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2권 - 10화
“막내야 축하한다. 신전에서 너를 제물로 지목했어.”
“어머! 우리 집안에서 이런 경사가!”
“출세했구나, 이와타!”
죽음이 낙원으로 향하는 관문을 뜻하는 시대였다.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하는 부모와 형제들을 쭉 둘러본 소년이 활짝 웃었다.
“응, 기쁘네. 고마워요.”
***
소년이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하는 만찬이었다.
부모가 신전에서 받아온 빵과 고기를 식탁에 산더미처럼 쌓아올린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고기에 손도 댈 수 없었다.
어쩌면 천상에 오를 수도 있어서였다.
낡은 나무 식기에 담긴 풀 더미를 우울하게 바라보는 소년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이와타, 너는 비록 어리지만 많은 공덕을 쌓았다. 이르게 성찰단에 가입해서 가여운 사람들에게 봉사해오지 않았니.”
“이와타 쟤, 이틀 전엔 어미 잃은 새끼 여우들에게도 봉사했어요.”
“그랬니? 상대가 짐승이라고 해서 허투루 넘기지 않고 훌륭하구나. 아스가르드의 신들께서 너를 반드시 천사로 삼으실 게다. 악기를 다루는 어린 천사 중 하나가 되어 영원토록 신을 위해 노래하게 될 게야. 그러니까 의식까지 육식을 삼가야한다. 몸속에 자칫 노란 덩어리가 끼었다간 신들께서 꺼려하실 수도 있어.”
“우웩, 타잇타 님이 생각나네요. 그 부푼 배를 갈랐더니 노란 덩어리가 가득 차있었죠. 전 처음에 그걸 보고 내장이 없는 줄 알았다니까요?”
“의식을 행하셨던 신관들께서 눈살을 찌푸리셨던 걸 생각하면 냄새 또한 고약하지 않았을까 싶더구나. 하필 병든 자를 산 제물로 바치다니... 신전에서 드문 실수를 했던 게지.”
“실수가 아니라 알면서도 진행했던 거 아닐까요? 타잇타 님도 신관이셨잖아요. 평생을 봉사해 오신 분께 천국에 갈 기회를 주고 싶었던 걸 수도 있죠.”
“듣고 보니 그렇구나.”
“잘 먹었습니다. 다녀올게요!”
소년은 매번 잔소리를 늘어놓는 아버지와 곁에서 거드는 형이 종종 얄미웠다.
하지만 어제부턴 아니다.
산 제물로 선택 됐다는 사실이 소년을 조금 더 긍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맛이 밋밋한 채소를 어느새 모조리 먹어치운 소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곧바로 집을 나섰다.
작년 이맘쯤.
소년은 달리기가 빠르고 힘이 좋아 성찰단에 소집 됐다. 정확히 그때부터 하루하루가 바빠졌다.
안타깝게도 늙어버린 노인들이 이 도시엔 몹시 많기 때문이다.
어려워서 잘은 모르겠지만, 상관의 설명에 의하면 평화가 만든 병폐라고 하였다.
전쟁이 사라져 죽어야할 시기를 놓친 사람들.
낙원에 가지 못하는 가여운 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늘어난다고.
“구둣방 도미리 아줌마의 정수리가 하얗게 새었다더라.”
“그게 진짜야? 아는 사람에게 봉사하는 건 처음인데.”
“가엾게도... 광증이 생겨서 어디로 숨기 전에 서둘러 찾아가자.”
피가 스며들어 검붉게 변색 된 몽둥이를 거머쥔 청년들 틈에 섞인 소년이 봉사에 나섰다.
집으로 가는 어귀에 있는 구둣방이 목적지였다.
도미리 아줌마를 끌고나온 청년들이 그녀를 힘껏 두드려 팼다.
아줌마의 젊은 남편과 어린 딸들이 축하한다며 환호하는 반면 아줌마는 꽥꽥 비명을 질렀다. 제발 살려달라고 손을 싹싹 빌어댔다.
매번 느끼는데 늙은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어째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거지?’
죽어야만 비로소 낙원으로 가는 관문이 열린다.
신탁을 받드는 신관들께서 말씀하시길.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탄께서 지하에 만드신 낙원으로 향해 인간일 때 겪었던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었고, 일부 선택 받은 사람들은 레베카께서 천상에 만드신 낙원으로 향해 신을 모시게 된다고 했다.
온갖 고통에 시달리는 지상에서의 삶과 달리 근심걱정 없는 행복을 누린단 말이다.
물론 죽음에 이르기 위해선 고통을 감수해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고통은 찰나에 불과하다.
찰나를 견디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건만 어째서 이들은 저항하는가.
‘선배들의 말대로 광증을 겪는 거겠지.’
소년은 몽둥이를 막겠답시고 손과 발을 휘젓는 도미리 아줌마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손가락이 뒤집어지고 정강이뼈가 부러지면서 점차 크게 울부짖느니 순순히 배와 머리를 내놓는 편이 좋았을 텐데.
“질기네, 질겨. 이럴 땐 그냥 칼로 쑤시고 싶다니까.”
“미쳤어? 그건 봉사가 아니잖아.”
제물이 아닌 이상.
생전의 죄업을 씻기 위해선 '매'를 맞아 죽어야한다.
내장이 진탕 될 때까지 배를 얻어맞아야 반성이 되고 천상에 오를 가능성이 생겼다.
지하의 낙원이 지상보단 나아도 천상보단 못할 테니까.
봉사가 몽둥이로 행해지는 이유다.
“도미리 아줌마, 당신은 이미 충분히 반성했어요.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아도 되니까 그 덜렁거리는 팔 치우고 머리 내밀어요.”
“살려... 살려줘...”
“네? 그게 무슨 황당한 말이에요? 정수리가 하얗게 새기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미쳐버린 거예요?”
“내가... 내가 벌써 죽으면 우리 아이들은 누가 보살피니...? 빵 사올 돈으로 도박이나 해대는 철없는 아빠 밑에서 굶어 죽고 말 거야...”
“뭐라는 거지. 당최 어떤 부분을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도미리가 마귀에 홀렸다!”
“신들께 미움을 사기 전에 어서 죽여!!”
성찰단의 봉사를 즐겁게 구경하던 사람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젊은 남편이 앞장섰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웃으며 박수치던 도미리의 딸들이 불안한 듯 눈시울을 붉혔다.
결국.
소년이 나섰다.
선배들보다 훨씬 강한 힘으로 도미리의 뒷목을 눌러 제압해버렸다. 도미리가 소년에게 애원했다.
“제발, 이와타... 제발...”
퍽!!
붉은 피가 소년의 시야를 적신다.
도미리의 깨진 머리에서 튀어 오른 핏물을 뒤집어쓴 소년이 그제야 굳었던 얼굴을 활짝 폈다.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인 도미리의 어린 딸들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축하해.”
“고마워요!”
소녀들 또한 활짝 웃었다.
그날 밤.
소년은 신전을 찾아갔다.
의식 전까지 앞으로 한 달 동안.
매일 밤마다 신전을 찾아오라는 신관들의 말씀이 있었다.
“마셔라.”
하얀 액체였다.
투명한 유리병에 든 그것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소년에게 신관들이 설명해주었다.
“영혼을 정화하는 약이란다. 오늘부터 매일 밤마다 그 약을 먹으면 신들께 차츰 사랑 받게 될 게야.”
“천상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지겠군요!”
“암, 그렇지.”
기쁜 마음으로 약을 마신 소년은 의식이 몽롱해지는 걸 느꼈다. 마음이 붕 뜨고 괜히 웃음이 나왔다. 영혼이 깨끗해지자 덩달아 행복이 찾아온 듯했다.
문득 의문을 느꼈다.
가면과 옷을 벗고 가까이 다가오는 신관들의 피부가 쭈글쭈글해서다.
사람의 몸이 어찌 저럴 수가 있지? 살면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어릴 적에 화상을 입었다는 도모탄 아저씨의 팔뚝하고 조금 닮은 듯 했지만, 상처라기엔 너무 자연스러웠다.
‘신께 선택 받은 분들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거구나.’
아무튼 좋았다.
약에 취한 소년은 웃으며 신관들의 품에 안겼다.
그렇게 매일 밤 신전을 찾아갔다.
그리고 약 보름이 지났을 무렵.
소년은 약에 취해 행복한 와중에도 얼굴을 왈칵 구겼다.
구라다 신관님의 민머리를 쓰다듬자 손끝에서 수염처럼 까슬까슬한 감각이 느껴졌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흰색 털이었다. 방금 막 자란 것처럼 듬성듬성하고 짧았지만 머리카락임이 분명했다.
흰색 머리카락.
죽을 때를 놓친 노인의 상징이다.
“악! 이와타!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이냐!!”
“그야 당연히 봉사하는 거예요.”
약에 취한 소년은 정신이 몽롱했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서 뭘 하는지 상황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오로지 학습 된 본능에 의지했다. 은촛대를 들어 신관의 쭈글쭈글한 몸을 사정없이 두드려 팼다.
“이 미친놈이...! 으아악!!”
구라다 신관 님도 늙어서 광증을 얻으셨구나.
소년은 술병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신관을 측은하게 여겼다. 의식이 흐릿한 와중에도 한시라도 빨리 봉사해야한다고 판단했다.
힘들지 않았다.
소년은 몹시 빠르고 힘이 셌기 때문이다.
도미리 아줌마에게 봉사할 때는 선배들에게 대부분의 일을 맡겨 시간을 지체했지만 혼자선 오히려 쉽고 빨랐다. 구라다 신관을 금세 곤죽으로 만들어 죽였다.
“히익...”
다른 신관들이 몸을 벌벌 떨었다.
소란을 듣고 달려올 병사들은 없다.
거대한 밤의 신전은 고요했다.
소년이 찾아올 때마다 신관들이 병사를 물린 까닭이다.
“가여운 분들...”
소년이 드디어 눈치 챘다.
평소엔 가면 속에 가리어져 있던 신관들의 두 눈.
가까이서 촛불로 비춰보니 속눈썹이 하얗게 새어있었다.
민둥민둥하게 깎아놓은 눈썹과 머리카락도 어쩌면 희지 않았을까.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신관들이 절규했지만 늦었다.
문을 가로막고 선 소년은 봉사를 시작했다. 신관들을 모조리 때려 죽였다.
다음 날.
세상은 큰 혼란에 빠졌다.
신관들의 시체를 검사한 지식인들이 ‘매우 늙은 사람’을 운운했던 까닭이다.
피부의 주름이 나무의 나이테와 같은 거라나.
많은 게 바뀌기 시작했다.
도시의 법으로 군림했던 신관들이 노인보다 더 노인이었다는 진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품은 것이 계기였다.
종종 낙원과 신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아무래도 좋았다.
약이 필요했다.
소년을 가둔 감옥은 의미가 없었다.
조악한 쇠창살은 어제보다 더욱 강력해진 소년의 악력을 견디지 못하고 단숨에 우그러졌다. 뭐라고 소리치며 달려오는 성찰단의 선배들을 때려죽인 소년이 빙긋 웃었다.
‘선배들은 전부 천국에 가시겠지?’
소년은 곧바로 신전을 찾아갔다.
입구를 가로막는 병사들을 모조리 죽이고 내부를 조사 중인 사람들도 죽였다. 아버지도 계셔서 기뻤다. 제대로 효도하는 기분이었다.
소년은 약을 찾아 헤맸다.
도중에 자꾸만 사람들이 몰려와 어째선지 훼방을 놓았지만 죽이면 그만이었다. 종종 약을 찾아낼 때면 날아갈 듯이 기뻤다.
신전은 소년의 생각보다 더 넓었다. 지하에 ‘왕국’이라는 것의 멸망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알 바 아니었다. 약을 찾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약을 찾는 건 점차 힘들어졌다.
훼방꾼들의 방문도 뜸해져만 갔다.
이제 소년 혼자 머무는 신전은 여느 날의 밤처럼 고요했고 어느새 소년은 청년이 되었다.
“세상을 구한 영웅이 이토록 타락한 경우는 처음 보는구나.”
말을 잊어갈 무렵이었다.
뼈에 가죽만 붙은 것처럼 바짝 야윈 청년은 약에 대한 갈망만을 희미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문득 나타난 방문자를 보고 어떤 감흥을 느끼기엔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이 마모된 상태였다.
“이대로 죽어봤자 필시 지옥에 떨어질 테지. 바알의 노리개가 되어 가혹하게 이용당할 운명이다.”
“당신...은...?”
“신의 눈을 속인 지옥의 악마가 현혹한 세계를 구원한 용사여. 자신이 구원한 세계를 멸망시킨 무지한 죄인이여. 내가 아는 야탄 신이라면 필시 그대를 가엾게 여기실 테니, 그분의 사도인 내가 그대를 보살피겠노라.”
쿠르르르르릉...
낡은 신전이 무너졌다.
먼 옛날 청년에게 살해당한 인간들의 백골이 풍화되어 바람에 흩날린다.
눈처럼 내리는 뼛가루에 뒤덮이기 시작한 도시는 거대한 폐허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구원했던 청년은 영웅이었으며, 의도치 않게 세상을 멸망시킨 죄인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인간을 초월하여 먹지 않고 수백 년을 버텼다.
이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약을 향한 갈망에 의지한 채.
“그대는 나와 닮았다. 혐오스러운 과거의 잔재로 어디에도 소속할 곳이 없다.”
자신을 야탄의 사도라고 밝힌 망령은 주장했다.
우리가 죽어 지옥에 떨어지는 건 또 다시 죄를 짓는 것밖에 안 된다고.
야탄이 주기에 드신 틈을 타서 지옥을 점령하기 시작한 악마가 몹시 악독하니 필히 경계해야하며, 때문에라도 우리에겐 죽을 자격이 없다고.
“나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것이며 그대는 그곳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약...”
청년은 그나마 그를 지탱해온 것에 집착했다. 자꾸 해괴한 소리를 지껄이는 방문자에게 그만 떠들라고 손을 뻗었다.
닿지 않았다.
이미 망령이 청년의 심장을 취했다. 사도의 권능을 써서 죽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거기 셋은, 내가 훗날에 만나게 될 자들인가?”
그리드 일행의 ‘시야’를 향해 시선을 맞추고 질문한다.
등골이 오싹해진 일행의 의식이 현재로 돌아왔다.
***
[굵게 휜 사나운 검, ‘이와타’의 스토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신목관의 신성에 정화 된 이와타의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지길 거부합니다.]
[신목관이 이와타의 영혼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와타의 일부 기억과 능력이 신목관에 흡수됩니다.]
“허억... 허억...”
굵게 휜 사나운 검, 이와타.
그의 생전 기억을 체험한 스컹크의 호흡이 가빠졌다.
특히 마지막에 겪은 충격이 큰지 얼굴이 파랗게 질려선 식은땀까지 흘렸다.
‘심의에 안 걸리나?’
그리드는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이와타가 살았던 고대의 정서와 풍습이 몹시 잔혹하다고 생각하면서다.
‘하긴, 미성년자가 이 스토리를 관람할 일은 없겠군.’
그리드는 남들보다 수십, 수백 배 더 빠르게 성장해왔다.
그럼에도 Satisfy를 시작하고 무려 9년이 지나서야 무후총에 진입했다.
아직 미성년자인 플레이어가 이곳에서 자신과 같은 체험을 한다는 건 확률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바알이 지옥을 왜곡시킬 낌새를 보였던 시절의 이야기였군요. 야탄의 사도... 즉, 망령이 선수를 쳐서 지옥을 벗어난 것을 다행이라고 봐야할지...”
-인류 입장에선 무조건 다행이라고 봐야 옳네. 망령이 갈 곳 잃은 죄인들을 무후총에 데려오지 않고 죽도록 방치했다면 지옥의 전력은 지금보다 훨씬 더 고강했을 테니까. 아무튼 부지런한 놈인 건 확실하군. 한때 직접 세상을 떠돌며 쓰레기들을 수집하고 훈육해왔다는 거 아닌가.
갈 곳 잃은 죄인들의 터전.
무후총의 정체는 밝혀졌다.
하지만 망령을 신뢰할 근거로는 부족했다.
망령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무후총엔 정말로 야탄이 묻혀있는 걸까?
아직 밝혀야 할 비밀들이 존재했고, 그리드 일행은 계속해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