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2권 - 19화
‘가히 놀랍군.’
뮐러가 한 눈에 알아봤다.
본인을 중심에 두고 나선의 행렬을 이루는 3,295자루의 검이 전부 같은 근원을 두고 있음을.
검마다 깃든 영성(靈性)을 토대로 간파했다.
유일신 그리드.
망령과 대립하고 선 지상의 신이 지닌 기질이 만든 영성이었다.
행렬에 섞인 검 외의 병장기들?
그의 관심 밖이다.
검사이기에.
자고로 검성이란 나뭇가지조차 검으로 다루어 병기에 얽매이지 않는다지만, 그건 반만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검사가 검 없이 발휘할 수 있는 실력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뮐러와 싸워온 적들이 그 차이를 실감하지 못했을 뿐이지.
“검성 뮐러... 경거망동 말라. 오래 전 내게. 좌절을... 맛보고. 근신해온 그대에게... 새삼스레. 승산이 있을까.”
망령의 뚝뚝 끊기는 음성엔 깊은 고통, 고독, 원한 따위가 담겼다.
곧 죽을 병자를 연상시켰다.
그럼에도 두려웠다.
과거에는 끝내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뮐러에겐 조악한 철검 한 자루가 전부였으니까.
그는 파그마가 등장하기 이전의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불타르를 시기하고 증오한 헥세타이아에 의해 야공들의 실력이 대대로 퇴행했던 암흑시대의 한복판에서 역대 최강의 검성은 탄생했었다.
“친구, 이번엔 편히 쉬고 있도록 해.”
뮐러가 허리춤의 낡은 검파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와 평생을 함께해온 조악한 철검은 급기야 전설의 무구로 거듭나 보검의 반열에 올랐으나, 병장기의 행렬 속 신검들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그 사실을 망령 또한 눈치 채고 있었다.
“베리아체...”
그리드와 뮐러의 만남이 유쾌하지 못한 변수라는 사실을 깨달은 망령의 의지가 베리아체의 시체를 움직였다.
스륵.
거대한 공동의 중앙.
망령의 곁에 서서 템빨단원들의 이목을 은근히 끌던 작고 예쁜 소녀가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카츠가 희미한 혈향을 쫓아 시선을 돌렸다.
템빨단원들이 선 출입구와는 정 반대 위치의 출입구를 향해서다.
나란히 선 두 명의 검성이 보였다.
당대의 검성 크라우젤은 다급히 검막을 펼치는 중인 반면 전대의 검성 뮐러는 병장기의 행렬 사이로 느긋하게 손을 뻗고 있었다.
사라졌던 베리아체는 진즉 뮐러의 곁이다.
작은 체구를 적극 활용할 셈인지 하단에서 나타나 좌수를 위로 쑤셨다.
츠칵!
베리아체의 날카로운 손톱이 뮐러의 턱을 스치며 살가죽을 갈라놓았다.
반응하지 못한 걸까.
움찔하는 반응조차 없이 공격을 허용해버린 뮐러를 우연히 목격한 사람들이 탄식하는 그때.
‘반응하지 않은 거다. 피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거야.’
그리드의 얼굴에는 희열이 번졌다.
앞서 베리아체와 격전을 벌였던 그는 베리아체의 수법을 안다.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현란한 연계기를 구사했고, 대부분의 연계기는 허초를 기반으로 삼았다.
무지막지하게 위협적인 첫타로 움직임을 강제한 뒤 빈틈을 찌르는 식이다.
날짐승마냥 날뛰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굉장히 체계적이란 의미.
한데 뮐러를 상대론 체계 자체가 무너졌다.
하루에도 수만 번의 검을 휘두르며 수백 년을 단련해온 검사 중의 검사.
힘든 자를 외면하는 법 없이 고독한 싸움을 되풀이했던 영웅 중의 영웅.
차원의 틈새에 스스로를 가두고 허송세월한 기간이 엄청나다 한들, 뮐러가 축적해온 노력과 경험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재능과 결합되어 기적으로 승화됐다.
세월을 무색하게 만드는 그리드에게도 경이로 다가올 정도로.
적이 움직이는 순간 궤적과 의도를 간파하는 일?
뮐러에겐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움직임 자체가 없었다.
스륵.
극한까지 단련 된 초감각을 기반으로.
뮐러는 절대자의 영역을 어색하게나마 유영했다.
몹시 느릿한 느낌으로 서리처럼 투명한 검을 손아귀에 쥐었다.
세 개의 영성이 깃든 검이었다.
하나는 다른 모든 신검과 마찬가지로 신살의 뜻을 품은 영성이다.
천상을 벌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다른 하나는 검을 만든 자의 영성이다.
검의 주인이 부디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이 느껴졌다.
마지막 하나는 검의 주인이 각인시킨 영성으로, 제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멸하겠다는 살의를 느낄 수 있었다.
‘이 검의 주인은 필시 고릴라처럼 난폭하겠군.’
성격의 문제로 인해 검로에 치명적인 손색이 있을 터다.
이 또한 인연이니 조금 다잡아줄까.
꾸욱.
뮐러가 칼자루를 거머쥔 손에 필요 이상의 힘을 실었다.
검의 주인에게 도움이 될 법한 파지법을 은근히 각인시켰다.
고릴라가 사람으로 거듭나길 기원하는 염원을 담았다.
순간.
서걱!
방금 막 뮐러의 턱을 스쳤던 베리아체의 좌수가 사선으로 잘려나갔다.
그리드에게 이미 큰 상처를 입은 걸로 모자라 마력으로 만든 혈액을 카츠에게 대부분 빼앗긴 직후라곤 하나.
그럼에도 절대자의 격을 유지하고 있던 존재가 허무하리마치 쉽게 치명상을 허용해버렸다.
선공을 실패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것이다.
그리드가 꿈에 그리던 후발선지의 극치였다.
크르르릉...
투명한 검이 호랑이 울음을 토한다.
새로운 주인에게 다뤄지는 것이 썩 나쁘지 않다는 듯이.
여파가 컸다.
좌수가 베인 즉시 반격을 시도한 베리아체의 노림수가 재차 수포로 돌아갔다.
혈마법을 구사하지 못하는 상태로 백호 자세를 취한 뮐러의 빈틈을 찌르기엔 그녀의 실력이 부족했다. 도리어 목과 허리를 크게 베이고 말았다.
내뻗은 팔을 비껴내며 다가오는 검에 연신 찔린 것이다.
‘그 많은 검중에서 메르세데스의 백호검을 가장 먼저 손에 쥐다니.’
그리드는 감탄을 거듭하고 있었다.
베리아체의 기세를 죽이기에 저만큼 탁월한 선택도 없었다면서.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기와 체를 템빨로 갖췄다.’
바로 곁에서 뮐러의 변화를 지켜본 크라우젤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이 순간 뮐러는 절대자였다.
어렴풋이 근접했던 경지를 백호검 한 자루에 의지해 완전히 성취해버렸다.
시스템 또한 인정하고 있었다.
서사시가 증명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검사가 신의 의지에 호응했다.]
[벌써 몇 번의 멸망을 겪은 세상을 목격한 끝에 뒤틀린 이념을 세운 인류의 대적에게 신으로부터 하사 받은 검을 겨눴다.]
[지상을 수호하겠노라는 신의 편에 선 그는, 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검이다.]
[두 번 다시는 꺾이지 않을, 절대적인 검.]
[신의 보검으로 합당했다.]
“...음?”
뮐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상 성전으로 취급 받는 그리드의 서사시는 플레이어가 아닌 인물들도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한 존재감을 나타냈다. 신탁과 같은 개념으로 인식되는 듯했다.
“뭐... 얼추 맞긴 하군.”
뭔가 태클을 걸고 싶은 눈치였던 뮐러가 금세 포기했다.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백호 검을 내려놓은 그가 병장기의 행렬 속으로 재차 손을 뻗었다.
이번엔 의외로 실패작을 거머쥐었다.
쥬드가 사용하는 업그레이드 버전의 실패작이었지만,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작품들과 비교하면 분명한 손색이 있는.
쩌어어어엉!!
잘린 좌수를 갈고리 모양으로 재생시켜 휘두른 베리아체의 작은 몸이 허공을 빙그르르 돌았다.
실패작의 칼등에 솟아난 작은 칼날에 갈고리가 걸린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몸이 통째로 들어 올려진다 싶더니 처참하게 내던져졌다.
큰 의미는 없었다.
절대자는 물리법칙을 무시하니까.
베리아체는 즉시 균형을 되찾았다. 마치 땅 위에 선 것처럼 평온하게 허공을 딛고 섰다.
뮐러가 그녀 앞에 있었다.
실패작이 아닌 구젤의 검을 손에 쥔 채다.
기세가 종전과 달랐다.
구젤의 검에 귀속 된 스킬과 능력치 상승 버프들이 뮐러의 기술과 육체를 완전한 단계로 진입시켰다.
구젤의 검에 담긴 온갖 업적과 비화가 격으로 치환되기도 했다.
검과 교감하는 수준을 넘어서 동화하는 것이 검성의 권능 중 하나이기에.
서사시로 인해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이 자리에.
템빨을 빌린 절대자가 강림했다.
움찔!
뮐러의 목덜미를 노리고 뻗어지던 베리아체의 손이 멈췄다.
뮐러가 심중에 품은 검이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검에 베인 베리아체는 그것이 착각인지, 사실인지 확신을 못하는 상태에서 자신의 목이 떨어졌다고 인지해버렸다.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것보다 짧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컸다.
뮐러가 검을 10번도 더 휘두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츠카칵.
검성이 베지 못하는 것은 없다.
놀랍도록 강렬한 검기에 휩쓸린 베리아체의 작은 몸이 방어가 무색하게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치명적인 손상이었다.
시체에 불과한 그녀는 안개로 흩어지는 등의 일부 권능을 구사하지 못했고, 혈액을 잃은 탓에 혈마법을 통한 재생이나 수혈에 제법 큰 장애를 겪었다.
“고인을 능욕하는 건 괴로운 일이군.”
불편한 심경을 토로한 뮐러가 지상으로 착지했다.
수십 갈래로 나뉜 베리아체의 시체가 나부끼는 광경을 배경으로 삼았다.
강렬한 모습이다.
템빨단원 전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드 또한 심장의 떨림을 느꼈다.
기대 이상으로 강력한 뮐러의 실력에 전율했다.
단 한 사람(?).
오직 크레이슐러만이 평정을 지키고 제 소임을 다했다.
잽싸게 관짝을 열고 베리아체를 향해서 날아갔다.
-장모님! 제 품에 안기십시오!
무후총에서 죽는 언데드는 무조건 다시 부활한다.
부활하기 전에 신목관으로 정화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런 거다.”
짤막하게 설명한 그리드가 동료들의 시선을 피했다.
굳이 설명한 보람이 없게도 크레이슐러가 부끄러웠다.
여태껏 저런 관짝과 함께 활동했다는 게 들켰다는 사실만으로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였다.
“장난은. 여기까지다.”
신목관이 베리아체의 시체에 닿기 전.
망령의 의지가 베리아체의 시신을 회수했다.
두근!
베리아체를 재현한 이후부터 멈춰있던 붉은 살덩이가 다시금 박동하기 시작했다.
처음 봤던 순간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뮐러...”
망령이 뮐러를 크게 의식했다.
어그로의 분산.
그리드에겐 좋은 기회였다.
이틈에 310개의 갓 핸드를 은밀히 다른 곳으로 날려 보냈다.
물론 망령의 기감을 속일 순 없었다.
망령은 뻔히 알면서도 무시했다.
그리드가 스스로 움직이는 저 수백 개의 손에게 ‘쓸모없는 수준을 넘어서 방해다.’면서 투덜거리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갓 핸드는 망령에게 아무런 위협이 아니었다.
갓 핸드의 숫자가 설령 수천 개로 늘어날지언정 망령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
망령의 권능은 찬탈이니까.
세상에서 최초로 신화를 찬탈했던 그녀는 다른 신의 신격과 권능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고유 능력이 있다. 그리드의 권능으로 분류되는 갓 핸드에게 상극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세상을 구원할. 최후의 수단을... 인간들이. 안식을 얻을... 유일한 방법을. 끝내... 부정한다면. 더 이상 그대들을... 존중해줄 필요는. 없겠지...”
[인류의 대적이 신의 의지에 거역했다.]
[영겁의 세월 동안 쌓아올린 힘과 권위로 신에게 맞섰다.]
서사시가 망령을 온전히 서술했다.
그리드를 칭송하기 위해 그리드의 적들을 폄훼하고 왜곡했던 기존의 방식과 달랐다.
서사시의 영향력으로도 망령의 격을 훼손하지 못한다는 증거였다.
[태초신의 사도.]
[단 하나의 목적을 이루고자 영겁을 견딘 인류의 대적이 신에게 선언했다.]
“유일신 그리드. 그대의 신화 또한... 내가 갖겠다.”
파지직!
망령의 새카만 신성이 확장되며 공간을 지배했다.
그리드를 포함한 모두가 온갖 페널티를 떠안기 시작했다.
무후총.
이곳은 지상이되 템빨계와 동떨어진 적진 한복판이다.
헬가오 덕분에.
아니, 정확히는 뮐러의 안배 덕분에 페널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지옥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 부쉈다.
쿠르르르르르릉...
“...?”
“...?”
그리드를 제외한 모두가 영문을 모른 채 천장을 올려봤다.
무지막지한 굉음이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온다 싶더니 이내 갈라진 천장의 틈새로 희미한 달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무후총에 달빛이 들어온다는 것은.
“무슨 짓을. 벌인 거지?”
짙은 어둠을 헤치고 서서히 번지는 달빛 아래 선 그리드에게 망령이 물었고,
[신께서 답하셨다.]
“템빨ㅎ...”
“신들의 무덤이오! 망령 당신 또한 곧 저곳에 묻히게 되겠지!”
“...”
[...그대야말로 신들의 무덤에 묻히게 될 거라고.]
꽈르릉! 쿠콰콰콰콰콰콰쾅!!
불쑥 끼어든 후로이가 그리드의 발언을 애써 포장하는 와중에 연속해서 운석이 떨어져댔다.
무후총 외부의 상공에서 초대형 항공모함 <신들의 무덤>이 폭격하는 메테오다.
그리드가 앞서 날려 보낸 310개의 갓 핸드가 직접 포격을 진행했다.
그리고 갓 핸드는 그리드의 능력치를 제법 흡사하게 구현한다.
갓 핸드가 행하는 포격은 템빨포병대의 포격과 비교가 안 되는 위력을 행사한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