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2권 - 16화
아모락트를 신용하지 말 것.
‘나’에게 상처를 입지 말 것.
끝으로 망령을 두려워 할 것.
그리드는 베리아체의 세 가지 충고를 가슴 깊이 새겼다.
아모락트는 처음부터 의심했었다.
애초에 ‘분쟁’의 대악마 아닌가.
뭐가 그렇게 켕기는 게 많은지 얼굴조차 천 쪼가리로 가린 놈이다.
여러모로 음흉했고 신뢰 할 근거가 부족해서 협력하자는 제안을 보류 중이다.
아쉬운 입장인지라 단칼에 거절하진 못했고.
‘베리아체에게 상처를 입어선 안 된다는 점도 당연히 숙지하고 있었다.’
마리로즈는 흡혈한 대상의 능력을 구현하는 권능을 지녔다.
악룡과의 전투에서 증명했다.
그 대상에 제한이 없다는 듯이, 무려 용살자 하야테의 힘을 구현해서 휘둘러댔었다.
베리아체도 같을 것이다.
물론 마리로즈가 베리아체의 이상(理想)인 이상 비교적 손색은 있겠지만.
심지어 눈앞의 베리아체는 진짜가 아닌 시체에 불과했다.
하지만 흡혈의 권능을 좌시할 순 없었다.
무식하게 강력한 6융합 검무에 단 한 번이라도 얻어터지는 경험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으니까.
‘아픈 건 싫어.’
사람들 앞에서 내색하진 못했지만, 절대자의 영역을 운용하는데 소모되는 심력만 해도 감당하기 벅차다.
바라는 대로 움직이는 몸이라는 건 사용자의 인지마저 넘어서는 부분이 있어서 뇌에 금방 과부하가 걸렸다.
의식에 허점이 생긴단 말이다.
바로 그때, 정말로 아무런 대비도 없이 절대자의 강력한 공격을 허용한다?
제라툴 전에서 겪기로, 비명을 내지르면서 울 뻔했다.
현실과 가상을 잠시 망각했을 정도로 얼굴이 뭉개지고 팔이 베여나간 고통이 끔찍하게 다가왔다.
과장이 아니다.
본래 작은 상처도 무시하기 힘든 법이다.
고가의 캡슐을 사용하며 싱크로율을 높게 설정하는 랭커일수록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꽈아아앙!!
금의 성역을 이루는 협곡의 일각이 흔들렸다.
그리드가 회피한 베리아체의 발차기가 충돌하며 일으킨 여파다.
탐욕이 아닌 평범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협곡이었다면, 단순히 흔들리는 수준을 넘어서 무너졌으리라.
‘무지막지한 괴력... 힘에 한해서는 바알이나 나보다 한 수 위군.’
과연 순수한 신체 능력일까?
섣불리 믿기지 않는다.
베리아체의 몸은 진짜 여중생마냥 작았으니까.
‘어쩌면 기본 세팅이 되어있는 걸 수도.’
망령은 이미 ‘무언가를 흡혈하고 힘을 빼앗은 상태’의 베리아체를 시체로 일으킨 걸 수도 있다...
오싹.
시체의 강함을 납득하기 위해 세운 가설이 그리드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망령이 과할 정도로 전능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뭐, 충분히 납득은 됐다.
무려 태초신의 사도.
망령은 ‘신들의 신’을 섬기며 무지막지한 세월을 축적한 존재였다.
간단히 생각해서 브라함이 수천 년의 세월을 축적한다고 가정해 보자.
...끔찍할 정도로 두렵다.
망령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놈이 도착하기 전에 반드시 베리아체의 시체를 제압해야 한다.’
그리드는 망령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
마리로즈와 여울랑에 이어서 베리아체까지.
등선한 초월자와 세계를 움직이는 절대자들이 망령의 위험성을 경고해왔고, 그리드 또한 공감했지만, 그리드에겐 망령의 목적을 파악할 의무가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만나야 했다.
‘한낱 시체야. 다치지만 않으면 쉽게 이길 수 있어.’
그리드가 수백 개의 갓 핸드를 곁으로 불러들였다. 검과 방패를 무장시켜서 호위로 삼았다.
드래곤 아머를 구성하는 수백수천 개의 미늘이 그리드의 단단한 육체에 매끄럽게 흡착됐고 금의 성역에서 일으킨 심상이 발할라로 투영되어 덧씌워졌다.
황룡의 권한으로 백호의 숨결을 내쉬는 동시에 룬의 힘으로 <자동 연성> 등의 방어 관련 스킬까지 둘러쳤다.
그리드가 자칭하기로 템빨 거북 모드.
등껍질을 뒤집어 쓴 거북이마냥 템빨을 뒤집어썼다는 의미다.
템빨에 비견되는 스킬빨은 애써 무시했다.
아무튼 피 한 방울 안 흘릴 자신이 있었다.
‘제라툴과의 싸움에서 확실히 배웠다.’
공격력은 이미 충분하다.
유일신의 권한 즉, <스킬 지정>의 효과로 신장의 자유 발동이 가능해진 지금은 더욱 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방어력을 극대화시키는 편이 그리드 입장에선 도리어 밸런스가 맞았다.
하물며 절대자를 상대로라면.
꽈아아아아앙!!
그리드가 5융합 검무를 휘둘렀다.
반사적인 전개였다.
쾌속하게 손을 뻗어 낚아채고, 실패할 경우 즉시 타격으로 연계하는 베리아체의 현란한 수법에 대응하기 위한.
까가가가가가강!!
베리아체의 공격은 단타로 끝나는 법이 없었다.
어떤 경로를 근원으로 삼든 반드시 연계됐다.
그리드가 방어에 그치지 않고 반격을 노리려면 융합 검무를 필수로 써야하는 수준이었다.
‘압박감이 대단하군.’
시체의 강점은 확실했다.
숨 쉬지 않아도 되는 몸.
베리아체의 화려한 콤보는 물리적인 제약을 무시하는 형태로 전개됐다. 호흡을 고르지 않으니 동작이 끊기는 경우가 없고 몹시 집요했다. 제 관절이 역으로 꺾이든, 부러지든, 개의치 않고 철저하게 상대방의 급소를 공략했다.
성격과 별개로 정통을 추구했던 제라툴의 무위와는 정반대의 성향인 것이다.
꽈르르르르릉!!
갓 핸드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그리드의 품에 안길 기세로 접근한 베리아체의 팔다리가 펄럭이는 방향으로 갓 핸드와 무구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뒤늦게 동심원을 그리는 충격의 파장이 주황색 신성과 붉은 혈기를 머금어 아름답기까지 했다.
-마리로즈가 장모님을 꼭 빼닮았구나.
신목관이 부르르 떨렸다.
생전에 겪었던 마리로즈와의 사투를 떠올리는 눈치였다.
-물론 장모님께서 훨씬 더 고강하시네. 과거의 마리로즈는 내 준수한 외모와 솔직담백한 성격에 반해선지 힘을 억제하고 싸웠었거든. 돌이켜보면 그건 숫제 유희였네. 우리는 종족을 초월하여 교감하였지.
‘나태의 저주 탓에 약해진 상태였던 걸 무슨 염치로 저렇게 미화하는 걸까?’
크레이슐러의 헛소리가 그리드의 몰입을 깨뜨렸다.
도움을 받은 것이다.
다른 절대자들처럼 무지막지한 존재감을 발산하는 까닭에 그리드의 시야에 가득 찼던 베리아체의 모습이 정상적으로 회복됐다.
오직 베리아체에게만 집중됐던 그리드의 의식이 전장 전체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그래야지.
왠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만 같은 크레이슐러의 음성이 그리드를 전율시켰다.
-자네가 봐야 할 대상은 눈앞의 상대가 아니라 바로 자네 자신일세. 다름 아닌 자네가 이 세계의 중심이건만 어찌 다른 것을 의식하고 매몰된단 말인가?
이 순간.
그리드는 선인의 도움을 받았다.
세월을 압축하듯 성장을 거듭해온 탓에 비교적 부족했던 경험을 깨달음을 통해서 적절히 충족했다.
-모든 흐름은 자네의 의지로 만드는 것일세. 모든 상황을 자네의 통제 하에 두는 게야.
레베카교는 세계의 중심이었고 크레이슐러는 교황이었다.
온 대륙의 인간이 신분을 막론하고 그를 숭배했다.
왕들조차 무릎 꿇고 그를 성하라 칭했다.
그럼에도 신보다 아래였다.
교황은 어디까지나 신의 종에 불과했다.
하물며 유일 신?
교황이라 해도 그림자조차 밟지 못할 대상이다.
외면하는 것에 가까웠겠지.
여신 외의 신을 유일한 신이라 믿는다는 것 자체가 불경이므로.
-하잘것없는 개인에게 몰입하지 말게. 그것이 자네의 위치일세.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교황 ‘크레이슐러’가 당신을 재차 증명합니다.]
[당신이라는 존재가 한층 더 뚜렷해집니다.]
격의 상승과 닮은 듯 달랐다.
능력치나 스킬이 추가되는 등의 성장은 없었지만, 그리드의 신성이 좀 더 짙어졌다.
황룡의 형상이 부풀었다.
기존의 크기가 커다란 구렁이 수준에 불과했다면 이젠 얼핏 이무기로 보였다. 똬리를 튼 채로도 그리드의 전신을 온전히 감싸고 대가리가 높은 곳에 위치했다. 그리드가 바라보는 방향을 굽어보는 느낌이다.
바뀐 건 없었다.
베리아체의 기세는 여전했다.
시체답게 신성 따위엔 처음부터 관심도 없던 눈치다.
신성을 불처럼 뿜어대는 황룡의 형상엔 눈길조차 보내지 않고 집요하게 그리드만 공격했다.
폭포수가 쏟아지듯 요란하고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공세.
어쩌라고.
‘안 아파.’
자동 연성과 갓 핸드로 세운 방벽이 무참하게 벗겨져나갔지만 겉으로만 위기로 보일 뿐이다.
그리드의 진정한 호신강기는 백호의 숨결과 드래곤 아머, 그리고 심상으로 엮은 발할라였다.
그리드는 안전했다.
베리아체의 공격이 영원히 멈추지 않을지언정 견딜 수 있었다.
망령이 도착하기 전에 그녀를 없애기 위해선 공격을 꿰뚫고 반격해야한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기다린다.’
그리드는 초조해하지 않기로 했다.
일일이 융합 검무로 대응하지 않고 숨죽인 채 때를 기다렸다.
스아아.
기다리던 순간은 금방 찾아왔다.
베리아체가 어떤 변화를 보였다.
꺾여나간 관절 틈새에서 흘러나온 혈액이 일정량 이상이 되자 새로운 혈마법의 전조를 일으킨 것이다.
여태껏 전개 중인 필드 마법들과 궤가 달랐다.
피를 매개로 무구를 빚는 것도 아니었다.
소환 마법.
미로에 발이 묶여 제때 도착하지 못하고 있는 직계들을 불시에 소환하는 마법이었다.
기회였다.
베리아체가 손과 발을 휘둘러댈 때마다 노도처럼 밀려들며 검의 기세를 죽였던 혈기가 흐름을 멈춘 아주 찰나의 틈.
그 틈을 노리고, 그리드가 황혼을 휘둘렀다.
때마침 도착한 직계들이 6융합 검무의 검기 파장에 휩쓸려 목이 떨어져나갔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처음부터 노렸던 거니까.
‘어차피 다시 부활하잖아.’
저들은 내 소유물인 이상 죽지 않는다.
베리아체에게 홀려버린 지금은 차라리 없는 편이 나았고.
“시체 주제에 너무 설치지 마.”
상체가 반으로 갈라지고 목이 옆으로 꺾인 베리아체와 시선을 마주친 그리드가 속삭였다. 승기를 완전히 잡았다고 판단했다.
얼굴에 튄 베리아체의 혈액이야 닦아내면 그만이었기에 전혀 의식하지 않았고.
실수였다.
베리아체의 권능을 아직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시조 ‘베리아체’의 혈액이 당신의 체내에 침투하였습니다.]
[각종 혈구가 파괴됩니다.]
[상태이상 ‘치명적인 출혈’이 발생합니다. 초당 5퍼센트의 생명력을 잃습니다.]
[저항에 실패합니다.]
“큭...!”
그리드가 조급해졌다.
비강을 타고 올라오는 액체를 느끼면서다.
잠시 후 쏟아질 코피.
흡혈당하면 위험해진다.
판단하며 급히 투구를 고쳐 썼다. 시야가 조금 답답해질 정도로 깊이 눌러썼다.
무의미했다.
뱀파이어의 가장 기본적인 권능은 ‘혈액을 다루는 것’이다.
그리드가 흘린 핏물이 베리아체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두둥실 떠올라 그녀가 내민 붉은 혀에 닿아갔다.
끝내 닿진 못했다.
그녀에게 향해가던 핏물을 더 강한 구속력이 빼앗은 탓이다.
스아아아악...
안개마냥 번진 핏물이 향하는 방향에 한 사내가 있었다.
카츠였다.
현재 그는 직업 퀘스트가 발생한 상태다.
베리아체의 영혼.
즉, 베리아체의 본체로부터 시체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권한’을 일시적으로 부여 받았다.
“흡혈 당할 걱정은 말고 마음껏 싸워라, 그리드.”
촤르르르륵!
그리드는 카츠를 신뢰한다.
전후사정을 묻지 않고 금제를 풀었다.
그를 중심으로 결집하려는 성질을 유지하던 310개의 갓 핸드가 일제히 날개마냥 펼쳐졌다. 방패를 버리고 순전히 무기만 무장했다.
스륵.
백호의 숨결의 효과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 전투 내내 지면에 붙어있던 그리드의 두 발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굳이 떠안았던 공간적 제약을 버린 것이다.
출혈 탓에 실시간으로 떨어지는 중인 생명력조차도 무기로 삼았다.
산중지왕의 발동으로 유체화 상태에 돌입, 가속하여 돌진기인 <위룡극파살연>의 위력을 극대화시켰다.
한 순간이나마 베리아체의 시체가 반응이 늦었을 정도다.
꽈르르르르릉!!
황혼이 베리아체의 작은 몸을 관통하고, 베었다.
하지만 상대는 시체다.
치명상을 입으면서도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반격했다.
아까부터 유지 중인 <블러드 필드>가 그녀의 상처를 실시간으로 수복시키고 있었다.
“...”
작은 손이 그리드의 목덜미를 향해 뻗어졌다.
목뼈를 부러뜨릴 의도가 담겼다.
섬전과도 같은 속도.
어찌나 쾌속한지 주변의 공기가 응축 됐다. 공동에 맴돌던 바람이 불시에 멈춘 채 그릉그릉 기이한 소리를 흘렸다.
평범한 사람에겐 아직 닿지 않는 소리다.
말 그대로 찰나.
파파파파파팟!!
베리아체의 손이 수십 회 궤도를 바꿨다.
그녀의 손짓을 따라 회오리치는 붉은 혈기가 그리드의 신성을 좀먹고 들어갔다.
덥썩! 끼긱, 끼기긱!!
작은 두 손이 급기야 그리드의 갑옷 틈새를 파고들고 벌려갔다. 열 개의 손가락이 모조리 기이한 방향으로 꺾인 와중에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는 시체의 모습이 그리드를 소름 돋게 만드는 그때.
번쩍!
빛의 창이 베리아체의 두 손을 꿰뚫어버렸다.
검무의 후폭풍이 한 발 늦게 발생한 것이다.
한 발 늦게라고 해봤자 0.1초가 안 되는 차이였지만.
쿠콰콰콰콰콰쾅!!
뒤이어 떨어진 운석들이 베리아체의 작은 몸을 짓뭉개길 반복하며 지하로 침몰시켜갔다.
한편으론 무구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수백 개의 갓 핸드가 일제히 공세를 퍼붓기도 했다.
쏴아아아아...
여태껏 베리아체의 상처를 빠르게 회복시켜주던 블러드 필드가 옅어졌다.
망령이 만든 인공 혈액을 매개로 삼은 마법.
시체의 저급한 자원이 카츠가 뻗은 두 손에 빨려들고 있었다.
베리아체의 의지가 일으키는 현상이다.
시체의 표적이 바뀌었다.
지하 깊은 곳까지 묻혔던 놈이 소리 없이 튀어나왔을 때, 놈의 위치는 그리드가 아닌 카츠의 등 뒤였다.
“안 돼!”
놀란 그리드가 소리친 순간.
콰앙!
카츠의 몸 위로 주황색 빛의 기둥이 떨어진다 싶더니 그리드를 감싸고 있던 황룡의 위치가 카츠에게 옮겨졌다.
“...?”
“...?”
그리드도, 카츠도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고,
꽈장창!!
이미 카츠의 가슴을 절반가량 파고들고 있던 베리아체의 손이 어떤 반발력에 의해서 튕겨 나왔다.
그리드의 신성에서 느꼈던 반발력이다.
[당신의 일부인 <황룡 신화>는 수호신들의 염원으로부터 비롯한 것입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반드시 수호하고자 한다면, 황룡은 당신의 염원에 호응할 것입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12시간.]
“...”
신성의 진화라는 게 이런 식으로도 이뤄지는 거였나?
‘조금... 아주 조금 사기 아닌가?’
그리드가 몹시 적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저벅.
낯선 발걸음이 들려왔다.
기척만으로 알 수 있었다.
베리아체를 초월하는 압도적인 존재감.
망령이었다.
“베리아체여. 그대는 자신의 의지로 심장을 내줘놓고 왜 새삼 훼방을 놓는 거지...”
의문을 토로하는 망령의 쇠 긁는 듯한 음성이 장내의 사람들을 경직시켰다.
급히 시선을 돌린 그리드가 망령을 보고 동요했다.
의외로 그는 언데드가 아니었다.
어떤 악취미인지 두개골을 갈라 만든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
문제는, 깊이 뒤집어쓴 로브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긴 금발에 있었다.
빛을 빗어낸 듯한 금발.
그리드는 인계에 존재할 수 없는 저 ‘색’을 본 기억이 있다.
천상의 일부 신들로부터.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야?”
“야탄 신의 사도다. ‘과거’에서 보았을 텐데?”
딸칵.
망령이 가면을 벗자 그리드를 비롯한 템빨단원 전원이 숨을 죽였다.
심지어 크레이슐러조차 얼음처럼 굳어선 꼼짝도 못했다.
망령의 얼굴이 빛의 여신 레베카와 꼭 닮은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