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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58화 (1,657/1,794)

템빨 82권 - 12화

스르륵.

발목 아래까지 자란 뮐러의 갈색 머리카락은 망토처럼 질질 끌렸다. 무시하지 못할 제약이다. 스스로 페널티를 떠안은 셈이었다. 한데 지난 23일 동안 큰 빈틈을 엿보지 못했다.

크라우젤은 뮐러가 절대자에 ‘근접’한 실력자임을 재차 확신했다.

‘절대자는 아니야.’

크라우젤의 안목은 보통을 아득히 초월한다.

하물며 그리드와 하야테, 마리로즈와 고룡, 그리고 제라툴이라는 절대자들을 직접 목도해왔다. 그들과 협공을 펼치거나 적이 되어 싸우는 식으로.

절대지경을 구분 못할 리 없는 것이다.

‘심기체 중 유독 심이 발달했을 뿐이다.’

뮐러의 ‘체’는 절대자에 못 미쳤다. 상위 초월자 수준으로, 소위 말하는 <절대자의 영역>을 구현하진 못했다.

‘기’는 <검술>에 한해서 절대자와 최소 호각, 또는 우위를 점할 수준이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용살의 기운을 휘두르는 하야테, 흡혈의 권능을 지닌 마리로즈, 브레스를 쏘고 용언을 일삼는 드래곤, 모든 무술에 통달했던 제라툴과 비교하면 전반적으로 손색이 있었다.

아이템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모든 상황에 대응 가능한 그리드의 전능함과 비교하면 몇 수나 아래였고.

다만.

‘심’은 어떤 절대자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검성이라는 클래스의 특성 덕분일 것이다.

검성은 <심검>이라는 스킬을 지녔으니까.

마음으로 검을 움직이면서 자연히 심을 연마하고 끝내 심즉살의 경지에 오른 거겠지.

검성 중 최강이었다는 뮐러에겐 ‘당연한’ 성장 과정이었으리라.

‘발달한 정신력과 심력 덕분에 미치지 않을 수 있던 건가.’

수백 년을 홀로 차원의 틈새에 머물러 왔으면서 미치기는커녕 폐인조차 되지 않고 멀쩡하다.

아무리 봐도 놀랍다.

유독 발달한 정신과 마음 덕분에 버텼다고 해석해야 그나마 납득이 됐다.

‘또한 그렇기에 도망친 거고.’

Satisfy의 세계관은 매우 절망적이다.

지상.

드래곤이라는 시한폭탄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세상.

인간들은 그곳을 살아가며 온갖 괴물들에게 위협 받는다.

한편으론 지옥의 악마들에게 호시탐탐 노려졌다.

하여 천상의 신에게 의지하건만 대부분의 신들은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애초에 Satisfy에서 신이란 ‘영생하며 강한 힘을 지닌 인간’에 가깝다. 정신 상태가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믿고 따를 존재로 삼기엔 불완전했다.

물론 태초신들은 다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인간 입장에서 겪는 세상은 절망적인 것이다.

죽어서는 희망조차 사라진다.

위대한 영웅이 죽으면 천상에 올라 신들의 병사로 영락하고, 평범한 사람이 죽으면 왜곡 된 지옥에 떨어져 바알과 악마들의 먹잇감이 됐으니까.

막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세상에서.

뮐러는 하야테와 전혀 다른 행보를 걸었다.

처음엔 똑같이 타인을 위해 살았지만 세계의 절망적인 진실을 알게 된 이후 하야테는 탑을 세웠고 뮐러는 도망쳤다.

뮐러가 겁쟁이라서?

그보다는 상황을 좀 더 ‘현실적’으로 받아들인 걸 수도 있다.

그리드에게 의지하기 전까진 하루하루 악몽 속에 살았던 하야테.

누구보다 드래곤을 더 잘 알기에 세상에서 가장 드래곤을 두려워했던 그는 순전히 영웅의 의기로 버텼다.

짊어진 책임의 무게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인내하고, 남에게 말 못할 두려움을 숨긴 채, 희망을 찾지 못하면서도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그래, 견뎠을 뿐이다.

만약 그리드라는 희망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끝내 무너졌을 것이다. 긴 세월 동안 쌓아올린 노력이 헛되었을 수도 있다. 그만큼 위태로웠다.

반면 뮐러는 세상에 희망이 없음을 안 즉시 깔끔하게 포기했다.

애써 발악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한 그의 마음과 정신이 그에게 ‘올바른 판단’을 종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미련이 남아 무후총을 감시 하에 두고 있던 눈치이긴 했지만...

‘만약 저자가 하야테 님처럼 끝까지 속세에 남아 견뎠다면.’

온갖 업적을 세우고 경험을 쌓은 끝에 절대자가 됐으리라.

‘반드시.’

뮐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하던 크라우젤이 문득 정신을 차렸다.

고개 돌린 뮐러와 시선을 마주친 까닭이다.

“자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내 함부로 짐작해선 안 되겠으나.”

특유의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말하면서, 뮐러는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싹둑.

장발이 잘려나갔다.

검 없이 펼치는 검기의 운용이었다.

투명하고 날카로운 검기가 아지랑이마냥 풍경을 흐릿하게 만든다 싶더니 그의 머리카락만 싹둑 잘라버렸다.

“내게 어떤 믿음이 담긴 시선을 보내지 말게. 나는 신뢰 받을 만한 영웅도, 위인도 아니야.”

그래서 더욱 더 죽고 싶었다.

미래를 잃은 나의 지난 업적들.

쓰고 버린 천 조각처럼 무의미한 것들을 칭송하는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건 그렇고. 정말로 나를 따라올 셈인가?”

차원의 틈새를 가르자 지상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목적지는 모른다.

망망대해가 펼쳐진 적해 한가운데일 수도, 용암이 들끓는 트라우카의 레어일 수도, 아득히 높은 하늘일 수도 있었다.

다만 어디로 떨어지든.

뮐러는 무후총으로 향할 것이다.

두려워서 피해온 죽음마저 각오했다.

무후총에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망령이 그토록 지키려하는 것의 정체까진 몰라도, 다른 한 가진 분명히 안다.

과거에 직접 봤다.

속세를 떠나기로 결심하게 됐던 계기다.

‘베리아체의 시체.’

직계들의 어머니.

그녀가 마리로즈를 낳은 건 최후의 도박이었다.

죽을 걸 뻔히 알고도 마리로즈를 낳았으니까.

실제로 그녀는 마리로즈를 낳은 직후 죽었다.

여태껏 본 적 없을 정도로 강력한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는 과정을 뮐러의 감각이 실시간으로 읽었었다.

당시 뮐러는 지상의 수호자였기에.

온 대륙에 그의 눈과 귀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검성의 초감각이 그의 역할과 맞물려 많은 걸 감지했다.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베리아체의 시신 일부를 손에 넣었다는 사실까지.

불길함을 감지한 뮐러는 급히 추적했고, 무후총을 발견하게 됐다.

그리고 보았다.

망령을.

그레니어의 산군처럼 침략자들로부터 자신의 ‘영역’을 수호하는, 그 과정에서 자연히 신화 포식자가 된 돌연변이쯤으로 예측했었으나.

실제로 본 망령은 뮐러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존재였다.

무력과 배경 양면에서 월등히 뛰어났다.

“그것으로 뭘 하려는 거지?”

뮐러의 과거가 크라우젤의 눈앞에 펼쳐졌다.

[<검성>의 직업 효과로 특수한 일이 벌어집니다.]

[당신의 검기가 ‘뮐러’의 검기와 교감합니다.]

[검성 ‘뮐러’가 떠올리는 과거의 한 순간을 체험합니다.]

짧은 과거였다.

무후총의 어두운 지하.

죽지 않는 망자들의 끈질긴 추격을 검의 장벽을 세워 따돌린 뮐러가 어떤 거대한 존재를 마주보고 서있었다.

아니, 크지 않다.

독보적인 위압감과 몹시 불길한 그림자를 몸에 두른 탓에 실제보다 수십 배는 크게 느껴졌지만, 실제 크기는 뮐러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보통의 인간 수준으로 형태 또한 인간과 같았다.

그래, 분명히 인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공허한 눈에 담긴 어둠이 그가 인간과 다른 무언가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검성 뮐러. 그대에겐 질문할 자격이 있겠구나.”

존재.

무후총의 망령이 입을 열었다.

그의 손엔 누군가의 썩어가는 심장이 쥐어져있었다.

베리아체의 심장이었다.

“나는, 거울을 만들 것이다.”

“거울...?”

“죽은 자들의 영혼을 탐하며 지옥의 달을 왜곡하는 대별왕의 시신과 대칭을 이루는 거울이다.”

“...??”

뮐러는 망령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망령이 덧붙였다.

“나의 신을 배신한 악마의 계획을 틀어지게 만들 도구라고 이해하면 쉽다. 나는 이곳에 놈이 꿈꾸는 지옥의 풍경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상쇄시킬 것이다.”

스윽.

망령의 손 끝이 뮐러의 이마에 닿았다.

절대자의 영역.

뮐러의 초감각조차 한 발 늦게 반응하게 만드는 고속 접근이었다.

두근!

뮐러의 머릿속에 막대한 양의 정보가 흘러들었다.

심장처럼 박동하는 거대한 붉은 덩어리.

죽은 자들의 영혼을 집어삼키고 지옥의 달을 왜곡시킨 ‘시체’의 살덩이가 그의 뇌리에 똑똑히 새겨졌다.

“대별왕과 베리아체의 관계를 고려한 판단이다. 똑같은 신세로 영락해 대칭을 이루는 즉시 운명처럼 이끌릴 테지.”

“잠깐... 이곳은 인간들의 세상이다. 네 개인적인 소망을 이룰 공간으로 적합하지 않아.”

“개인적인 소망?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군. 아니... 부정하는구나. 이건 나의 소망 따위가 아니라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방법이다. 자칫 이번 세상이 멸망할지언정 다음 세상의 인류는 구원 받으리.”

“웃기지 마라!”

뮐러가 검을 뽑았다.

크라우젤은 뮐러의 입장에서 체험했다.

그의 검술을, 의지를, 사투를.

역대 최강이라고 불리는 검성은 과연 엄청났다.

초월적인 자질.

망령과 싸우며 실시간으로 고강해졌다.

그리고 크라우젤은 그 모든 과정을 직접 체험하고 일정량의 경험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Satisfy 시간으로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완료하지 못했던 검성의 전직 퀘스트가 마지막 페이즈에 돌입한 것이다.

뮐러와 수십 일을 겨루면서 인정받은 것이 계기일 터였다.

완전한 전직의 전조였다.

“그리 증오할 필요 없다. 나 또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했으니까. 무후총은 조만간 지상과 유리 된 세계로 거듭날 터이니... 종말을 바라지 않는다면 무후총만으로 지옥의 규모를 감당할 수 있기를 야탄께 기도하라.”

“정말로 ‘최소한’의 안전장치군, 빌어먹을 악마 새끼.”

뮐러의 입이 어울리지 않게 거칠어졌다.

그만큼 극한까지 몰렸다.

실시간으로 발전한 실력이 무색하게 넝마가 된 그의 몸에 수십 자루의 창이 꽂혀있었다. 그나마 검성의 권능으로 검은 막았지만 그게 한계였다.

하지만 눈빛은 죽지 않았다.

정말로 소년만화의 주인공처럼 그의 크고 맑은 눈동자는 열의로 이글거렸다.

“신의 사도에 불과한 네가 만들 작은 세계가 태초신이 만든 지옥의 규모를 감당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고작 1퍼센트도 안 될 텐데 말이다.”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점에 의의를 둬라. 검성 뮐러, 지상을 지탱해온 영웅이여. 그대를 향한 존중은 여기까지다.”

망령의 양손에 새카만 마기가 일렁였다.

정확히는 신성이다.

태초신 야탄으로부터 계승한 절대적 신성.

뮐러에게 닿는 순간 뮐러를 무후총 바깥으로 추방하는 권능을 발휘했다.

압도적인 패배였다.

머잖아 다가올 종말에 대한 불안감과 종말을 막을 수 없다는 좌절감이 포기를 몰랐던 영웅을 절망시켰다.

“...끝이다.”

망령이 주입한 정보가 뮐러에게 너무 많은 진실을 알려줬다.

사라진 야탄.

왜곡 된 지옥.

방관하는 천상.

정신 나간 야탄의 사도.

뮐러는 차라리 죽고 싶었다.

자신의 능력으론 막지 못할 격랑을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죽음은 안식이 아니란 사실까지 알게 되고 말았다.

“...”

별처럼 빛나던 영웅의 두 눈이 죽었다.

멍하니 몸을 일으킨 그가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정처 없이 대륙을 횡단했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수많은 괴물과 악행을 목도했다.

그들을 도울 때면, 영웅의 죽었던 두 눈엔 한 순간이나마 빛이 돌아왔다.

그늘 졌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상냥하고 너그러운 표정으로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썩어 문드러진 속을 감추는 서글서글한 표정.

크라우젤에게 보여줬던 표정과 같다.

[검기의 교감이 끝납니다.]

[검성 ‘뮐러’의 과거를 체험했습니다.]

[<검성>의 전직 퀘스트가 완료됩니다.]

[근력과 민첩성, 의지 스탯이 대폭 상승하고 직업 전용 스킬들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검술 창조 횟수가 늘어납니다.]

[큰 힘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당신은 선대의 책임을 짊어져야할 것입니다.]

[세계의 상황을 분석합니다.]

...

..

[유일신 ‘그리드’를 도와 지상을 수호하세요.]

[실패할 경우 당신이 알던 세계는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실수했군. 검기의 교감이라... 의도치 않게 자네에게 너무 많은 사실을 알려주고 말았어.”

차원의 틈새를 벗어난 두 검성은 어느새 지상에 내려와 있었다.

쉬지 않고 달리며 무후총에 가까워져갔다.

뮐러의 얼굴이 어두웠다.

애써 짓고 있던 서글서글한 표정이 사라지고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무시하게. 진실을 알게 됐다고 해서 자네가 책임을 짊어질 필요는 없네.”

앞서 도망쳤던 패배자의 조언이다.

검성이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건네는 조언이었다.

크라우젤이 고개를 저었다.

“짊어질 겁니다.”

“자네?”

“이미 다른 이가 짊어진 짐을 나눠 질 뿐이지만.”

“다른 이...?”

“지상을 지키는 ‘신’이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크라우젤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옛 영웅의 모습을 담는다.

당대의 영웅과 비교하면 다소 왜소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리드.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피어난 희망입니다.”

내 친구라는 말을 덧붙이려다가,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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