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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61화 (1,660/1,794)

템빨 82권 - 15화

“세상이... 참으로 많이 바뀌었군.”

무후총으로 향하면서.

뮐러는 온갖 믿기 힘든 일들을 목도했다.

일단 사람들이 굉장히 용맹했다.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괴물은 살아 움직이는 재앙이었다.

소수의 단련 된 전사들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사람이 괴물을 두려워하며 숨죽인 채 지냈다.

큰 산을 하나 넘으려면 반드시 용병을 고용하거나 목숨을 거는 식이었다.

하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 괴물은 뒷산 멧돼지와 동급의 사냥감 취급을 받고 있었다.

다양한 인간들이 각자의 능력으로 괴물들을 학살하고 시체를 전리품으로 삼았다.

심지어 목검 하나 달랑 쥔 약골들도 마을 앞의 슬라임을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닌 반드시 사냥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목숨이 무한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설픈 동작으로 굳이 슬라임에게 다가가 공격해댔다.

이쯤 되면 과거에 괴물에게 죽었던 사람들이 환생해서 원수를 갚는 게 아닐까 싶을 지경이었다.

물론 허황된 생각이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왜곡 된 지옥에 묶여있는 상태니까.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공격적인 진화를 거듭해온 건가...? 수천 년을 짓밟힌 끝에 비로소 운명에 반역하고자...?”

초보자 마을부터 고레벨 사냥터에 이르기까지.

열정적으로 활약 중인 ‘플레이어들’의 모습은 옛 사람인 뮐러에게 불가해로 다가왔다. 골똘히 궁리하게 만들었다.

“아니면 그대가 말했던 ‘신’의 영향일까.”

뮐러를 뒤쫓는 크라우젤의 시야는 고속 열차에 탑승한 것처럼 빠른 풍경의 전환을 맛보고 있었다.

스킬과 물약으로 버프 효과를 유지하고 스태미나의 급격한 하락을 감수하고 나서야 간신히 뮐러의 속도를 쫓을 수 있었다.

하여 크라우젤은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지만, 뮐러는 이미 수백 번도 더 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신의 모습을 묘사한 동상이나 석상 따위들을.

뮐러의 시대에는 당연하게 주류를 이뤘던 레베카 여신상은 몹시 드물어진 반면, 정체불명의 신상은 어느 국가, 어느 지역에서나 흔히 볼 수 있었다.

당대의 검성이 섬기는 듯이 말했던 신의 형상이리라.

“둘 다 맞습니다.”

크라우젤은 뮐러의 추측들을 전부 긍정했다.

인류의 진화.

플레이어를 이 세계의 인류로 구분할 경우 뮐러의 진화론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신의 영향력.

유일신 그리드의 존재가 플레이어들의 성장을 촉진시켜온 것도 사실이다.

당장 사냥터를 휩쓸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템빨국산 아이템을 무장하고 있었다. 그리드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탄생한 아이템들 말이다.

[스태미나가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무려 수천 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전력으로 달렸다.

단지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끈기와 의지 스탯이 상승했을 정도다.

여파가 컸다.

급기야 호흡이 흐트러진 크라우젤의 다리에서 기운이 빠졌다.

“...”

검성 뮐러는 한층 더 가속하고 있었다.

보란 듯이 이기어검을 전개하여 검을 날리고 그 위에 탑승해버린 것이다.

빛살처럼 쏘아지는 검 위에 뒷짐을 지고 선 모습이 고고한 신선과 닮았다.

크라우젤의 시야에서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이대로는 놓친다는 생각에 크라우젤은 초조해졌다.

뮐러는 지상에 내려온 변수다.

반드시 감시 하에 두고 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당대의 검성으로서 전대에게 밀리지 않고 싶다는 욕구도 있었다.

“...!”

습득 중인 심법들을 교차 운용하며 스태미나의 회복을 도모하던 크라우젤이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뮐러가 띄운 이기어검이 두 자루라는 사실을.

즉시 황혼을 뽑은 그가 어느새 점이 되어있는 뮐러의 검을 표적으로 삼고 이기어검을 전개했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나마 탑승했다.

뮐러와 달리 안정감은 없었다. 거의 매달리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균형감각으로 점차 검 위에서 몸을 일으켜갔다.

표적을 쫓으려는 이기어검의 습성이 고속 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덕분에 크라우젤은 뮐러와의 거리를 좁히진 못할지언정 시야에서 놓치지 않고 추격할 수 있었다.

‘눈치도 빠르고 감각이 뛰어나군.’

힐끔.

시선을 돌려 크라우젤의 모습을 확인한 뮐러가 흐뭇한 미소를 그렸다.

수많은 검사들이 왜 그토록 제자를 갖기를 열망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

“산개.”

지슈카의 명령과 동시에 템빨단원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재차 부활한 옛 영웅으로부터 거리를 벌리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쏟아진 화살의 비가 영웅을 폭격하고 약화시켰다.

파마의 성질은 보통의 신성과 결이 다르다.

성스러운 기운으로 사악한 기운에 반발하는 게 아니라 사악한 것을 난폭하고 집요하게 멸했다. 귀기가 감돌아 오싹할 지경이었다.

“공격하지 말고 대기해.”

이전까지의 패턴에서.

옛 영웅의 시체는 일정량 이상의 데미지를 한꺼번에 입을 경우 방어태세를 취했다.

화살의 비에 타격을 입고 휘청거리는 시체에게 템빨단원들이 돌진하려던 이유다.

적이 방어에 힘쓰는 사이에 원 없이 공격을 퍼붓고 격차를 더 벌려놓으려는 의도였고, 앞선 9차례의 레이드에서 같은 수법으로 큰 재미를 봤다.

하지만 지슈카가 처음으로 돌진이 아닌 대기 명령을 내렸다.

시체와 스치듯이 눈이 마주친 까닭이다.

“저 놈,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지만 분명히 나를 의식하고 있어.”

여태까지완 다른 반응.

새로운 패턴이 등장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과연 지슈카의 예측은 맞았다.

전과 똑같이 웅크린 자세로 있어 방어 스킬을 전개할 줄 알았던 시체의 신형이 지슈카를 노리고 쏘아졌다.

당황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대기 중이던 인원들이 일제히 움직여 지슈카를 지키는 방벽이 되었다.

본래 궁사란 다수의 병력과 함께일수록 강해진다.

아군이 벌어주는 기회를 이용해서 압도적인 화력을 쏟아낼 수 있으니까.

그리고 유독 지슈카가 다수의 병력을 운영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졌다.

주작의 기운으로 아군을 강화하고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통솔력이 워낙 뛰어난 까닭이다.

체다카 길드 마스터 출신인 그녀의 용병술은 템빨단 내에서 한 손에 꼽혔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힘 있는 목소리 때문일까.

지슈카의 카리스마는 좌중을 휘어잡는 힘이 있었다. 그녀의 지휘를 받는 템빨단원들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잘 싸웠다.

“폭발 마법 발사!”

꽈차차창!

시체의 발목을 관통한 지슈카의 화살이 냉기를 퍼뜨렸다.

시체의 두 발과 지면을 순식간에 냉각시켰다.

화염과 파마의 성질로 대표됐던 지슈카의 화살은 이제 보다 많은 속성을 소화했다.

궁성의 퀘스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얻은 속성들.

그중에서도 특히 냉각과 뇌전 속성이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냉기를 머금은 궁성의 화살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막아내는 수준으론 빙결을 피할 수 없다.

전기를 머금은 궁성의 화살은 반응 불가다.

쿠콰콰콰콰쾅!!

냉각 된 시체의 하반신을 중심으로 온갖 종류의 폭발이 발생했다.

대규모의 연계기.

무척 위력적이었고 옛 영웅의 시체는 재차 죽어갔다.

‘하지만 곧 부활할 거란 말이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저 문지기를 죽여야 하는 듯한데, 죽여 봤자 다시 부활해버린다. 여기서 스킬작이나 할 게 아닌 이상 해결책을 어서 강구해야 했지만 탐험가들도 어떤 힌트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쿠르르르릉...

옛 영웅의 시체가 등지고 섰던 벽.

즉, 지슈카 공대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무너졌다.

옛 영웅의 시체를 부활시켰던 모자이크가 그려진 벽이었다.

새로운 적의 출현인가?

침착하게 상황을 살피던 지슈카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카츠?”

벽을 부수고 등장한 존재.

붉은 피를 갑주처럼 두른 혈기사 카츠였다.

정확한 클래스명은 베리아체의 기사지만, 어감의 문제로 보통 혈기사라고 불렀다.

“어? 다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지슈카 일행이 술렁였다.

무너진 벽에서 템빨단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카츠를 비롯한 십공신 전원과 그들이 이끌던 공대원들이 모조리 현장에 합류했다.

“미로가 이어지는 지점이 있더군.”

간단히 대답한 카츠가 앞선 폭격에 중상을 입고 비틀거리는 시체를 향해서 검을 겨눴다.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시체가 흘린 핏물이 모조리 카츠의 검에 빨려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웅웅.

응축 된 핏물을 두르고 대검마냥 비대해진 카츠의 검이 기이한 소음을 퍼뜨렸다.

“과연 지슈카다. 사상자 한 명 없이 이 괴물을 제압해온 건가...”

짧은 감탄을 토한 카츠가 거대한 검을 크게 휘둘렀다.

서걱!

9번을 죽여도 부활을 반복해온 시체의 목이 떨어졌다.

카츠에게 피를 빼앗기고 미라처럼 변해버린 시체.

이젠 더 이상 부활할 여력이 없다는 듯이 잿빛으로 산화한다.

“뭐야...? 어떻게 한 거야?”

지슈카 공대가 술렁였다.

앞장서 걷기 시작한 카츠가 설명했다.

“직업 퀘스트가 발생했다.”

“직업 퀘스트?”

“베리아체가 부활했어.”

“...어?”

“죽지 않는 시체들을 작동시키는 ‘혈액’이 파훼할 수 있는 가짜라는 사실을 알려주더군.”

일부 공대에서 함께 싸우던 직계 뱀파이어들이 갑자기 사라진 직후였다.

카츠는 베리아체의 목소리를 들었다.

현재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알려주는 목소리였다.

성직자들이나 경험하는 ‘신탁’과 닮은 현상인 것이다.

“서두르자. 그리드가 위험한 듯해.”

베리아체는 말했다.

그리드를 도와 자신을 죽이라고.

같은 시각, 무후총의 가장 깊은 곳.

미로의 초입을 지키던 옛 영웅, 혹은 죄인들의 시체가 소멸하는 기척을 느낀 망령이 중얼거렸다.

“베리아체... 그 짧은 사이에 치명적인 독을 풀어놓고 간 것이냐...”

모전여전이라고 해야 할까.

불쑥 나타나 신목관을 투척하고 갔던 마리로즈와 똑같다.

다소 위협적이다.

하지만 수천 년을 존재해온 망령의 평정심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작은 흥미를 느꼈다.

“복수를 바라여 내게 순순히 시신을 맡겨놓고... 이제 와서 갑자기 태도를 바꾼다라...”

그리드에게 어떤 희망을 본 거지?

어서 확인해 보고 싶다.

저벅, 저벅.

망령이 걸음을 재촉했다.

끝없이 펼쳐진 층계를 날 듯이 널뛰어 급기야 가장 중요한 장소에 도착했다.

도통 깨어날 생각을 않는 위대한 존재께서 잠든 장소였다.

무후총이라는 세계의 심장이다.

지옥의 근원이기도 했다.

“위대한 신이시여, 당신께서 만드신 세계를 수복하기까지 이제 단 한 걸음입니다...”

영겁의 세월 동안.

오로지 신에게 봉사하기 위해 살아온 사내가 있다.

자신의 봉사가 인류의 미래를 구원할 유일한 방법이란 사실을 알았기에.

그의 신념은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결코 실패하지 않겠나이다.”

태초신의 사도.

그중에서도 최초이자 으뜸이었던 존재가 당대의 신을 맞이하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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