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2권 - 7화
‘외모가 생전의 나보단 살짝 못하다는 점 외에 결점이 없군.’
크레이슐러가 그리드를 평가했다.
최고의 극찬이다.
천재로 태어나 여신의 축복을 받고, 생애 내내 가장 위대하다고 칭송 받았던 교황은 보는 눈이 몹시 높았으니까.
유일하게 사랑하는 마리로즈에게조차 약점을 엿보고 공략했던 그가 봤을 때 실력적으로 결점이 없는 존재는 그리드가 최초였다.
‘저쯤 되면 혈왕의 자격으로 마리로즈와 합ㅂ... 합방해도 인정하는 수밖에...’
그래, 나는 마리로즈를 빼앗기는 게 아니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내 의지로 양보하는 것일 뿐...
크레이슐러는 스스로를 세뇌하듯이 자신을 위로했다. 열패감에 찌든 뇌를 정신 승리로 도핑하는 것이다.
덕분에 꺼림칙했던 기분이 차츰 나아지며 정신이 맑아졌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다.
‘애초에 그리드는 위대한 신이다. 드래곤 같은 괴력난신들을 감안해도 지상에서의 위상이 천상의 주신과 비견 돼. 그쯤 되는 사내라면 마리로즈와 합ㅂ... 합방할 자격이 있다... 아니, 오직 그리드에게만 자격이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관을 좀 더 크게 짜달라고 요청하는 거였는데...
크레이슐러는 자신이 ‘신혼 방’으로 쓰이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꼭 그렇게 만들 각오였다.
하여 괜한 걱정을 사서 하던 와중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자네는 리치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아나?
“글쎄요. 춤을 못 추게 되는 겁니까?”
그리드에게 리치란 템빨골2를 뜻했다.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낸 영향이다.
큰 고민 없이 대답한 말이 상식에 위반되는 이유였다.
‘요즘 시대의 유머인가?’
아무리 나라고 해도 수백 년의 시대 차이는 감당하기 힘들군.
대수롭지 않게 넘긴 크레이슐러가 말을 이었다.
-지식의 결핍일세. 짧은 인간의 삶으론 탐구할 수 없던 지식을 쌓기 위해 스스로 망자가 되기를 선택한 놈들은 한없이 광신도에 가까워.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영혼이나 혈육마저 제물로 바쳐 버리지. 그런 놈들이기에 공부할 기회를 빼앗기는 걸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한다네.
“결과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 언데드 중에서도 아주 특이한 케이스야. 자네에게 신목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결코 정면에서 싸우려들지 않을 걸세. 가히 재앙이라 부를 만한 함정을 준비해둔 채 숨을 죽이고 있을 테니 자네 또한 신중한 편이 좋네. 서두르지 말고 스컹크의 탐색 속도에 맞춰서 이동하도록 하게.
크레이슐러의 선문답은 염려에서 비롯됐다.
성큼성큼 거침없이 나아가는 그리드의 속도가 너무 빨랐던 탓이다.
혹시 함정이 없을지 수색하는 스컹크를 뒷전으로 뒀다.
마리로즈와 관련 된 일을 제외하면 신중하고 현명한 편인 교황 크레이슐러의 노파심을 자극하는 태도였다.
“알겠습니다.”
그리드가 순순히 조언을 받아들였다.
신목관을 얻은 뒤로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슬렀다.
‘내가 잠시 들떴군.’
기껏 스컹크를 파티로 초빙해놓고 스컹크의 역할을 간과하다니.
자책하는 그리드를 수십 개의 그림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세 발자국만 더 오면 되는 거였는데... 크레이슐러 저 위대한 영웅이 초를 치는군.””
““역대 최강의 교황... 값싼 언행과 별개로 꽤 신중하기로 유명했었다...””
““그러고 보니 끝이 두꺼운 지팡이 너는 크레이슐러의 시대에 활동했었군. 저 위대한 영웅의 약점은 뭐지?””
““지독하리만치 게으른 자다. 야탄교가 왕성했던 시기. 초대 교황이 크레이슐러를 후계로 삼은 이유는 순전히 무재를 높이 평가해서였는데 정작 크레이슐러 본인은 자신의 재능을 연마하지 않고 썩혔지. 무엇이든 한 번에 배우고 그대로 써먹을 뿐, 가다듬는 노력은 일체 하지 않았다. 기억하기로 신중함을 핑계로 삼았던 것 같군.””
““깊이가 없다?””
““옳다. 저자의 검술과 마법은 특별한 점 없이 평범했다.””
““한데 어찌 승승장구하고 끝내 마리로즈마저 봉인한 거지?””
““평범한 검술과 마법을 기발하게 응용했으니까. 순간순간 번뜩이는 영감이 대단해서 평범한 기술들에 존재하는 빈틈을 역으로 무기로 삼아댔다. 하물며 초월자였지. 어지간한 악당들은 저자의 평범한 검로를 읽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 약점이라는 것도 사실상 동급의 초월자에게나 간파 됐겠군?””
““그래. 하지만 아무도 공략하지 못했지. 저자의 또 다른 무기로는 선대 교황과 여신의 호의로 얻은 신성력이 있었으니까.””
““검술과 마법을 파훼해도 끝내 신성력에 좌초 됐다는 건가... 가히 완벽했군. 하기야 결점이 컸다면 한 시대를 풍미하는 영웅이 되지도 못했겠지.””
““물론 관으로 전락한 지금은 신성력 덩어리에 불과하다만 생전의 기억과 지혜를 잃지 않았고, 하필 그 덩어리를 그리드 님께서 다루시는 게 문제다. 저들에 비해서 하찮은 나의 식견으로는 저들을 공략할 방법을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어.””
그림자들의 정체는 어둠 속에 도사리는 리치 무리였다.
이곳 무후총에선 망령의 지팡이로 불리는 존재들.
그들은 크레이슐러의 평가대로 죽음을 두려워했다.
진리의 탐구를 위해 인간을 버리고 영생을 택했건만 그 결과가 죽음이라면 모든 선택이 헛된 것으로 전락하고 말지 않나.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과연 위대한 신답다. 소박하게 꾸린 일행의 정체가 전설의 탐험가와 마리로즈 봉인자라니...””
소수이나 완벽한 파티.
점차 미로 깊은 곳으로 진입하는 그리드 일행을 지켜보는 리치들의 근심이 깊어졌다.
수정구슬이 침입자들의 위치와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송하고 있었지만 정작 현장에 난입할 용기는 못 냈다.
기껏 설치한 함정들이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파훼되는 광경을 그저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그때였다.
“내가 돕겠네.”
묵묵히 정좌하고 있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스슥.
긴 금색 도포가 바닥에 끌리는 반면 두 발은 허공에 떠있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살아 숨 쉬는 존재이나 가장 신비로운 인물.
본래 무릉도원 소속으로, 모종의 이유로 신들에게 거역하고 무후총에 의탁한 신선이었다.
리치들이 술렁였다.
““귀하께서는 신살의 자격을 지니지 않았소? 자칫 그리드 님을 해치기라도 했다간...””
“내가 지닌 자격은 편린에 불과하네. 내 실력으로 유일신을 해치는 건 요원할뿐더러 유일신은 내 적이 아니야.”
신선 여울랑.
동대륙 출신인 그녀는 한때 신선의 자격으로 천상에 올랐었다. 정확히는 병사로 소집됐다.
칠악성이 천상의 신들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다.
세상이 한 번 멸망하기 전.
즉, 크레이슐러며 그리드가 탄생하기도 전부터 여울랑은 신선이었다. 도를 갈고 닦아 신격을 쌓은, 지극히 드문 케이스의 반신.
그녀는 신들을 신뢰하지 못했다.
일곱 선인에게 누명을 씌워 배신자로 만든 신들의 저열한 수법을 보았으니까.
욕심에 눈이 멀어 전쟁을 일으키고 쫓겨난 신들에게 시달려본 경험이 있으니까.
한때 인간이었으나 도를 닦아 해탈한 여울랑이 봤을 때 신들은 어리석고 하찮은 족속들이었다.
초월성을 타고난 주제에 짧은 생을 사는 인간과 하는 짓이 별반 다르지가 않았다.
변호할 가치가 없는,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쓰레기들인 것이다.
여울랑이 신살의 자격을 연마해온 이유다.
““그리드 님을 어쩌지 못한다면서 왜 굳이 나서겠다는 거요?””
“유일신은 어쩌지 못해도 다른 자들을 돌려보내는 건 가능하지.”
확실히...
둘 중 하나만 처리해줘도 리치들에겐 엄청난 도움이 됐다.
신목관을 처리하면 리치들이 소멸할 걱정이 사라졌고 탐험가를 처리하면 그리드를 함정으로 유인하는 게 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리치들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울랑은 귀빈이다.
망령께서 그녀를 각별히 여겼다. 자칫 위험에 빠뜨렸다간 망령께서 진노하실 터였다.
“무리하지 않을 테니 염려 말게. 망령 공께서 무덤의 주인을 부활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내 명심하고 있으며, 과거에 맹세했듯이 철저히 협력할 생각일세.”
스슥. 스스슥.
도포가 파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울랑의 육신이 흐릿해졌다. 급기야 투명하게 변하고 풍경에 녹아든다 싶더니 사라졌다. 찰나지간에 이루어졌다.
마력의 흔적이 일체 없다.
수백 년간 지식을 쌓아온 리치들에게도 미지의 영역인 ‘도법’인 것이다.
***
“이번에야말로 해치웠나?”
“...폰 너 일부러 그러니?”
무후총에 진입한 이후.
단 둘이 떠난 그리드와 스컹크를 제외하고 템빨단은 총 10개의 공대로 나뉘었다.
각 공대의 평균 인원은 400.
템빨단의 거대한 전력을 실감시키는 규모였다.
한데 처음부터 위기를 맞이했다.
악신.
무려 신을 적으로 마주한 것이다.
비록 ‘신상이 묘사하는’ 가짜에 불과했지만 신격을 무기로 삼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고, 여태껏 템빨단이 레이드했던 그 어떤 보스 몬스터보다 강력했다.
솔직히 상당수의 사람들이 좌절했을 정도다.
한데 의외로 10개 공대 전부 무사히 관문을 돌파했다.
라우엘의 고묘한 선전 탓에 ‘템빨단 공개 오디션’쯤으로 전락한 제8회 국대전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요즘.
말인 즉 인마대전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현재.
템빨단을 대표하는 얼굴들은 단원들의 예측 이상으로 강해진 것이다.
하지만 기뻐할 틈이 없었다.
각 공대는 곧바로 새로운 시련을 맞이했다.
“거봐, 또 부활했잖아.”
“이게 내 탓이라고?”
죽여도 다시 부활하는 언데드.
데스나이트나 리치와 달리 ‘인간’의 형상을 한 그것은 무지막지하게 강력했다.
낯선 이름과 별개로 생전에 반드시 초월자였으리라.
“3번째 부활인데도 약해졌다거나 하는 기색이 없네.”
“방금 전 싸움에서 28명이 죽었어. 패턴 분석도 할 겸 방어진을 구축하고 시간을 벌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물러나서 정비하자는 의견은 없다.
신들의 무덤 덕분이다.
하나의 ‘땅’으로 취급 받기 때문일까.
신들의 무덤에는 놀랍게도 부활 포인트가 존재했고, 사망한 템빨단원들은 신들의 무덤에서 부활했다.
늦어도 15분 내에 현장에 다시 합류할 수 있단 뜻이다.
죽어도 다시 부활하는 언데드?
지속력이라면 이쪽도 밀리지 않는다.
지슈카가 이끄는 공대와 루비가 소속한 공대는 도리어 지속력에서 우위를 점했을 정도고.
“잠깐! 나 피가 없다!”
유일하게 반트너가 이끄는 공대만 위기를 겪고 있었다.
탱커 역할을 반트너가 담당했는데 어그로를 워낙 잘 끈 까닭이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머리가 적을 자꾸만 현혹했다.
반트너는 적의 공격을 사실상 혼자서 감당했고 동료들의 지원을 받아도 금세 피가 바닥났다.
최초 1회 싸움 때는 다른 그 어떤 공대보다 수월하게 적을 처치한 반면 횟수를 거듭할수록 상황이 불리해졌다.
“그러니까 루비를 데려오자고 했잖아! 하여튼 넌 그놈에 자존심이 문제라니까?”
“그건 아니지. 성녀는 3차 전직밖에 못한 레가스한테 양보하는 게 맞... 허억! 나 죽는다!!”
“그렇긴 한데... 환장 하겠네 진짜.”
탱커가 전선을 지키지 못하고 뒷걸음치기 시작하자 전체적인 균형이 와르르 무너졌다. 붕괴 된 진형으로 난입한 언데드의 광역기가 단원들을 휩쓸며 전황을 뒤집으려 했다.
잠시 퇴각해야한다는 판단이 설 정도로 큰 위기였다.
바로 그때.
스스스슥.
허공에서 정체불명의 존재가 나타났다.
황금색의 도포를 펄럭이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는데, 한 손에는 얇은 장검을, 다른 한 손에는 몇 장의 부적을 거머쥐고 있었다.
‘...또 길을 잘못 찾았군.’
신선 여울랑은 족히 200년 가까이 무후총에 의탁하고 있었지만 무후총의 구조를 파악하지 못했다.
혼자 돌아다니기엔 미로가 워낙 거대하고 위험했다.
그렇다고 해서 해골들에게 길 안내를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공교롭게도 리치들은 신선에게 큰 환상을 품고 있었다.
삼라만상을 꿰뚫었기에 승천한 존재랍시고 은근히 숭배했다.
그들에게 길 안내를 부탁한다?
고고한 신선인 여울랑의 성격상 몹시 힘든 일이었다.
“누구...?”
술렁이는 템빨단원들에게,
“인류를 위해 애쓰는 그대들을 흠모해왔네.”
촤르르르륵.
여울랑이 부적을 뿌렸다.
그녀의 도력이 담긴 부적은 지친 템빨단원들의 체력과 상처를 회복시켜줬으며 습득 중인 ‘모든 스킬’의 레벨을 한 단계 상승시켜주는 무지막지한 효과를 발휘했다.
“어...?”
생전 처음 보는 버프 설명에 ‘신선’과 ‘도법’ 등의 단어가 등장하자 놀란 템빨단원들이 여울랑의 정체를 눈치 챘을 때.
그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곧 다른 미궁에서 나타난 그녀의 시야에 또 다른 템빨단원들의 모습이 가득 찼다.
‘...운명인가.’
여울랑에겐 본인이 길치라는 자각이 없다.
신선이니까.
초월성을 띈 자신이 길치라는 사실을 인정하기엔 그녀는 너무 대단한 존재였다.
하여 템빨단원들을 마주칠 때마다 운명, 인연을 운운하며 부적을 뿌려댔고 덕분에 템빨단의 각 공대는 영문도 모른 채 큰 힘을 얻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저 여자, 나와 동류다.
간신히 그리드 일행의 눈앞에 나타난 여울랑은 크레이슐러의 극찬을 이끌어냈다.
떠올리기 힘든 동작으로 그리드의 공격을 수차례 피하면서다.
크레이슐러는 여울랑이 자신과 동급의 재능을 지닌 인물이란 사실을 단숨에 간파했다.
“초면부터 무례하군.”
어째선지 여울랑은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힐끗힐끗 그리드의 눈치를 살피며 공손히 읍하는 태도가 특이했다.
‘크레이슐러와 동류라고?’
굉장히 미쳤다는 건가?
그리드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