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2권 - 9화
-방금 그 여자... 개차반인 성격과 별개로 실력만큼은 훌륭했네. 자네는 쉬이 공감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조금 전까지.
크레이슐러는 그리드의 전투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었다.
단순히 자신보다 ‘많이 뛰어나다.’정도로 인지했다.
마리로즈의 평가와 그리드가 몸에 두른 황룡의 신성을 근거로 삼았다.
큰 실수였다.
그리드의 진가는 템빨에서 나오는 바.
특정 아이템을 활용할 때마다 결이 바뀌거나 전투력이 급격히 상승했다.
대표적인 예로 황혼이 있다.
그리드의 검이 여울랑의 몸을 스칠 때 떨어진 ‘빛의 창’을 보면서, 크레이슐러는 자신이 뭘 잘못 먹은 줄 알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은 수백 년 전 당시 유행했던 달걀 요리였는데 의외로 너무 달아서 꾸역꾸역 삼켰던 기억이 있다. 그때 체를 해서 그대로 정신이 나갔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 관이 된 이후의 내 삶은 모조리 꿈이었을 수도 있다.
지금 나는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됐을 정도로 디스인티그레이트의 발현은 비현실적이었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크레이슐러는 그리드에 대한 평가를 정정했다.
정확히 말하면 평가 자체를 금했다.
자신보다 얼마나 더 낫다, 감히 그딴 식으로 평가하기엔 아득히 높은 경지에 있었으니까.
‘가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절대자.’
크레이슐러도 소싯적엔 성검에 몇 번 의지했었다.
하지만 성검의 위력이라고 해봤자 ‘신성력을 증폭시키는 칼’에 불과했다. 점차 강해질수록 성검보단 본인의 실력을 믿게 됐다.
즉, 템빨의 잠재력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입장이란 의미다.
특정 아이템을 사용할 때마다 급격히 강해지는 그리드를 보고 ‘평소엔 숨겨뒀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했다.
‘반박귀진.’
지극히 높은 경지에 올라 평소엔 도리어 평범(?)해 보이는 경지.
크레이슐러는 그리드를 그렇게 정의했다.
황룡의 형상을 이루는 몹시 화려한 신성이 무색한 평가였지만 템빨을 세울 때의 그리드가 그만큼 강력하다는 뜻이 됐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여울랑은 한 시대를 대표했던 강자였겠죠.”
그리드는 제법 많은 초월자를 만나왔다.
카일로 대표되는 당대의 초월자보다 크레이슐러와 적야의 대도 같은 과거의 초월자들이 훨씬 더 강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건 물리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세월의 차이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초월의 격을 쌓은 사람들이 이제 막 격을 쌓기 시작한 후배들보다 고강한 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드는 유일한 예외였기에 절대지경에 오를 수 있던 거고.
-의외군. 자네 입장에선 너무 손쉬운 상대여서 약하다고 오해할 줄 알았는데.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
호흡 한 번 흐트러지지 않고 압도했으면서 쉽지 않았다니?
‘나름 선배의 체면을 세워주는 건가? 몹시 겸손하구나.’
그러고 보니 내게도 꼬박꼬박 예의를 갖추고 있다.
마리로즈의 봉인이 풀린 지금.
나는 한낱 낡은 관짝에 불과할 진데도...
부들부들!
새삼 감격한 크레이슐러가 몸을 떨었다.
안 그래도 사람처럼 말하며 둥둥 떠다니는 거대한 관이 경기까지 일으키자 한층 더 기괴해 보였다.
“...제발 진정하십쇼.”
혹시 마리로즈의 알몸이라도 상상한 건가?
크레이슐러가 갑자기 뭔 사고를 칠까봐 염려하는 그리드였다.
간신히 진정한 크레이슐러가 질문했다.
-그럼 자네 역시 여울랑의 추측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나?
그리드는 다짜고짜 칼을 날린 미친 여자를 선배로 대접해주고 있었다.
단순히 무력을 인정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네.”
역시나.
그리드는 여울랑이라는 인물 자체를 신뢰하는 눈치였다.
“썩 터무니없진 않았습니다.”
이곳에 야탄이 묻혔을 수도 있다.
여울랑의 추측은 제법 그럴 듯했다.
야탄쯤 되는 존재가 묻혔어야만 무후총의 규모와 망령의 격이 설명 됐으니까.
“다만 야탄을 부활시키기 위해선 망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눈치던데, 그 믿음에 대해선 납득하지 못하겠더군요.”
-이해하네. 아직 우리에겐 망령을 신뢰할 근거가 없으니까.
여울랑은 망령과 싸우지 말라고 했다.
그리드의 신변을 걱정하는 뉘앙스였지만 망령을 훼방 놓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기도 했다.
애초에 그녀는 망령과 협력해온 눈치였다.
야탄을 부활시키기 위해선 망령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게 분명했다.
그리드 입장에선 공감하기 힘들었다.
신화 찬탈자.
무후총을 넘어 온 대륙에 사냥꾼을 파견해 인신들을 도륙해온 망령은 인류의 해악이다.
물론 인간들을 해치려는 의도가 아닐 수도 있었다.
여울랑의 해석대로라면 대의를 위한 희생을 치르는 중일 것이다.
과거의 파그마처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드는 지상의 신이다.
인류를, 인류의 염원이 만든 신격들을 지켜야 할 의무를 짊어졌다.
그것을 외면하는 순간 그리드 역시 천상의 신들처럼 타락하는 것밖에 안 됐다.
‘애초에.’
지옥의 질서는 내가, 템빨단이 바로 잡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유라가 지옥을 지키고 있다.
이제 와서 야탄이 등장해봤자 예측 불가의 불청객에 불과했다.
“무작정 의심하고 싸우겠다는 건 아닙니다.”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인지, 아닌지.
그리드는 망령을 직접 만나서 확인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당연한 절차다.
‘고강한 절대자라고?’
한편으로 그리드는 순수한 호기심을 느꼈다.
여울랑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
그녀는 망령을 거역해선 안 될 존재인 것처럼 말했다.
그리드의 힘을 직접 체험하고도 그리드를 걱정했다.
마리로즈의 염려와 겹쳤다.
그러니까 더욱 더 확인해야하는 것이다.
그토록 고강한 존재가 이대로 꾸역꾸역 성장하게 놔둬도 좋을지.
“서두루죠.”
덥썩!
수십 개의 갓 핸드가 스컹크와 신목관을 붙잡았다.
그리드의 능력치에 영향을 받아 무지막지한 악력이 발휘됐다.
스컹크는 전혀 저항을 못한 채 붕 떠올랐고 크레이슐러는 갓 핸드가 자신을 들기 쉽도록 몸(?)을 뉘였다.
-안락하구나.
동시에.
퍼엉!
그리드의 신형이 복잡하게 꼬인 미로를 거침없이 돌파했고 갓 핸드가 바짝 따라붙었다.
여울랑과 싸우면서 저장한 스킬이다.
복잡한 지형을 즉시 주파했다. 지형을 분석하는 과정을 생략해버렸다.
“으그그그그극!”
-어어어어어억!
물론 부작용은 있었다.
스킬의 효과가 그리드에게 국한된다는 점이었다.
쿠당탕! 우당탕탕!!
갓 핸드에게 붙잡혀 끌려오는 스컹크와 신목관은 온갖 암석에 몸을 부딪쳐댔다.
스컹크의 생명력이 실시간으로 줄어들었고 무후총을 영원하게 만드는 ‘격’이 담긴 암석의 경우 신목관의 내구력마저 깎았다.
막말로 새된 비명이 메아리쳤다.
그리드는 개의치 않았다.
생명력과 내구력이야 회복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으그극... 벌컥벌컥! 쿨럭쿨럭!”
-어어억! 이놈들이 나를 때린... 기분이 좋아?
갓 핸드들이 활약했다.
스컹크의 입에 물약을 쑤셔 넣는 한편 신목관을 실시간으로 수리했다.
스스로 움직이는 신체의 재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범용성을 지닌다.
그리드 최대의 강점 중 하나였다.
““벌써 여기까지?””
하나의 미로가 끝나고 마주하게 된 공터.
아득히 먼 고대의 벽화에 둘러싸인 그곳에 수십 기의 데스나이트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드를 발견한 즉시 검을 세워 경례하는 모습이 템빨국의 기사들과 닮았다.
엄정한 군기.
침략자가 아닌 존경하는 상관을 대하는 태도다.
다만 의도가 불순했다.
무후총의 괴물들이 그리드를 존중하는 이유는 순전히 망령을 위해서였으니까.
그리드가 큰 불쾌함을 느끼는 이유다.
돼지를 살찌우기 위해 웃으며 사료를 퍼붓는 인간을 돼지의 입장에서 마주보는 느낌이랄까.
“중간보스가 참 많군.”
그대로 나아가 데스나이트들을 도륙하려던 그리드가 걸음을 멈췄다.
신중해야 할 만한 상대를 발견해서다.
굵고, 휘고, 사나운.
무려 3개의 수식언을 지닌 검.
수십 기 데스나이트의 대장격인 존재가 다음 미로로 나아갈 관문을 가로막고 서있었다.
““그리드 님께선 알고 계십니까?””
스카악. 스카카카칵...
굵게 휜 사나운 검이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면이 난도질당했다.
무형지기.
검의 의지가 감각에 거슬리는 것들을 모조리 베어버리는 것이다.
““무후총의 모든 병력과 관문은 침입자를 막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시험하는 것이죠.””
무후총은 거대한 여과기다.
쓸모없는 오물을 걸러내는.
““하지만 당신을 상대로는 의문이군요. 우리 따위가 감히 유일신을 시험한다? 무엄합니다. 마치 제라툴이 치우를 시험하는 격이죠.””
“스스로를 제라툴에 비견하는 건가?”
그리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무신 제라툴.
그는 분명 치우를 모델로 만든 대체품에 불과하다.
하지만 죽은 후 평생 누군가의 하수인으로 지내온 데스나이트 따위에게 언급 될 만한 이름은 아니었다.
거기까지 값싸진 않다.
그리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라툴의 강함을.
비록 성격적으론 결함이 많았고, 결국 그 성격에 발목을 붙잡혀 신중하지 못하게 패배를 반복해버렸지만.
““그럴 리가요. 저희와 당신의 격차가 그만큼 크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시를 들었을 뿐입니다.””
“예시가 잘못 됐는데. 너희는 지옥의 문을 지키는 개새끼쯤으로 비유했어야 옳지 않을까?”
굵게 휜 사나운 검의 안광이 불꽃처럼 일렁였다.
아주 찰나에 스쳐지나간 광경이었지만 그리드는 똑똑히 보았다.
““의외로 제라툴을 아끼시나 보군요.””
“네가 마음에 안 들 뿐이야.”
스컹크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제라툴을 아낀다니?
하필 제대로 헛소리를 지껄인 데스나이트 때문에 그리드의 심기가 몹시 불편해보였던 까닭이다.
과연.
그리드가 참지 못하고 출수했다.
평소와 달랐다.
수백 개 갓 핸드에게 일제히 발검을 시킨 뒤 동시에 투척을 연계했다.
그리드를 상징하는 기술인 <무구의 비>를 물리적인 방법으로 펼친 것이다. 낙하 궤도가 아닌 직선 궤도로. 지금 이 순간부터 그리드의 새로운 스킬이었다.
투콰콰콰콰콰쾅!!
데스나이트들의 보라색 검광이 무수히 많은 빗금을 그렸다.
개세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검의 파도를 막아내고, 급기야 조금씩 밀어냈다.
중심에 굵게 휜 사나운 검이 있었다.
사방팔방으로 번진 놈의 무형지기가 투척 된 검의 궤도를 비틀고 위력을 약화시키는 식으로 아군을 도왔다.
‘여울랑에게 제법 긴 시간을 잡아먹혔었지.’
굵게 휜 사나운 검은 그리드와 여울랑이 대치했던 시간을 고려하고 있었다.
듣기로 대략 10분 가까이 걸렸다고.
여울랑과 비슷한 수준의 검술을 구사한다고 자부하는 굵게 휜 사나운 검에겐 희망적인 소식이었다.
유일신을 상대로 ‘싸움’이 성립은 된다는 것이었으니.
‘배우는 심정으로 10분을 버틴다.’
굵고 휜 사나운 검에겐 부적도, 법보도 없다. 하물며 도법은 원리조차 몰랐다.
대신 언데드다.
반신으로 아직 인간의 잔재가 남은 여울랑과 달리 체력이 무한했다.
자신 역시 그리드를 상대로 꽤 버틸 자신이 있단 말이다.
““...?””
초월자의 감각으로 그리드를 포착하고 있던 굵고 휜 사나운 검의 안광이 크게 부풀었다.
예상과 달리 천천히 다가온 그리드가 펼치는 춤사위에 놀라서다.
모르는 사이에 압도당해 버렸다.
잠시 손끝조차 움직여지지 않는다 싶더니 급기야 시야가 뒤집히길 반복했다.
척추에서 분리 된 두개골이 허공을 수십 바퀴 회전한 까닭이다.
번쩍!
머리를 잃고 허우적거리는 검의 몸통을 빛의 창이 관통했고,
꽈르르릉!!
이어서 떨어진 운석들이 짓뭉개버렸다.
6융합 검무에 이은 황혼의 파장.
여울랑을 상대론 억제됐던 그리드의 필살기가 사나운 이빨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비장의 한 수를 간직하셨을 줄은...””
“같잖다.”
몇 년 전 신이 된 이후.
그리드는 세상에 익히 알려진 소문과 달리 연전연승하지 못하고 도리어 연패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가 싸워온 상대들은 적어도 실력 면에선 눈앞의 주제 파악 못하는 해골과 차원이 달랐으니까.
-잘 받았네!
산산조각 난 데스나이트들의 잔해를 갓 핸드가 수거해 신목관으로 운반했고,
[무후총의 간부, ‘굵고 휜 사나운 검’을 해치웠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스킬 북 <검기의 산란>을 획득하였습니다.]
[무후총의 언데드를 정화한 신목관의 신성력이 조금 더 강해집니다.]
[무후총의 언데드를 정화한 신목관의 신성력이 조금 더...]
...
..
[현재 정화 횟수 23회.]
[신목관이 ‘굵고 휜 사나운 검’의 기억을 읽습니다.]
그리드 일행의 의식이 과거로 옮겨졌다.
무후총의 과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