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2권 - 13화
붉은 살덩어리.
지옥에 떨어진 인간들의 영혼을 이식 받고 살집을 부풀려온 그것은 지옥의 하늘에 투영되는 달이요, 지옥을 왜곡시킨 원인이다.
집어삼킨 영혼으로 만든 무량대수의 눈으로 지옥의 모든 걸 미치게 만들어버렸다.
“...이딴 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리드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섣불리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엄청난 기시감에 휩싸일 뿐이다.
붉은 살덩이의 형태와 특징.
살덩이가 자리 잡은 공간의 규모와 구조.
을씨년스러운 공기의 흐름과 온도, 습도에 이르기까지.
전부 지옥에서 보고 느꼈던 것과 일치했기에.
‘설마 여기... 지옥인가?’
별 황당한 의문이 떠오를 지경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무후총의 미로를 헤맨 끝에 지옥으로 넘어온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혹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차원을 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그런 기척은 전혀 못 느꼈네만...
크레이슐러가 뭔 헛소리냐는 반응을 보였고,
“이곳은 무후총이 맞습니다.”
스컹크는 즉각 부정했다.
전설의 모험가인 그가 현재 자신의 위치를 착각할 리 없다.
모험 관련 스킬들과 스컹크만 볼 수 있는 지표가 이곳이 무후총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역시 신뢰해선 안 될 놈이었군.”
눈살을 찌푸리는 그리드의 신성이 들불처럼 일렁였다. 황룡이 입에서 불을 뿜는 듯했다.
사람들의 말마따나 신화 클래스의 장점 중 하나는 ‘멋’에 있었다.
주인의 감정을 일부 대변하며 분위기를 살린다.
“잠시나마 현혹될 뻔 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간부들을 해치고 그들의 과거를 체험하면서.
그리드는 차츰 어떤 믿음을 품어갔다.
망령이 선에 가까운 존재일 거라는 믿음.
왜곡 된 지옥을 수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눈치였으니까.
생전에 큰 업보를 쌓은 초월자가 죽지 못하도록 찾아가 포획하고, 무후총을 만들어 관리해온 망령은 어떻게 봐도 세계를 위해서 싸우고 있었다.
그가 초월자들과 나눈 단편적인 대화들을 종합하면 바알을 몹시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최우선 목표는 지옥을 원래 상태로 수복하는 것으로, 바알과 분명히 적대했다.
결과적으로 인류에게 이로운 존재인 것이다.
물론 잔혹하고 냉혹한 구석이 있긴 했다.
의도치 않게 미쳐버린 초월자들이 아무리 많은 업보를 쌓았다지만 그들의 인권과 윤리를 무시하고 언데드로 만들어버렸으니까.
인신들을 사냥해온 것도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믿고 싶었다.
이 절망적인 세계에서 든든한 우군을 얻게 되리라 어렴풋이 기대했다. 온갖 정황이 기대를 부추겼다.
어리석었다.
그리드의 부푼 마음이 구멍 뚫린 풍선마냥 쪼그라졌다.
망령을 향한 기대, 믿음 따위를 순식간에 잃었다.
지상에 지옥을 재현한 미치광이를 어찌 신뢰하겠나.
배신감마저 느꼈다.
“바알에게 빼앗긴 지옥을 되찾을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지상에 만드는 식으로 복구하려는 건가?”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지옥의 전력은 무지막지하게 강력하다.
그리드에게 몇 차례 패배했던 바알조차도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고강해졌을 것이고, 붉은 살덩이와 아수라라는 변수는 여전히 건재했다.
아모락트를 비롯한 상당수의 대악마가 바알을 적대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망령의 무위와 권능이 바알이나 그리드보다 강력하다고 해도 혼자서 지옥을 감당하는 건 말이 안 됐다.
무후총의 간부들과 토병들, 그리고 신상을 뒤집어 만든 악신들?
필시 강력하긴 했지만 바알이 이끄는 군단의 전력으로 상쇄할 수 있다.
그리드가 바알과 싸워서 이겼을 땐 바알이 ‘혼자’였다는 점을 감안해야만 했다.
바알은 그리드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1대1 승부를 고집하며 개인적인 유희를 즐겼을 뿐이지.
자존심은 상하지만 객관적인 사실이다.
오히려 그리드가 번헬리어, 네펠리나와 편먹고 바알을 다구리 쳤었다...
‘괜히 더 빡치네.’
지옥과 무후총의 전력을 객관적으로 비교하다가 부끄러워진 그리드가 치를 떨었다. 신성이 더욱 크게 번졌다. 똬리를 틀고 있던 황룡이 승천할 기세로 솟구쳤다.
-영웅의 기상이로다.
크레이슐러가 속내도 모르고 칭찬했다.
“오오...”
스컹크는 숫제 감격하는 눈치였다.
전설이 된 플레이어에게도 그리드는 별세계의 인물이었다.
템빨단 소속이라 비교적 가까이서 지켜봤어도 그랬다.
민망해진 그리드가 헛기침하고 말했다.
“아무튼 무후총에 오길 잘했습니다.”
저 역겹고 불길한 붉은 살덩이.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
그리드가 스킬을 전개했다.
황혼과 염룡검을 합치고 크란벨의 뿔과 구젤의 어금니를 합쳤다.
전력의 6융합 검무를 날려서 살덩이를 파괴할 요량이었다.
그때였다.
“과거에.”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상처 입은 짐승의 숨소리처럼 거친 음성이 사방팔방에서 울렸다.
공동의 규모와 구조를 감안해도 무지막지하게 메아리쳤다.
과장을 꽤 보태자면 뇌가 흔들리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낯선 시선들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거리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아득히 먼 곳에서 바라보는 시선.”
목소리만 들릴 뿐.
모습은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드가 감각을 극대화시켰음에도 위치를 식별하는 게 불가능했다.
‘이곳에 없다.’
그리드는 자신이 상대방을 찾지 ‘못했다.’는 가정은 하지 않았다.
다른 모든 스탯이 그렇듯, 지난 세월 동안 그가 쌓아올린 통찰력은 피나는 노력의 증거이다.
신이라는 지위와 절대자의 자격 또한 그랬다.
모든 능력과 권한을 활용했는데도 상대방을 찾지 못한다?
그럴 리 없는 것이다.
음성의 주인은 단지 이곳엔 없을 뿐이었다.
어떤 마법적인 도구가 스피커의 역할을 해주고 있을 뿐.
“그때 느꼈던 시선의 정체를 이제야 알겠구나.”
망령.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히 망령이었다.
“으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스컹크가 몸을 덜덜 떨었다.
단지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상태 이상을 겪는 것이다.
공포나 혼란 따위가 아니다.
압도당했다.
격의 차이 정도로는 해석하기 힘든 거대한 압박감에 짓눌려 손 끝 하나 꿈쩍이지 못했다.
피식자로 전락한 것이다.
-기세 하나만 놓고 보면 마리로즈 이상이군...
크레이슐러가 드물게 어두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몹시 강력한 근원과 역사를 느끼고 있었다.
태초신 야탄을 근원으로 두고 무수히 많은 초월자와 인신들을 사냥해온 존재.
망령은, ‘당연히’ 강력해야만 하는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각오했던 것보다 힘든 상대일 거란 사실을 직감하고 말았다.
그리드도 마찬가지다.
다만 실패나 패배 따위를 염두에 두진 않는다.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가 그의 심상을 두텁게 감싸주고 있었다.
반드시 칸을 구출하겠다는 궁극의 목적이 그에게 꺾일 수 없는 의지를 심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그리드를 좌절시킬 순 없단 말이다.
그러니까 인류의 희망이 되고 등불이 됐다.
“망령, 네 목적이 뭐냐?”
그리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지옥의 수복을 통한 세계의 구원이다.”
망령은 대답했다.
일고의 고민 없는 즉답.
어떤 속셈이나 위선을 엿보기 힘들었다.
“왜곡 된 지옥을 되찾는 게 아니라 새로운 지옥을 만드는 게 수복인가?”
“곡해하는 듯하군. 내가 이곳에 만들 지옥은 진짜 지옥을 회복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유일한 신이여, 괜한 억측은 관둬라.”
“후로이도 아니고 혀가 길어... 길게 지껄여봤자 전혀 이해가 안 된다고. 아무튼 결론은 여길 지옥으로 만들 거라는 거잖아?”
그리드는 감이 좋은 사람은 아니다.
그의 직감은 무지막지한 경험과 그를 토대로 쌓아올린 정보에 의지한, 일종의 학습 된 능력에 가깝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더 정확한 그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일단은 이 붉은 살덩이를 파괴해야 한다고.
망령이 늘어놓는 궤변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고.
‘지옥을 왜곡 시킨 물체. 다름 아닌 바알이 가장 아끼는 물체와 똑같은 물체가 지상에 있다.’
이걸 방관한다?
그건 병신이다.
망령의 의도나 뜻을 헤아려줄 상황이 아니었다.
“위룡극파살연(爲龍極派殺聯).”
그리드가 빛살처럼 쏘아졌다.
바로 곁에 있던 스컹크와 크레이슐러가 그 사실을 눈치 챘을 땐 이미 어떤 그림자가 붉은 그림자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리드의 신형이었다.
퍽!
츠카카카카카카카카칵!!
가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소름 돋는 절삭음이 연쇄됐다.
난도당한 붉은 살덩이가 제 색보다 짙은 핏물을 사방팔방으로 분출해댔다.
쿠르르르릉...
검무의 후속 충격파가 거대한 공동을 무너뜨릴 듯 뒤흔들었다.
하지만 정작 표적이 됐던 붉은 살덩이는 여전히 허공에 고고히 떠있었다.
마구 쏟아내던 핏물도 빠르게 잦아들었다.
생명력 게이지가 크게 깎이긴 했지만 그마저도 불길한 요소였다.
깎여나간 게이지 뒤로 드러난 것은 공백이 아닌 새로운 색상의 게이지.
6융합 검무를 견뎌낼 정도로 막대한 피통이 어쩌면 몇 줄이나 더 남아있을 수도 있었다.
“...훌륭하군.”
동요하는 건 그리드뿐만이 아니었다.
침음에 가까운 망령의 감상이 증거였다.
“네겐 나의 계획을 어긋나게 만들 수준의 무력이 있구나. 무책임한 방관자들이 너를 특별히 여기고 가호를 내린 이유를 알겠다.”
무책임한 방관자들.
‘가호’라는 단어가 그들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도록 도왔다.
레베카와 치우일 것이다.
그리드는 유일신이 되고도 여전히 <궁극의 무>의 효과를 누리고 있었으며, 갓 핸드 또한 여신의 가호를 잃지 않고 있었다.
“너는... 이용당한 걸 수도 있겠어.”
마치 가여운 것을 대하는 듯한 말투.
그리드의 기분을 한층 더 더럽게 만든 망령이 살덩이에게 속삭였다.
“눈을 떠라, 베리아체.”
베리아체.
막말로 어처구니없는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
“...?”
그리드는 귀를 의심했고,
“...!!”
스컹크는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장모님?
크레이슐러는 안절부절 어쩔 줄 몰랐다.
마치 거울이라도 찾는 기색이었다.
츠카카카카카카칵...
붉은 살덩이가 쏟아냈던 핏물이 한 지점으로 뭉치고 있었다.
그것이 차츰 여성의 형상을 갖춰갈수록 그리드의 등골은 오싹해졌다.
[어머니의 기척을 읽은 직계 뱀파이어 ‘루쏜’이 환호합니다.]
[어머니의 기척을 읽은 직계 뱀파이어 ‘티라멧’이 전율합니다.]
[어머니의 기척을 읽은 직계 뱀파이어 ‘라티나’이 감격합니다.]
[어머니의 기척을 읽은...]
...
..
루쏜, 티라멧, 라티나, 크레이, 에티마, 엘핀스톤.
무후총 곳곳에 흩어진 채 템빨단원들을 돕고 있던 그들이 일제히.
[직계 뱀파이어들이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어머니를 섬깁니다.]
[<혈왕>의 권한이 일시적으로 정지됩니다.]
그리드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눈앞의 핏덩이는 어느새 완전한 인간의 형상. 아니, 뱀파이어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위대한 뱀파이어들의 시조, ‘베리아체’가 강림합니다.]
[직계 뱀파이어들이 베리아체의 기척을 쫓아 달려오고 있습니다.]
“이게... 뭔?”
그리드는 엉덩이가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현재 착용 중인 속옷의 매끄러운 실크 감촉이 새삼 생생하게 느껴진 까닭이다.
“그녀의 영혼은 공교롭게도 지옥에 붙잡혀 있다만... 시간을 벌기엔 충분하겠지. 곧 찾아가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망령은 곧 찾아가겠노라 선언했다.
마리로즈가 중학생 나이쯤 되면 저런 모습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외향의 베리아체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그리드가 다급히 소리쳤다.
“크레이슐러! 직계들과 망령이 도착하기 전에 전력으로...”
-장모님께 인사 올립니다.
“...”
일단 최대한 빨리 베리아체를 제압하고 보자.
판단하고 외치던 그리드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어느새 베리아체에게 다가간 신목관이 그녀에게 굽실거리는 까닭이었다.
진심으로 죽여 버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