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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82권 - 20화

태초신의 사도라는 지위는 필시 굉장하다.

온 세상을 통틀어도 그보다 높은 위계가 과연 몇 개나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

그럼에도 망령을 태초신의 사도로 국한하는 건 실례였다.

지상에 적을 두고 별개의 차원으로 거듭난 장소.

템빨계와 닮은 이곳 무후총을 세운 망령은 단연코 독보적이고 절대적인 존재였다.

애초에 그녀가 찬탈해온 신화만 수십 개다.

신 중에서도 특출한 신이라고 봐야 옳았다.

다만 문제는, Satisfy에서 신이란 전지전능한 존재를 뜻하지 않는단 점이다.

제아무리 망령이 대단하다 한들.

또한 무후총을 세운 장본인이라고 한들 무후총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조리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드와 같은 것이다.

하물며 이번 사태는 무후총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발생했다.

안 그래도 깊은 지하에 묻힌 무후총을 높디높은 상공에서 폭격해대는데 무슨 수로 사전에 파악하고 방비할까.

‘뭐 이런 무식한 권능이?’

망령의 감정은 마모 된 지 오래다.

영겁의 세월을 견디다보니 자연히 그렇게 됐다.

한데 이 순간 동요했다.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비행선에서 수백 개의 운석을 투척한다?

하물며 운석 하나하나의 파괴력이 수백 발의 포탄과 비견 됐다.

압도적인 질량을 무게로 삼는 탓에 무후총과 지상 사이에 존재하는 수백 미터의 거리가 무색해지고 있었다.

긴 세월에 걸쳐 단단하게 퇴적 된 지층이 속절없이 무너지면서다.

“그대는... 여러모로 아깝군.”

가면 너머의 쓸쓸한 눈동자로.

언젠가부터 낯설어진 달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망령이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뮐러에게 수천 자루의 신검을 제공하고, 초대형 비행선까지 운용하는 그리드의 다재다능함을 몹시 애석하게 느꼈다.

“죽이고 싶지... 않을 정도다. 그대가 축적한 세월이. 나와 닮아. 깊은 절망을 맛봤더라면... 나의 이념에 공감하고... 기꺼이 나의 손을. 붙잡아주었을 텐데.”

“...”

그리드는 대꾸하지 않았다.

망령의 진실 된 마음을 느껴서다.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눴다간 정이라도 들 것 같아 두려웠다.

‘미친놈이야.’

망령의 이념은 뒤틀렸다.

지옥을 정화하겠다는 목적은 필시 숭고했고, 그녀의 목적이 이뤄질 경우 인류에게 이로운 건 사실이지만.

방식이 잘못 됐다.

심하게 말하면 파그마와 동류였다. 심지어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결코 공감해선 안 될 대상인 것이다.

콰드득, 콰드드드득!!

운석을 맞아 훼손 됐던 천장이 순식간에 수복됐다.

그리드를 비추는 조명처럼 떨어지던 달빛이 차츰 사그라졌다.

무후총은 망령의 세계다.

망령의 의지가 거부하는 한 물리적인 방법으로 파괴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지슈카.”

쏴아아...

재차 어둠으로 잠식 된 세계에 석양이 깔렸다.

그리드를 지평선으로 삼듯이, 그리드의 손끝에서 피어올랐다.

황혼이다.

“십공신이랑 루비를 제외한 인원은 탈출시켜.”

여기서 수백 명의 템빨단원이 몰살이라도 당했다간 전력 손실이 너무 크다.

“응.”

지슈카는 그리드를 의심하지 않는다.

의외로 강아지처럼 순종적인 면도 있었다.

그리드에겐 보여주지 않는 악귀 같은 표정으로 아쉬워하는 동료들을 재촉했다.

“내게 인간을. 해치는 취미는 없다. 설령 나의 영토를 침략해... 나의 부하들을. 학살한 자들이라 해도...”

분주한 분위기 속에서 망령이 말했다.

서두를 필요 없으니 다치지 말고 천천히 떠나라는 뉘앙스다.

얼핏 상냥하게 느껴졌다.

아무도 속지 않았다.

“후로이를 죽이려고 한 주제에.”

급기야 극검이 망령의 태도를 가식이라 비난하자.

“그 인간은. 죽어 마땅했다.”

단언하는 망령의 의식이 순간 후로이에게 쏠렸다.

원치 않게 어그로를 끌고 만 후로이가 극검을 원망스럽게 노려보는 그때.

드넓은 공동을 질주하여 망령에게 다가선 그리드가 황혼을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아앙!!

검무의 동작을 따라서 솟구친 황혼이 망령의 새카만 몽둥이와 몇 차례 충돌한 끝에 가로막혔고,

“내 계획이 실행조차 실패하면... 인류는 멸망보다 더한 고통에. 시달릴 뿐이다.”

콰자자자자작!!

그리드가 딛고 선 지반에 크레이터가 발생했다.

신들의 무덤이 폭격 한 운석 중 하나가 천장을 비집고 들어와 떨어진 건가?

일부 템빨단원들이 그런 황당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망령이 몽둥이를 내려 친 힘이 만들어낸 광경이 그만큼 비현실적이었던 것이다.

‘베리아체의 시체에게 제 피를 먹였던 건가?’

작은 소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던 괴력을 떠올린 그리드가 식은땀을 흘렸다.

태연을 가장하기 위해 웃어보지만, 이를 워낙 꽉 문 탓에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말았다.

망령은 비웃지 않았다.

“근심 마라. 아마도 난... 그대를 죽일 수 없다.”

망령의 새카만 신성이 그리드의 주황색 신성과 얽히고 있었다.

숫제 헤집는 느낌에 가깝다.

찬탈을 도모하는 망령의 권능이 그리드의 신성에 깃든 역사를 살피는 것이다.

무엇부터 먹어치울까 고민하듯이.

고민이 몹시 길었다.

그리드의 신화 중 일부가 믿기 힘들 정도로 위대하단 사실을 엿본 까닭이다.

그리드가 겪어온 삶이 망령의 뇌리로 주마등 같이 스쳤다.

어지간한 인신들마냥 짧은 삶이었다. 하루살이로 비유할 만했다.

한데 매우 농밀했다.

자신이 수천 년 동안 축적해온 삶과 맞먹을 정도로.

‘...이런 걸 빼앗을 수 있을 리가.’

스윽.

망령이 몽둥이를 거뒀다.

그리드의 전신을 짓누르고 있던 압력이 거짓말처럼 풀렸다.

“그대 또한 수많은 절망을 보고 겪었구나.”

당연하다.

본래 그리드의 삶 자체가 절망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다만 좌절하지 않고 매번 오뚝이처럼 일어났을 뿐이다.

하물며 세계의 진실을 엿봤다.

왜곡 된 지옥.

사랑하는 부인들과 아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지옥을 수복해야하는 의무를 짊어졌다.

방관하는 천상.

하는 일 없이 콧대만 높은 신들에게 착취당하는 소중한 사람을 반드시 구출하겠다는 각오를 품었다.

물론 망령보다 더 큰 절망을 겪었다는 건 아니다.

망령에게 지옥은 전부였고 자랑이었으니까.

막말로 망령은 전부를 빼앗긴 존재다.

어쩌면 빼앗길 수도 있는 그리드와 비교해서 입장이 훨씬 나쁜 것이다.

‘실패한 그리드’의 미래가 바로 망령이었다.

하지만 망령은 그리드를 존중했다.

그리드가 겪은 절망의 총량과 별개로, 반신의 목을 베며 차라리 내가 신이 되겠노라 선언했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화룡의 마지막 불꽃을 지펴주고 드래곤 나이트가 된 모습에선 무지막지한 잠재력을 엿봤다. 무려 치우가 보증하지 않았나.

“그 많은 절망을 겪고도... 나의 이념에. 공감하지 못하는 건가?”

“그래. 나의 관점에서 당신의 방식은 글러먹었다.”

그리드가 허공으로 뻗은 좌수에 <봉쇄>가 쥐어졌다.

단조로운 검.

순전히 검의 기능에 충실한 형태다.

평타의 위력을 증폭시키는 한편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횟수에 비례해 스킬이 누적되는 옵션을 지녔다.

제라툴 전을 대비해서 준비했던, 가장 최근에 만든 신검이다.

<봉쇄>

등급:신화

내구력:무한 공격력:15,880

★일반 공격의 위력 최소 2배에서 최대 5배까지 상승.

★적에게 공격을 명중시키거나 적의 공격을 차단 할 때마다 ‘단련’ 효과 발생. 단, 단일 대상에게 한하며 공격 대상 변경 시 효과 초기화.

★일정 수준 이상의 격을 지닌 대상에 한해서 명중률 30퍼센트 하락.

★스킬 <거기까지다> 생성.

유일신 그리드가 무신 제라툴을 저격하기 위해 제작한 신검입니다.

재료로 사용 된 탐욕에게 자유 권한을 부여하여 학습 효과를 극대화시켰습니다. 탐욕의 자체적인 판단이 때때로 단점으로 작용하지만 잠재력 면에선 다른 모든 신검을 초월할지도 모릅니다.

착용 조건:그리드

무게:1,900

<거기까지다>

패시브

검이 30회 이상 단련 될 때마다 누적 된 정보를 토대로 적의 스킬 하나를 무작위로 봉쇄합니다. 지속형 패시브 스킬의 봉쇄를 우선시합니다.

봉쇄 지속 시간:무작위

봉쇄는 그리드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신검이다.

자유 권한을 지닌 아이템.

실험적으로 만든 것인데 기대 이상의 옵션을 지니게 됐다.

종종 그리드의 의지와 다르게 움직인다는 단점은 별로 치명적이지 않았다.

봉쇄가 그리드의 의지에 반하는 경우는 ‘그리드를 지키려는 습성’을 발휘할 때이기 때문.

그리드가 공격하는 타이밍에 전진하지 않고 버티며 방어를 종용하는 식이다.

이때 공격 타이밍을 놓치는 일이 발생했지만 그리드는 쌍수검을 능숙하게 다룬다. 양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므로 봉쇄가 트롤링을 할 경우 반대편 손에 쥔 검으로 모면하는 게 가능했다.

‘아무튼 알쏭달쏭 도리깨의 상위 호환이다.’

물론 잠재력만 따지면 알쏭달쏭 도리깨가 최고지만...

봉쇄는 도리깨와 비교도 안 되는 공격력을 발휘하면서 무조건 이로운 효과만 발휘한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은 기댓값을 지닌 것이다.

“가만... 싸울 필요 없다.”

망령의 뚝뚝 끊기는 음성이 종전보다 빠르게 이어졌다.

“나는. 그대를 해치지 않기로 정했다.”

전투를 거부한다.

그리드의 잠재력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엿봤기 때문이다.

언젠가.

정말로 언젠간 그리드가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랐다.

끝내 이해 받지 못해도 괜찮다.

만에 하나 나의 계획이 실패했을 때, 그리드가 다음 희망으로 남아주면 되니까.

망령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진정으로 지옥의 수복을 바랄 뿐이다.

가치 있는 것을 굳이 해치는 악취미는 없었다.

하지만 그리드가 거부했다.

“나는 이곳을 박살내야 돼.”

“...”

“위험을 방치할 순 없거든.”

이미 서사시를 통해서 선언했다.

너를 템빨함에 묻어버리겠다고.

서사시에 행동을 강제 당할 필요는 없지만.

애초에 서사시가 그런 식으로 써진 이유는 그것이 그리드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좋다... 그럼 난 이곳을 지키겠노라.”

피차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다.

망령은 이곳을 반드시 지옥으로 만들 것이다.

무려 수천 년을 준비한 계획을.

지옥을 수복시킬 유일한 방법을 이제와 포기할 순 없었다.

“오라.”

망령의 새카만 신성이 해일처럼 일어났다.

황룡의 형상을 이루고 쏘아지는 그리드를 집어삼켜버렸다.

콰창!!

그리드가 꿰뚫고 나왔다.

믿기지 않는 궤적을 연달아 그리는 망령의 몽둥이를 봉쇄로 막아내는 한편 황혼으로 검무를 휘둘렀다. 막 전설이 됐을 무렵처럼 보폭을 수차례 밟으면서다.

서사시로 쌓아올린 격 중 일부가 망령과 가까워질 때마다 흐릿해지고 있었다.

찬탈의 권능이 그리드의 서사시 중 비교적 하찮은 내용을 집어삼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그리드는 실시간으로 약화됐다. 근접전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역대급 괴물이군.’

하필 이런 괴물이 협상의 여지가 없는 보스몬스터로 존재한다니.

몽둥이와 봉쇄가 충돌할 때마다 터지는 칠흑의 벼락에 뜯겨나가기 시작하는 손가락을 느끼면서,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혀를 찼다.

지옥과 천상에 득실거리는 강적들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만으로 벅찬 마당에 환장 할 노릇이었다.

‘진짜 빌어먹을 세계관이다.’

악의가 느껴질 지경.

개발진의 인성이 어떨지 쉬이 짐작 간다.

“이걸 베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애꿎은 임철호 회장의 귀가 간지러워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문득 들려온 음성이 그리드와 망령의 시선을 동시에 사로잡았다.

거대한 붉은 살덩이 곁에 서있는 뮐러가 보였다.

여전히 구젤의 검을 손에 쥔 채다.

“제가 베지요.”

이번엔 그리드가 빨랐다.

망령보다 먼저 뮐러의 곁으로 이동해 역시나 뮐러를 노리는 망령의 공격을 막아냈다.

교차시킨 두 자루 검이 새카만 몽둥이를 붙잡고 늘어진다.

“...그만 둬라.”

명색이 영웅이라는 자가 비겁하게 허를 찌르는가?

명색이 유일한 신이라는 자가 비겁하게 기회를 틈타는가?

망령의 힘없는 외침에 담긴 의념이 그리드와 뮐러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뮐러의 큰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악당의 비난이라. 극찬이로군.”

망령은 자각하지 못하지만.

인류의 입장에서 그녀는 악당이 맞다.

픽.

붉은 살덩이의 중심부에서 한 방울의 피가 뿜어졌다.

그 뒤론 걷잡을 수가 없었다.

붉은 살덩이를 표적으로 삼은 검성의 검이 무후총을 통째로 반으로 갈라버렸다.

세계를 가르는 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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