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2권 - 11화
최초에 35합을 겨루고 이겼다.
자신처럼 무쌍검을 계승한 자.
당대의 검성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아득히 먼 후배다.
주황색 노을을 담은 검이 특징적이라는 점 외엔 큰 감흥이 없었다.
두 번째엔 48합을 겨루고 이겼다.
검을 찌르는 기세가 창과 닮았음에 조금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주황색 노을 즉, 누군가의 신성을 검기와 융합해서 활용할 때는 감탄했다.
세월로 말미암은 격차를 메우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왔을 후배의 노고를 헤아렸다.
세 번째엔 71합을 겨루고 이겼다.
20합 이내에 이길 작정이었는데 의외로 길어졌다.
‘다 파악했다고 생각했건만.’
전혀 아니었다.
당대의 검성에게 무쌍검은 근간이 아닌 덧붙이는 가지에 불과했다.
네 번째엔 82합을 겨루고 이겼다.
그쯤부터 전투의 파장을 견디지 못한 차원의 틈새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혼란하게 나부끼는 차원의 파편이 기존 세계의 섭리를 거스르고 괴물들을 생산했다.
“자네의 의도를 알겠군.”
검성 뮐러.
역대 최강의 검성.
당대의 인류에게 가장 위대한 과거의 영웅 중 하나로 칭송 받는 인물이다.
수백 년 전 속세를 떠나 고독하게 지내온 그의 인상은 크라우젤의 예상과 많이 달랐다.
올곧고 맑은 눈.
자신감 넘치는 표정.
흔들림 없는 목소리.
소년 만화의 히어로처럼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았다. 결단코 꺾이지 않을 선의 화신을 보는 듯했다.
긴 세월을 홀로 지내며 폐인이 됐을 거라는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다.
“급기야 차원의 틈새를 부수고 지상을 위기에 빠뜨린다라... 이래서야 나로선 속세에 복귀할 수밖에 없겠어.”
어째서 나는 이토록 위대한 재능을 타고났는가.
뮐러는 수없이 고찰한 끝에 타인을 위해 살았다.
개인이 감당하기엔 과분한 재능을 활용해서 무수히 많은 인명을 구해왔다. 강자의 책임이자 의무라고 믿었다.
그의 업적은 단순히 대악마들을 봉인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뮐러가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억제된 전쟁과 약탈은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많다.
단 한 명의 인간이 두려워 욕심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왕국들이 자존심의 문제로 기록하지 않았을 뿐.
“좋아. 일단은 자네의 의도대로 움직여주겠네. 차원의 파편에서 태어난 괴물들이 사람들을 해치기 전에 어서 지상으로 복귀하도록 하지.”
“...”
당대의 검성은 말수가 몹시 적었다.
특이한 일이다.
‘검성이란 과묵하기 힘든 족속인데?’
검에는 여러 가지 의도가 담긴다.
때로는 수천 명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서, 때로는 단 한 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휘두르는 게 검이다.
끝없이 고찰하지 않으면 방황하기 쉬운 것이다.
검성이란 많은 종류의 인생을 보고, 듣고, 체험해야만 했다.
보다 많은 삶을 이해하고 공감해야만 검에 담기는 의도가 늘어났고 덩달아 궤적이 늘어났다.
언젠가 멀찍이서 우연히 보았던 비반 공께서 증명했다.
도통 수다를 멈추지 않는 분이셨다. 덕분에 비반 공이란 사실을 알아봤다.
검로를 하나라도 더 늘리기 위해 쌓았던 사람들과의 인연을 일일이 회상하다보면 자연히 입이 바빠지는 걸 거라고, 뮐러는 생각했었다. 언젠간 자신도 저분처럼 되는 걸까 내심 걱정하면서.
“...괜찮습니다.”
“음?”
특이하게 과묵한 당대의 검성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예상과 다른 말로 선배를 당혹시켰다.
“당신께서 강림하지 않으셔도 지상은 안전합니다. 고작 저 정도의 괴물들로는 인간들의 털 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니까요.”
“이거 제대로 낭패로군. 자네가 검성이 된 시기는 내 생각보다 훨씬 짧은가 보지? 설마 20년이 채 안 됐나?”
“예.”
“어쩐지 체면을 모르고 도망치길 반복한다 싶더니. 여태껏 죽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도 겪어보지 못했던 게군.”
당대의 검성은 패배할 때마다 순응하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그리고 완전히 회복한 뒤에야 다시 나타나 도전하길 반복했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다.
패배와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는 방증이었다.
“내 분명히 말해두겠네. 자네의 믿음은 천재의 관점에서 생긴 오류야. 자네는 다른 인간들 또한 자네만큼 쉽게 고강해질 거라고 믿겠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거든. 절대다수의 인간은 저만한 괴물들을 쉬이 감당하지 못해.”
“뭔가 큰 오해를 하시는 듯한데... 저는 그리 오만한 성격이 아닙니다. 커다란 위기도 족히 수천 번은 체험했고요.”
“그런 자가 어찌 지상이 안전하다는 망발을 일삼나? 설마 자네는... 타인의 목숨 따위 안중에도 없는 건가?”
처음으로.
송아지처럼 크고 맑은 뮐러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변했다.
미세한 살기마저 흘렸다.
순간 크라우젤은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격통을 느꼈다.
[<심즉살>의 전조가 당신의 생명력을 최소치로 고정합니다.]
[저항하지 못합니다.]
‘상상 이상의 괴물이었군?’
살기로 벼린 검.
대상에게 살심을 품는 즉시 죽이는 경지.
심검의 궁극을 정말로 이뤘다고?
이쯤 되면 전설이나 초월자의 영역을 아득히 넘어서는 거 아닌가?
크라우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동요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는 검성이다.
뮐러와의 만남이 이롭지 않을 리 없다.
그리드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굳이 크라우젤에게 뮐러를 맡긴 것이고.
크라우젤은 믿었다.
자신의 재능과 실력이 아닌 ‘자격’을.
자신을 이곳에 보낸 그리드의 판단과 신뢰를.
“...흔들리지 않는군.”
뮐러는 크라우젤의 결의를 엿보고 있었다.
턱밑까지 다가온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자.
적어도 대화를 나눌 가치는 있어보였다.
“질문을 바꾸겠네.”
[<심즉살>의 영향에서 벗어납니다. 생명력 회복이 가능해집니다.]
“저런 괴물들이 날뛰어도 지상은 정녕 안전한가?”
“예, 지금의 지상은 ‘신’이 지키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또한 인간들은 당신의 생각처럼 나약하지 않습니다.”
“...”
뮐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깨달은 것이다.
당대의 검성.
아득히 먼 후배의 목적은 내 신변 따위가 아니었다.
“세상으로 돌아와라, 인간들을 위해 함께 싸워 달라... 당연히 그런 부탁을 하려고 찾아온 줄 알았건만.”
어깨를 으쓱인 뮐러가 검의 형상을 갖추고 있던 검기를 거뒀다.
그리고 지난 수백 년 동안 봉인해뒀던 진짜 검을 뽑아 쥐었다.
역대 최강의 검성과 함께 업적과 세월을 쌓으며 신검으로 거듭난 절세의 보검이다.
“자네의 목적은 단순히 나를 집어삼키는 것에 있었군.”
지금의 세상엔 내가 필요 없다.
후배의 태도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뮐러가 긴 세월 동안 소망해온 축복이었다.
소수의 강자가 지탱해야만 연명할 수 있는 세상.
지상은 위태로운 세계였다.
용들의 변덕과 신들의 필요에 의해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그런 세계에서 뮐러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홀로 무지막지한 압박감을 견뎠다.
그래서 도망쳤다.
급기야 죽음을 바랐다.
무료해서가 아니라 무의미해서 삶을 거부했다.
지옥의 진실을 엿보고 죽음이 끝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을 땐.
그래서 죽을 수조차 없게 됐을 땐 무척 절망했을 정도다.
하여 모든 짐을 내려놓고 차원의 틈새로 숨어들었다.
비겁한 겁쟁이인 것이다.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서라도 후배를 돕고 싶었다.
“최선을 다해서 먹혀주겠네. 자네를 수백 번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나의 모든 걸 보여주겠어.”
철컥!
뮐러가 제대로 된 기수식을 취했다.
아주 천천히, 크라우젤에게 보고 배우라는 듯이.
“오라.”
지상을 지키는 신?
그런 게 존재할 리 없다.
아마 후배는 한낱 인신을 오해하는 것일 터.
땅과 산을 가를 때마다 반응하는 대지의 신 가리온을 천상의 신들과 동격으로 착각하는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뮐러는 크라우젤의 말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인간은 나약하지 않다.’는 주장에 일정 부분 공감했기 때문이다.
만약 당대에 아주 많은 전설과 초월자가 탄생했다면.
지상은 뮐러가 살았던 시절보다 확실히 안전할 터였다.
수백 년 만에 마음이 놓였다.
쿠콰콰콰쾅!!
벼락처럼 갈라지는 검력이 크라우젤을 난도질했다. 차원의 틈새를 무 썰듯이 찢어발겼다.
그 모든 것이 크라우젤에겐 영감이었다.
단순히 기분이나 감각 따위가 북돋아지는 수준이 아니라 시스템적으로 도움을 받았다.
뮐러와 검을 교환할 때마다 검술 관련 스킬들의 레벨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무쌍검법과 관련 된 스킬들은 마스터 레벨을 넘어섰다.
전대와의 만남으로 발생한 직업 효과다.
여태껏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갔던 크라우젤이 처음으로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장했다.
그리드의 호의 덕분이었다. 언젠가 반드시 갚아야할 빚인 것이다.
[스킬 <무쌍검법>이 초월하여 11레벨을 달성합니다. 특수한 기능이 생성됩니다.]
[스킬 <무쌍심법>이 초월하여 11레벨을 달성합니다. 특수한 기능이 생성됩니다.]
뮐러를 만나고 20여일쯤 지난 시점이었다.
지상에선 그리드의 무후총 원정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무렵.
“...대체 누가? 설마 자네가 말한 ‘신’의 짓인가?”
한창 크라우젤에게 가르침을 주던 뮐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상에 남겨놓은 최후의 근심거리.
바로 무후총에 이변이 생겼단 사실을 깨달은 탓이다.
무후총과 자신의 감각에 검기의 가닥을 연결해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뮐러는 본인을 비겁한 겁쟁이라고 자책해왔지만, 실상은 여전히 세상을 걱정하는 영웅이었다. 반드시 나서야 할 순간은 외면하지 못했다. 애초에 외면할 각오가 없기에 무후총을 감시망에 뒀던 거고.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라 어서 돌아가야 하네. 이대로는 무후총을 중심으로 모든 차원의 경계가 허물어질 거야.”
“...”
그리드는 뮐러와 관련 된 모든 일을 크라우젤에게 일임했다.
그리고 크라우젤은 뮐러를 지상으로 데려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설득이 불가능할 거라고 판단해서다.
이유가 무엇이든 벌써 수백 년 가까이 홀로 지내온 인물.
그를 다시 속세로 불러들이는 게 쉬울 리 없잖은가.
괜히 설득하려다간 심력과 시간만 낭비할 거라고 보았다.
그래서 문답무용으로 싸웠던 것이다.
아주 작은 가르침이라도 얻길 바라면서.
자신 외의 강자를 만나지 못해 무료했다는 뮐러를 조금이라도 달래줄 수 있길 바라면서.
한데 결과는?
작은 가르침은커녕 엄청난 이득을 얻었고 뮐러가 제 발로 지상에 가겠다고 나섰다.
때로는 아무 말 없이 패는 게 상책이라던 그리드의 조언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
“세상엔 별에 별 일이 다 있군요.”
“소설이라고 해도 안 믿겠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죠.”
뉴스를 딱 1시간만 시청해도 알 수 있다.
세상에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많다는 사실을.
그나마 법규와 윤리가 우선시되는 현대사회에서 말이다.
기본적인 도덕조차 모르는 고대의 인간들은 정말이지 끔찍한 일들을 태연하게도 자행했었다.
이와타의 경우가 약과일 지경이다.
“망령이 이곳의 주민들에게 지팡이나 검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내린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끔찍한 과거를 완전히 지워버리길 바라는 마음에서였겠죠.”
스컹크가 주민이라는 표현을 썼다.
무후총에 서식하는 데스나이트와 리치들을 단순한 언데드로 여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와타부터 시작해서 가자나라에 이르기까지.
어느새 총 여덟이나 되는 간부들의 과거를 엿본 여파다.
올바른 세상에서 태어났다면 평범할 수도 있었을 사람들.
의도치 않게 영웅이 되고, 악인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었던 무지한 피해자들을 스컹크는 동정했다.
그리드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이 썩 편치 못했다.
크레이슐러의 생각은 달랐다.
-무후총은 거대한 감옥으로 봐야 옳았던 게야. 구제불능의 쓰레기들만 모아놓은.
크레이슐러는 무후총의 주민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됐든 죄업을 쌓았으니 당연한 벌을 받는 것으로 해석했다.
광신도만큼이나 패도적인 성직자의 관점이었다.
그리드와 스컹크가 혀를 내둘렀다.
‘본인의 시체가 이곳에 묻혔었다는 사실을 잊은 건가?’
‘애써 무시하시는 걸 수도...’
우뚝.
그리드의 걸음이 멈췄다.
무려 세 명의 간부가 함께 지키고 있던 작은 방.
워낙 협소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초월자들의 완벽한 협공은 그리드에게도 다소 난감한 구석이 있었다.
하여 제법 힘든 싸움 끝에 돌파하고 지하수를 따라 이동했는데, 정말 의외의 물건이 앞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두근! 두근!
심장처럼 박동하는 거대하고 붉은 살덩어리.
지옥에서 봤던 것과 같은 것이 무후총의 깊은 지하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