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663화 (1,662/1,794)

템빨 82권 - 17화

망령의 얼굴이 레베카와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었다.

두상과 눈썹의 모양, 눈, 코, 입 등.

모든 면이 초상화 속 여신의 모습과 미묘하게 달랐다.

특히 눈동자의 차이가 컸다.

맑고 투명한 여신의 눈동자와 달리 탁한 잿빛으로 얼핏 맹인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종합적인 분위기가 너무 흡사했다.

자세히 뜯어보지 않는 이상 레베카 여신의 쌍둥이 자매로 착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왜 그렇게 여신과 닮은 거지?”

“외관을 지적하는가. 하찮은 부분을 신경 쓰는군.”

망령이 그 작은 얼굴을 다시 가면을 써서 가렸다.

누군가의 두개골을 고스란히 잘라 만든 듯한 가면.

쾅!

황룡의 신성에 튕겨져 나온 베리아체가 망령의 곁에 착지했다.

순간 발생한 충격파가 망령의 로브를 흔들자 기괴한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의 뼈를 엮어 만든 갑옷이었다.

정확히는 무후총의 양분이 된 인신들의 뼈가 갑옷처럼 엮여 망령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언젠가 그리드가 엿봤던 망령의 모습이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나를 비롯한 ‘최초의 인간’들은 모두 태초신의 얼굴을 닮았다. 단순히 참고할 만한 대상이 그들밖에 없어서였겠지.”

[‘최초의 인간’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창세 신화에도 등장하지 않는 새로운 지식의 획득으로 지력이 100 상승합니다.]

여태껏 알려지지 않은 정보의 가치는 몹시 컸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

그리드와 템빨단원 전원의 지력 스탯이 무려 100개나 올랐다.

평범한 플레이어에겐 레벨 업을 10번 한 것과 비견되는 가치.

“최초의 인간...”

스컹크를 비롯한 탐험가들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당장 오른 스탯에는 관심이 없었다. 앞으로 파헤칠 수 있는 이야기가 추가됐다는 사실에 들뜰 뿐.

“당신의 악취미는 하필 여신을 닮은 본인의 모습을 숨기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거고?”

그리드는 망령의 외견을 재차 지적했다.

노골적인 악취미.

인신들의 뼈를 뒤집어 쓴 모습에 깊은 혐오감을 느끼면서다.

“단지 편의를 추구했을 뿐이다. 외견에 집착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건 인간과 동물의 특징이거늘. 유일한 신의 태도로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편의? 그간 빼앗아온 신격을 보다 쉽게 활용하기 위한 용도로 그 뼈들을 이용하는 건가?”

“대충 옳다.”

망령의 대답이 신호였다.

310개의 갓 핸드가 불시에 망령을 덮쳤다.

그녀가 무장하고 있는 갑옷과 투구에서 뼛조각들을 떼어낼 의도를 품고 파고들었다.

“다소 치졸한 면이 있군...”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기울인 망령이 좌수를 휘둘렀다.

절그럭.

얽힌 뼛조각들이 마찰하는 불쾌한 소음과 함께 마기가 번졌다.

망령의 손이 이동하는 방향에 궤적을 남기는 마기였다.

단 한 줌의 빛조차 허용하지 않을 것처럼 새카만 그것이 갓 핸드와 닿는 순간 전염 됐다.

갓 핸드와 갓 핸드 사이를 넘나들며 연쇄되더니 종국에는 그물처럼 펼쳐졌다.

순식간이었다.

310개의 갓 핸드가 어느새 거미줄에 묶인 하루살이로 전락해버렸다.

마기에 똘똘 묶여서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됐다.

“홀리 라이트.”

템빨단원들 사이에 있던 성녀 루비가 스킬을 전개했다.

갓 핸드를 통째로 포획한 마기를 표적으로 삼았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루비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마기가... 아니야?”

“...!”

저게 마기가 아니면 뭐라는 거지?

루비의 충격적인 발언이 여러 사람들을 당혹시켰고,

‘신성.’

그리드는 망령이 다루는 새카만 기운의 정체를 확신했다.

야탄으로부터 비롯했을 그것은 ‘마기의 근원’이되 마기가 아닌 신성이었다.

당연한 것이다.

처음부터 예상했다.

망령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대화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콰작! 콰자자작!!

새카만 신성이 빠르게 응축되어갔다. 급기야 몽둥이의 형상을 갖출 때까지.

310개의 갓 핸드는 여전히 그 안에 갇혀있었다.

“그대의 질문에 나는 올바르게 답변했다.”

그리드는 망령의 정체에 대해서 물었고, 망령은 야탄 신의 사도라고 대답했다.

거기서 대화가 끊겼다.

그리드가 망령의 외모를 지적한 까닭에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했다.

“첨언하자면, 나는 섬기는 신의 꿈을 수호하지 못한 죄인이다. 혐오스러운 과거의 잔재로, 존재할 가치가 없다. 하지만 왜곡 된 지옥은 내게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짧은 소개를 마친 망령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유일신 그리드, 나의 목적은 지옥의 수복이다. 그대와 어느 정도 목적이 일치한다고 생각하는데.”

“...”

그리드는 망령의 음성이 기괴한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가 호흡할 때마다 코와 입을 통해 번지는 새카만 신성과 매캐한 탄내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고.

‘신성이 너무 강력해서 육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건가? 절대자인데도?’

야탄의 신성.

세계를 탄생시킨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마기의 근원을 넘어 세계의 근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막강한 게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온갖 신화를 포식한 끝에 절대자의 위계를 쌓은 망령조차 감당하지 못한다는 건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하물며 그녀는 야탄의 사도 아닌가. 야탄의 신성을 사용할 ‘허가’를 받았을 텐데도 저 모양인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강력하면...’

그리드가 망령의 손에 쥐어진 몽둥이를 바라보았다.

새카만 신성으로 빚은 몽둥이.

310개의 갓 핸드가 응축 되어 얼핏 금색을 띄었다.

‘도움이 안 되다 못해서 이젠 트롤링까지 하는 거냐...’

브라함의 영향을 받은 탓일까.

갓 핸드에 똥이 묻었다며 한탄하는 그리드의 귓전에 망령의 쇠 긁는 목소리가 연신 스며들었다.

“그대의 무위는 충분히 목도했다. 베리아체 모녀에게 호의를 얻는 등, 그대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까지 고려하면 그대의 신격을 포식하는 것보단 그대와 협력하는 편이 좋겠다는 계산이 서는데. 혹시 내게 협력할 생각은 없나?”

“어떤 협력을 바라는 거지?”

“간단하다. 이곳에서 나가라.”

거의 꺼지라는 어감이다.

그리드가 당장 눈앞에서 사라져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지옥을 수복하는 게 목적이라며?”

“그래.”

“목적을 이룰 방법은 이미 전부 마련했나 보지? 내가 도울 필요도 없는 거 보면? 이것과 관련이 있나?”

그리드가 등지고 선 살덩이를 가리키며 물었고,

“그렇다.”

망령은 숨기지 않았다.

그리드가 설명을 요구했다.

“난 이것과 완전히 똑같은 걸 지옥에서도 봤다. 바로 그게 지옥을 왜곡시킨 원흉이라지. 한데 그것과 똑같은 물건으로 지옥을 수복시키겠다고? 섣불리 믿기질 않는데.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쓰려는 거지?”

“...궁금한 게 몹시 많군.”

망령이 설명을 거부했다.

자신이 세운 계획을 순순히 설명하기엔 뮐러의 반응이 떠올라 꺼림칙했던 것이다.

“설명 못하는 거 보면 켕기는 게 있나 봐?”

“왜곡 된 지옥 탓에 죽은 인간들이 안식하지 못하고 고통 받는 실정이다. 그들을 구원하려는 나의 목적과 수단은 옳다.”

“추악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고문당하는 심정이로군. 이보시오, 망령! 자꾸 말 돌리지 말고 순순히 설명하시오! 그토록 대단하다는 양반이 왜 그리 혓바닥이 긴 게요? 태초신들이 최초의 인간을 만들 때 실수로 혀의 길이를 잘못 재기라도 했소? 태초신이라는 작자들이 한때는 미개해서 측량조차 제대로 못했다고? 허, 참. 그리드 님께서 탄생하시기 전까진 세상이 개판이었던 이유가 있었구만.”

“...”

대화에 진전이 없자 후로이가 끼어들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반트너를 전위에 세운 채다.

어그로를 분산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사적인 이유로 살의를 품게 되는 건 수천 년 삶을 통틀어서 세 번째군.”

효과는 없었다.

망령의 시선이 반트너의 민머리를 지나 정확히 후로이에게 향했다.

동시였다.

후로이의 머리 위로 새카만 몽둥이가 떨어진 것은.

절대자의 신속.

그리드가 따라붙었지만 한 발 늦었다.

원하는 즉시 위치를 옮기는 절대자끼리는 ‘누가 먼저 움직이느냐.’에 영향을 크게 받는 법이다. 늦게 움직이는 쪽이 당연하게 불리했다.

‘황룡의 쿨타임은 왜 12시간이나 되는 거지?’

신성의 강화 효과로 방금 전 새롭게 얻은 스킬.

그리드는 <황룡>을 통해 아군을 보호하는 그 스킬이 조금(?) 사기 같다고 평가했었지만, 지금 즉시 평가를 바꾸었다. 사기는커녕 하자가 크다고.

‘괜찮아. 후로이는 무조건 한 턴은 버틸 수 있어.’

후로이의 정수리에 몽둥이가 꽂히기 직전.

그리드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후로이에게 불사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좀처럼 진정 되질 않았다.

공격의 파장을 염려해서다.

현재 후로이의 주변엔 수백 명의 동료가 집결해 있다.

저 몽둥이가 후로이의 머리를 가격하는 순간 발생할 충격파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빌어먹을...!’

결국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그리드가 이를 악 무는 순간이었다.

“...!”

망령의 몸이 문득 멈췄다.

입에서 한 줄기 피를 토하면서.

마치 용언처럼 강력한 누군가의 의념이 그녀의 심장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리드 입장에선 영문을 모를 일이었지만, 아무튼 기회였다.

꽈아아아아앙!!

망령이 멈춘 틈에 후로이의 곁에 도착한 그리드가 휘두른 황혼이 몽둥이와 충돌했다.

“차원의 틈새로 도망쳤던 검성을 데려올 줄은... 준비성이 철저하구나.”

망령의 말이 끝났을 때.

“헉.”

“뭣...!”

자신들의 머리 위에서 충돌하고 있는 그리드와 망령을 인지한 템빨단원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특히 후로이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리드와 망령의 시선은 공동의 입구 쪽으로 향해있었다.

두 명의 사내가 보였다.

한 명은 당대의 검성이었고,

[역대 최강의 검성 ‘뮐러’가 출현하였습니다.]

다른 한 명은 전대의 검성이었다.

떠오르는 월드 메시지가 증명했다.

번쩍!

한 발 늦게 떨어진 빛의 창이 망령을 덮쳤다.

대수롭지 않게 쳐내는 망령의 몽둥이가 꿈틀거렸다.

안에 갇힌 갓 핸드들이 격렬히 저항하는 탓이다.

‘소화되지 않는다?’

내심 놀란 망령이 득보단 실이 크다고 판단하며 몽둥이 속 갓 핸드들을 배출했다.

“뮐러와 소통해왔다는 건... 나의 계획을 뻔히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겠군.”

“?”

“그 표정은 뭐지?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순진한 척 연기하는 건가. 위계에 어울리지 않게 모난 구석이 있구나.”

망령이 표출하는 감정이 점차 다양해졌다.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그리드를 조소하는 것이다.

뮐러가 송아지 같은 두 눈을 껌뻑였다.

“수천 년 묵은 목석을 무슨 수로 도발했지? 자네가 섬기는 신의 권능은 설마 조롱이나 욕설과 관련이 있나?”

“...”

크라우젤은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했다.

그리드 곁에 있는 후로이를 발견한 까닭이다.

“그래... 그대들도 알다시피 나는 이곳에 지옥을 세울 것이다. 바알이 왜곡시킨 지옥을 거울로 비추듯 똑같은 지옥을 세워 지옥의 존재 가치를 없앨 것이다.”

“...?”

“이외에 지옥을 정화시킬 방법이 또 있다고 보나? 내 방법이 난폭할지언정 틀렸다고 할 수 있나? 그대들 중 더 나은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말하라. 경청하겠다.”

망령은 수천 년 동안 정답을 찾아 헤맨 끝에 지금에 이른 존재다.

그의 신념은 강력하고 확고했다.

“애초에 내가 이곳에 지옥을 세운다고 해서 지상이 반드시 멸망하리란 법도 없다. 그리드, 그대가 지상의 격을 끌어올리고 있는 이상 지옥과 똑같은 규모로 비대해지는 무후총의 에너지를 지상이 감당할 확률이 없지는 않아.”

-순 미친놈이었군.

크레이슐러가 그리드의 심정을 대변해주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검성 뮐러의 출현이 월드 메시지로 떠오른 이날.

무후총을 비롯한 세계 곳곳의 정세가 격변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