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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60화 (1,659/1,794)

템빨 82권 - 14화

각자 도생.

그리드가 사도들에게 남긴 명령이었다.

따라오지 말고 알아서 잘 지내고 있으라는 의미였다.

예전부터 그랬다.

그리드는 정작 위험한 곳을 찾아갈 때면 기사들과 사도들을 대동하지 않았다.

애물단지 대하는 태도에 가까운 것이다.

“기껏 신이 됐건만 보람 없게도.”

라인하르트 외곽.

마법과 지혜의 신 브라함이 한탄했다.

절벽 위에 설치된 자신의 크고 멋진 신상에 걸터앉은 채다.

초월적인 광경이었다.

“이젠 나 또한 죽지 않는 몸이 되었다. 한데 여전히 그리드와 동행할 수 없다는 건 신뢰 받지 못한다는 증거 아닌가? 이건 걱정을 넘어선 처사다.”

사도란 신을 섬기는 존재다.

신이 겪어야할 위험을 대신 겪어야 옳았다.

한데 정작 무후총에 쫓아가지 못하고 남게 되어 굉장히 수치스러웠다. 서운한 마음도 컸다.

“무후총은 신화 포식자의 본거지다. 그대가 그곳을 찾아가는 건 호랑이굴에 토끼가 찾아가는 꼴과 별반 다르지 않지.”

“쯧...”

사실을 꼬집는 지크가 브라함의 심기를 한층 더 불편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꽈르르르릉!!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천둥과도 같은 굉음이 터진다 싶더니 하늘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그리고 갈라졌다.

모습을 드러낸 차원의 틈새가 방금 막 도축 된 짐승의 뱃속처럼 붉었다.

“...여태까지완 다르군.”

크라우젤이 뮐러를 찾아 떠난 이후.

벌써 수십 개의 차원의 틈새가 파괴됐고 세상은 온갖 후폭풍을 겪었다.

괴물의 출현은 가장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세상을 지켜온 법칙이 붕괴되며 온갖 신비가 발생했다.

때로는 이로운 신비였지만 혼란을 피할 순 없었다.

사도들이 바쁜 이유다.

브라함과 지크를 포함한 총 일곱 명의 사도가 대륙 각지에서 온갖 사건을 해결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템빨단원들과 함께 해결했을 업무를 온전히 사도들이 떠맡게 됐단 말이다.

이에 대해서 유일하게 시시하다며 불만을 토로하던 브라함이 이 순간 웃었다.

기고만장하게 턱 끝을 치켜세운 모습이 꽤나 즐거운 눈치였다.

“뮐러. 아니, 뮐러의 ‘흔적’인가?”

차원의 틈새가 일으키는 신비는 상식을 위반한다.

지식을 무용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신비다.

크라우젤과 싸웠던 뮐러를, 뮐러와 싸웠던 크라우젤을 재현하는 그림자들이 불쑥 나타나 지상을 위협해도 이상하지 않단 말이다.

“잃었던 명예를 되찾을 기회로군.”

검사는 마법사에게 상극으로 작용한다.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의 이야기로, 브라함에겐 통용되지 않는 법칙이었다.

하지만 뮐러와 비교할 때면 예외였다.

브라함은 유독 뮐러를 상대론 승산을 엿보지 못했다.

물론 직접 싸워봤단 말은 아니다.

각종 정보를 기반으로 가상의 결투를 치러본 결과였다.

심지어 브라함 스스로 행한 일이 아니라 호사가들의 입으로 행해졌다.

역대 최강의 검사와 전설의 대마법사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두 사람이 세운 업적을 토대로 그들의 전력을 분석한 학자들이 수차례 펼친 가상의 대결은 늘 브라함의 패배로 마무리 됐다.

브라함은 도무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계산해도 자신의 패배가 자명한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브라함은 신으로 등극했다.

과거의 수치스러운 기록을 지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지크, 당신은 사람들을 불러와주면 고맙겠군.”

“검진에 조예가 깊은 기사들을 소집하겠다. 뮐러의 검기를 조금이라도 상쇄하려면 그게 최선일 테지.”

“아니, 누구라도 좋다. 단순히 숫자만 많으면 돼. 내가 뮐러를 짓밟는 모습이 목격되고 역사에 기록되도록.”

“...”

무표정하던 지크의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신이 되고도 개인의 영달에 집착하는 브라함이 어떤 의미에선 대단해 보였던 것이다.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애써 삼킨 그가 등을 돌려 떠나려하는 그때.

“잠깐.”

브라함이 지크를 불러 세웠다.

“명예 따위에 집착하다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혀선 안 되지. 내가 한심했다. 방금 말은 무효이니 그냥 남아줬으면 좋겠군.”

“...”

지크가 힐끔 하늘을 올려봤다.

붕괴된 차원의 틈새에서 출현한 뮐러의 그림자, 무려 셋이었다.

***

-장모님 참으로 고우십니다. 어린 시절의 마리로즈를 꼭 빼닮으셨어요. 아니, 마리로즈가 장모님을 닮은 것이겠지요? 하하하! 너무 젊으신 나머지 제가 잠시 착각을 하고 말았지 뭡니까?

“저 역겨운 괴물은 언제쯤 세상을 하직할까...”

마리로즈 곁에 선 신목관이 연신 헛소리를 지껄여댔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몇 안 되는 성인(聖人).

다름 아닌 초대 교황이 오직 재능만을 보고 후임으로 선택한 인물이 크레이슐러다.

그는 선대의 안목을 증명했다.

초대 교황의 신뢰에 보답하듯 강력한 무력을 위시해서 무수히 많은 업적을 세웠고, 역대 최강의 교황이라는 타이틀을 수백 년 동안 지켜냈다.

당연히 위인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란 말이다.

비록 변태일지언정 그리드는 크레이슐러를 존중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이 순간 인내심이 바닥나고 말았다.

기껏 무후총의 간부들을 쓰러뜨리고 성장시켜놨더니 적이 될 기세였으니까.

베리아체를 향한 크레이슐러의 태도는 며칠 만에 돌아온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와도 같아서, 그리드의 의심은 몹시 합당한 것이었다.

“그대가 나의 사위로구나.”

어째선지 붉은 살덩이로부터 피어난 이후.

한동안 잠자코 있던 베리아체가 입을 열었다.

아니, 저건 베리아체가 아니다.

베리아체의 시체에 불과했다.

창백하고 무표정한 얼굴과 생각을 읽을 수 없는 공허한 두 눈.

어디에서도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입을 연 것이다.

명백히 그리드를 바라보고, 인지하면서.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크레이슐러의 시체와는 달랐다.

‘왜 다른 거지?’

베리아체의 영혼은 지옥에 있다.

눈앞에 있는 시체는 빈껍데기에 불과한데 무슨 원리로 나를 알아보고 대화를 걸어온단 말인가?

‘망령의 권능인가?’

영혼 잃은 시체에 다른 이의 영혼을 주입하는 것.

야탄의 사도쯤 되면 쉬운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드는 다른 무언가가 베리아체를 ‘연기’한다고 생각했다.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

크레이슐러도 같은 의심을 품은 눈치였다.

단순히 베리아체라는 이름에 현혹됐던 정신을 수습하고 슬그머니 그리드 곁으로 되돌아왔다.

-저거, 진짜일 리가 없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행세하는데 말이 안 되지. 내 시체를 돌이켜보게. 영혼 잃은 시체답게 인형 역할밖에 못하지 않았던가?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랬습니까?”

-뭘? 아... 장모님 대접하며 인사드린 거? 그야 인간의 도리를 지켰을 뿐일세.

“사람 아니잖습니까?”

-죽은 망자에게까지 생전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가? 장모님이 비록 생전엔 뱀파이어셨으나 죽은 마당에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자넨 저분이 가엾지도 않나?

“당신 말입니다, 당신.”

-...

크레이슐러가 드디어 입(?)을 닫았다.

스스로 자신의 시체를 없애버린 시점부터.

아니, 먼 옛날 관이 된 시점부터.

자신은 인간을 버렸다.

그리드의 지적은 타당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도리마저 버리면 그건 짐승과 다를 바가 없잖은가...

“...”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크레이슐러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스컹크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른 화를 억누르기 위한 노력이었다.

대체 얼마나 염치가 없으면.

비꼬는 말도 못 알아먹고 저런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그리드와 달리 크레이슐러를 진심으로 존경했던 스컹크의 콩 깎지가 서서히 벗겨졌다.

“그래도 크레이슐러는 괜찮은 편입니다. 그나마 점잖게 미쳐서 큰 민폐를 끼치진 않으니까요. 앞으로 더 많은 초월자들을 만나게 되실 텐데 적응하도록 하세요.”

그리드가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대부분의 초월자를 크레이슐러 이상의 미치광이로 취급하는 태도.

충격 받는 스컹크의 귓전에 아름다운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베리아체가 여전히 그리드를 바라본 채 말하고 있었다.

“마리로즈가 여기에 못 온 걸 보면 아직도 처녀인 듯하구나. 기껏 너처럼 훌륭한 혈왕을 얻고도 왜 여태껏 임신하지 않은 걸까. 설마 제 위치와 책임을 망각하고 수줍음이라도 타더냐?”

‘뭐지?’

저건 베리아체가 아닌 가짜다.

이와 같은 그리드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혈왕이라는 정체를 들켜서가 아니다.

그리드는 직계들을 거느렸다. 뱀파이어의 역사를 깊이 아는 존재라면 그리드가 혈왕이라는 사실을 유추하기 쉬웠다.

하지만 마리로즈가 이곳에 ‘못 왔다.’고 확신하는 태도는 아무나 보여줄 수 없다.

그래, 마리로즈는 이곳에 안 온 게 아니라 못 왔다.

피를 제어하기 힘들어진다는 이유였다.

그리드를 한없이 걱정하면서도 홀로 물러났다. 작게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신목관을 건네 놓고.

“당신... 정말로 베리아체인가?”

“그렇단다. 육신의 부활을 감지한 즉시 지옥에 있던 영혼의 일부가 여기에 깃들었거든. 불완전하나마 나는 나인 거야.”

아이를 대하는 말투.

베리아체의 화법은 마리로즈와 닮아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아무런 감정도 없이 무미건조하다는 점.

마리로즈의 말에는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혹은 먹이를 향한 호의가 어렴풋이 묻어나는 반면 베리아체는 전혀 그런 게 없었다.

그리드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럴 확률은 적다.

혈왕 프로젝트는 베리아체의 염원이 담긴 계획이었다.

베리아체의 현재 관심은 모조리 혈왕이 된 그리드에게 쏟아지고 있다고 봐야 옳았다.

‘시체라서다.’

그리드는 베리아체의 무감정한 태도를 부득이한 것으로 해석했다.

무표정한 얼굴이 증명하듯, 현재의 그녀는 시체이기 때문에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스륵.

베리아체의 주변으로 핏빛의 마력이 번졌다. 나비가 날개를 펼치는 것과 닮았다. 비릿한 혈향과 별개로 아름다웠다.

“육체의 통제권은 내가 아닌 이 육체를 부활시킨 자에게 있나보구나. 아버님의 충복은 여전히 건재하네.”

그걸로 끝이었다.

자신이 적이 될 수밖에 없단 사실을 짧게 설명한 베리아체가 마법을 전개했다.

장관이었다.

지배의 영역과 블러드 필드, 피로 빚은 각종 병장기와 꼬리 등등.

직계들의 궁극기가 동시에 펼쳐졌다.

경쾌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쾌속하고 간단하게.

“약점은 여기란다.”

어지럽게 휘몰아치는 피의 폭풍 속에서.

베리아체는 작고 가녀린 손가락으로 본인의 미간을 톡톡 건드렸다.

“본래라면 혈석을 박아 무마했을 약점인데, 이 시체의 몸속엔 피가 단 한 방울조차 없구나. 지금 네가 보고 느끼는 핏물은 순전히 마력으로 재현한 가짜에 불과하단다. 그럼에도 혈마법의 매개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야.”

그리드 또한 금의 성역을 전개하고 있었다.

베리아체의 필드 마법들을 상쇄하는 동시에 무구의 비를 내려 피로 빚은 무기들을 분쇄했다.

“훌륭해. 그대의 높은 명성은 지옥에서부터 익히 들었지만 기대 이상이구나.”

“지옥에서, 바알에게 붙잡혀 계시는 겁니까?”

그리드가 대화를 시도했다.

베리아체의 육체는 자신을 적대할지언정 영혼은 호의적인 상황.

이 기회를 틈타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고 싶었다.

“아니, 아모락트의 곁에 있단다.”

“아모락트의...?”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쇠사슬에 묶여있던 제2위 대악마.

무려 태초의 3악 중 하나이나 그리드와 외교를 시도 중인, 몹시 인상적인 존재였다.

그리드가 지옥의 정화를 고민할 때면 늘 염두에 둘 만큼 아모락트의 위치는 특별했다.

“내 영혼이 바알이 머무는 지옥으로 추락하기 직전에 가로 챘단다. 바알과 대적할 힘을 마련하고자 흡수를 시도했다가 봉변을 겪었지만.”

“봉변...? 혹시 그녀를 묶고 있는 사슬과 관련이 있으신 건지...?”

“제대로 파악하는구나. 맞아. 본래라면 바알을 묶었어야 할 내 최후의 주술이 그녀를 묶어버린 상황이야. 바알은 사정을 제대로 모르는 눈치지만.”

“...”

브라함의 트롤링은 혹시 유전이었나.

진지하게 의심하던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모락트가 쇠사슬에 묶인 건 베리아체의 의도가 아니라 아모락트의 욕심에서 비롯한 거니까.

베리아체의 트롤링이 아니라 아모락트가 자처한 결과였다.

“의식을 유지하기 힘들구나. 세 가지 사실을... 명심하렴.”

바쁘게 움직이던 베리아체의 작고 두꺼운 입술이 차츰 느려졌다.

“아모...락트를... 신용하지 말 것... 나를 상대로... 상처를 입지 말 것... 내 아버지의 충복을... 두려워...할 것...”

간신히 끝맺어지는 말.

이후론 침묵이었다.

영혼과의 연결이 끊기기라도 한 걸까.

표정이 한층 더 차가워진 베리아체의 시체가 묵묵히 그리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절대자의 영역을 전개하면서다.

태초의 3악.

바알과 같은 위계에 묶이는 베리아체의 저력은 영혼 잃은 시체 상태에서도 무시무시했다.

시체가 생전의 능력을 사용하게끔 수복시킨 망령의 능력이 너무 대단한 걸 수도 있었고.

아무튼 그리드도 본격적인 전투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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