망령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을 일부 담아가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나 또한 수많은 사람을 해쳤다. 당신처럼 어떤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한 악의로 해친 경우도 많아.”
“...”
“비열한 짓거리도 일삼았지.”
“...”
“그런 내가,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
“당신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오히려 나보다 훨씬 더 나을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그리드가 책임을 짊어지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강해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을 함부로 휘둘러선 안 된다는 자각을 갖게 된 시점부터.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수차례 겪고 난 이후부터.
그는 현재에 이르게 됐다.
그래서 망령도 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자신과 달리 악의가 아닌 신념으로 움직여온 그녀이기에.
그녀가 자신보다 훨씬 더 나은 존재가 될 거라고 확신했다.
“자, 함께하자.”
그리드가 손을 내밀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검사의 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많은 굳은살이 박인 손이었다.
그런 모습 하나하나가 망령에게 신뢰를 주었다.
투둑, 투두둑.
급기야 완전히 조각나버린 해골 가면 탓에 망령의 얼굴이 완연하게 드러났다.
빛의 여신 레베카를 닮은 얼굴.
그 아름답고 성스러운 얼굴이 재차 일그러지고 있었다.
세차게 치밀어 오르는 여러 감정들에 의해서였다.
“이래선... 안 되는데...”
나의 신은 오직 하나다.
한데 왜.
어째서 나는 이자의 손을 잡고야 마는가.
[너의 죄를 사하노라.]
[신의 말씀에 눈물 지은 죄인이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
..
[서사시 완성 보상으로 망령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무후총의 망령은 태초신 야탄의 사도입니다. 그녀가 당신을 세계의 본질로 인도하는 열쇠가 되어줄 것입니다.]
[망령의 마음을 얻은 보상으로 무후총이 템빨계에 편입 될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서사시 완성 보상으로 뮐러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검성 뮐러는 영웅 중의 영웅이요, 역대 최고의 전설로 추앙 받는 인물입니다. 최고의 조력자가 되어주겠죠.]
[위대한 서사에 동참한 <신들의 무덤>의 격이 대폭 상승합니다. 격 상승 보상으로 템빨계의 일부가 됩니다.]
[신들의 무덤이 템빨계에 합류한 여파로 템빨계의 격이 상승합니다. 템빨계 소속 신들의 권능이 대폭 강화됩니다.]
당연히 격 상승 보상은 없다.
초월의 격을 쌓은 끝에 절대자가 된 그리드의 격은 이미 완전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리드의 성장이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다.
서사시 중간에 뮐러가 개입한 것을 계기로 그리드의 존재감은 한층 더 뚜렷해졌다. 덕분에 칸과 한 순간이나마 교감했다.
황룡 신화가 강화되고, 칸의 축복을 받는 등.
존재감의 상승은 격 상승과 비교해서 오히려 월등한 가치를 지녔다.
앞으로 더 강해질 여지가 많은 것이다.
서사시 완성 보상으로 ‘움직이는 템빨계’를 갖겠다는 꿈을 이루기도 했다.
망령을 죽이지 못한 까닭에 경험치 정산은 없었지만, 이미 망령과 싸우는 과정에서 7개의 레벨이 올라 아쉬울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뮐러와 망령이라는 새로운 동반자를 얻었다.
‘서사시... 아주 조금 사기긴 해.’
한 번 쓰일 때마다 온갖 상황을 반전시키고 엄청나게 많은 혜택을 줘서 감사할 따름.
양심 없는 그리드가 흐뭇해하는 동안 루비는 오빠의 치료에 열중했다.
템빨단과 언데드 군단은 상황을 수습하고 있었다.
전투를 멈추고 통성명을 나누는 것이다...
“오빠.”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리드의 치료를 마친 뒤 잠시 어딘가로 떠났던 루비가 곁으로 돌아왔다.
굉장히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다.
다른 템빨단원들과 마찬가지로 언데드와 악수라도 나눈 눈치다.
성녀의 입장에서 영 기묘했겠지.
“망령이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해. 근데 나하고 오빠만 따라오라는데?”
“나야 그렇다 치고 너는 왜? 세희 너 설마...”
“응?”
“내 동생이라고 유세 떨고 다니니?”
“뭐?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에이, 솔직하게 말해도 돼. 귀여운 녀석.”
“아, 아니라구우.”
루비가 진심으로 억울해했다.
그녀는 늘 오빠를 위해서 애써왔다.
정작 자신을 위해서 오빠의 이름을 빌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연히 그리드도 알고 있다.
그냥 놀려본 거다.
‘성녀가 야탄과 관련이 있었나?’
성녀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신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힐과 축복을 내리는.
“일단 가자.”
망령을 얻었다는 건.
여태껏 몰랐던 정보를 얻게 됐다는 뜻과 같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가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