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2권 - 6화
“그럼 다음에 보자꾸나.”
무후총은 망령의 영역이다.
망령은 천상을 떠나 만전이 아니었던 제라툴과 달리 완전한 상태였다.
도리어 그리드가 성전 당시의 제라툴과 입장이 닮았다.
불리한 싸움을 해야 한단 의미다.
마리로즈는 그리드에게 충분한 주의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을 억누르고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그리드가 어련히 잘할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예...”
“후훗.”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재회를 약속하는 그리드의 모습이 마리로즈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귀여웠다.
괜한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를 보는 기분이랄까.
그녀는 언젠가 그리드와 교미하고 낳게 될 아이가 기대됐다.
아이에게 첫 심부름을 보낼 때의 심정이 지금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마리로즈는 사실 출산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내 아이가 어머니로 인해 말미암은 저주와 복수를 짊어져야한단 사실을 뻔히 알고도 어찌 아이를 낳겠나.
그건 지독하게 무책임한 짓이다.
혈왕의 역할을 거부하는 그리드를 굳이 재촉하지 않는 이유임과 동시에 어머니를 의심하는 이유였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리로즈는 베리아체가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정녕 우리를 사랑했을까.
“마리로즈...?”
용건이 끝났으면 제발 빨리 좀 가라.
거북한 시선으로 마리로즈를 힐끔힐끔 살피던 그리드가 두 눈을 서서히 치켜떴다.
매번 볼 때마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마리로즈의 얼굴에 한 순간 괴로운 표정이 스쳐지나간 까닭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절대자였던 여인.
세상일에 초연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잠시나마 속내를 표출한 것이다.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수마 탓이란다.”
진정으로 같은 눈높이가 되었구나.
찰나의 기색을 읽혔다는 사실에 내심 놀란 마리로즈가 평소와 같은 미소를 그렸다.
느긋하고 매혹적인 미소.
여유를 표방한다.
그리드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저 여유가 사실은 꾸며진 걸 수도 있겠다고.
“...망령은 노회한 괴물이란 사실을 명심하렴.”
그걸로 끝이었다.
육신을 안개로 흐트러뜨린 마리로즈가 현장을 떠났다.
끝내 조언을 하고 만 스스로를 질책하면서다.
어쩔 수 없었다.
그리드에게 속내를 읽힌 순간.
그녀는 그리드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의외의 반응이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놀랍게도 심장이 뛰었단 말이다.
그를 자각한 순간 그리드를 향한 호감이 호감 이상의 무언가로 짙어져갔다.
처음 느끼는 감정.
몹시 당혹스러웠다.
그리드의 피를 탐하고 싶다는 욕구를 잠시 망각해버릴 정도여서,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마리로즈의 모습은 차라리 도망치는 것에 가까웠다.
“노회한 괴물이라...”
드디어 마리로즈가 떠난 뒤.
마리로즈의 충고를 되새기는 그리드에게 슬그머니 신목관이 다가왔다.
역대 최강의 교황이자 인류 역사상 한 손에 손꼽히는 영웅, 크레이슐러였다.
-오래간만일세.
“네...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리드가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했다.
안 그래도 정상이 아니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크레이슐러가 보여준 모습은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그리드의 속내를 읽은 크레이슐러가 헛기침했다.
-마리로즈 앞에선 도무지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어. 물이 아래로 흐르듯 당연하게 매혹되고 마는 게지. 부득이한 일이었으니 자네는 내 추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네.
목소리가 중후했다.
예스러운 말투와 훌륭한 조화를 이뤄서 과연 과거 시대의 교황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분이 바로 크레이슐러 님...’
재앙을 막기 위해 스스로의 영혼을 관에 가둔 위대한 영웅.
아는 사람만 아는 전설 속 신목관을 실제로 마주보고 선 스컹크가 감격했다.
조금 전까지 보았던 크레이슐러의 추태는 그새 잊고 존경심을 품었다.
위대한 영웅의 말을 순수하게 믿는 것이다.
크레이슐러를 마리로즈의 매혹에 당했던 피해자로 받아들였다.
물론 그리드는 달랐다.
‘의외로 순진하시네.’
그리드는 크레이슐러의 본질을 안다.
그가 스스로 관이 된 이유가 순전히 성벽을 충족하기 위함이었음을 알기에 깜빡 속아 넘어간 스컹크를 가엾게 바라보았다.
저러다가 조만간 실망할 때 충격이 클 것을 뻔히 알았으니까.
-음... 자네 또한 훌륭한 격을 지녔군. 천상의 신들을 위협할 정도로 대단해진 그리드가 측근으로 삼을만 해. 자네의 이름은 뭔가?
그리드의 게슴츠레한 시선에 부담을 느낀 크레이슐러가 스컹크에게 관심을 돌렸다.
“예, 성하. 저는 탐험가 스컹크라고 합니다. 그리드 님의 도움을 받아 주제넘게 전설이 되었지요.”
-스컹크? 이름이 스컹크라고?
“하하, 예...”
-허. 자네의 부모는 무슨 억하심정으로 자식의 이름을 짐승처럼 지었단 말인가?
“제가 직접 지은 이름입니다...”
-고아였나? 소싯적에 치기로 지은 이름인 게로군.
“...그런 셈입니다...”
“...”
포식이불족발이 닉네임 변경권을 원하는 이유가 있구나.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피곤한 표정을 짓는 스컹크를 그리드가 안타깝게 바라볼 때였다.
““그대의 위대한 신화를 이 땅에 묻으리...””
신목관에 깔린 크레이슐러의 시체가 재차 입을 열었다.
신목관이 그리드 일행과 대화하며 위치를 살짝 바꾼 까닭에 곤죽이 됐던 신체의 일부가 재생한 것이다. 발성 기관이 회복됐다.
덕분에 각자의 이유로 피로감을 느끼던 그리드도, 크레이슐러도, 스컹크도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할 수 있었다.
-보다시피 무후총에서 언데드는 영생하는 듯하군. 이곳을 터전으로 삼고 신화를 포식해온 망령의 격, 열망, 심상 따위가 이곳을 속세와 완전히 별개의 차원으로 재탄생시킨 게야. 오로지 망자를 위한 세계로.
아스가르드, 지옥, 정령계, 무릉도원, 그리고 템빨계.
세상은 여러 개의 차원으로 나뉘었고 무후총도 그중 하나였다.
-망자를 위한 세계라. 왜곡되기 전의 지옥이 이런 형태였을까? 아무튼 무후총의 본질을 처음부터 꿰뚫고 자네에게 나를 보낸 마리로즈는 정녕 대단하단 말이지. 존경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 흠...
마리로즈를 떠올리자 자연히 황홀경에 빠져들던 크레이슐러가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았다. 스컹크의 두 눈에 스치는 의심을 포착한 것이다.
-어쨌든 신목이라면 이 세계의 본질을 거스를 수 있다네.
완벽한 세계란 없다.
지상, 천상, 지옥, 템빨계 등.
각 세계가 신의 의지로 탄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애초에 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완벽과 거리가 멀었다.
각 신에게도, 각 차원에게도 약점이 있단 말이다.
무후총의 약점 중 하나는 반드시 신목이었다.
-신목의 위력은 대단히 뛰어나. 내가 고작 이런 모습으로 내 시체를 압도하는 이유는 순전히 신목에 담긴 무지막지한 신성을 빌릴 수 있기 때문일세. 신성력에 한해서만큼은 생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지.
덜컹!
크레이슐러가 관 뚜껑을 열었다.
넓고 푹신한 내부가 공개됐다.
관의 크기를 보고 짐작하긴 했지만 성인 남자 셋은 족히 들어갈 정도로 내부가 컸다.
마리로즈에게 안락한 잠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애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사냥하는 언데드는 모조리 이 안에 집어넣도록 하게. 마리로즈의 힘마저 일부 억제시켰던 강력한 신성이 잡것들을 분쇄하고 정화시킬 게야.
[숨겨진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무후총 정화 작업>
★히든 퀘스트★
이 거대한 무덤에는 신화 포식자에게 충성하며 인신들을 사냥해온 사악한 무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들을 정화하면 정화할수록 지상의 평화에 일조하는 셈입니다.
*사냥한 언데드를 <신목의 관>으로 정화.
현재 정화 횟수:0
*정화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신목의 관>의 신성력이 강화됩니다.
*정화 횟수가 일정 수치 이상을 기록할 때마다 무후총의 숨겨진 이야기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무후총은 뱀파이어 일족과 큰 관련이 있는 건가?’
마리로즈는 무후총에서 활동하기 힘들다고 밝힌 바 있다.
무후총의 무언가가 피를 폭주시킨다며.
이곳에선 직계들을 믿지 말라고 주의했을 정도다.
거기에 지금 뜬 히든 퀘스트의 내용을 보면 신목의 관이 중요한 열쇠가 되어주고 있었는데, 신목의 관을 여기까지 옮길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마리로즈가 유일했다.
‘만약 내가 혈왕이 되지 못했다면 무후총의 비밀을 밝히는 일 자체가 요원했을 수도 있겠군.’
혈왕이 된 덕분에 마리로즈의 관심을 샀고, 마리로즈의 관심을 산 덕분에 신목관을 원군으로 얻은 상황이니까.
이는 무후총이 뱀파이어 일족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혹시 이곳은 베리아체의 무덤인가...? 아니, 그건 시기적으로 불가능한데.’
베리아체의 죽음보다 무후총의 탄생이 훨씬 더 빠르다.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의문을 일단 억누른 그리드가 갓 핸드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곤죽이 되어있는 크레이슐러의 시체를 수습한 갓 핸드들이 그것을 신목관에 집어던졌다.
-나중에 꼭 세척해주게.
크레이슐러는 자신의 시체를 더러운 오물 취급했다.
순전히 마리로즈를 위해 마련한 자리.
자신의 ‘내부’에 썩은 고깃덩어리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현실이 끔찍하다며 한탄했다.
번쩍!
[무후총의 언데드를 정화한 신목관의 신성력이 조금 더 강해집니다.]
[현재 정화 횟수 1회.]
“그... 진짜로 괜찮으십니까?”
관에 넣은 크레이슐러의 시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한 그리드가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바로 지금.
위대한 영웅의 육신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크레이슐러가 인간으로 부활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단 의미다.
-당연히 괜찮네. 이미 한 번 버렸던 육신 아닌가. 이제와 새삼 집착하는 건 미련한 짓이지.
“...”
물론 그리드는 크레이슐러가 본인의 선택으로 인간을 버렸단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미련을 쌓아가게 마련이다.
한데 크레이슐러에겐 그런 게 일절 없었다.
여태껏 걸어온 길에 후회 따위 한 점 없었다는 듯이.
스컹크가 크레이슐러에게 경의를 표했다.
“종교인의 깨달음이 담긴 말씀이군요... 과연 역사상 가장 위대하신 교황 성하십니다.”
그리드는 여러모로 피곤해졌다.
‘깊이 생각하지 말고 해야 할 일이나 하자.’
정상인이 비정상인을 이해하려고 백날 노력해봤자 헛된 짓이다...
자신 외의 초월자는 대부분 미쳤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그리드는 어렵지 않게 마음을 다스렸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오늘 엄청 성장하겠네.’
각자 다른 미로로 흩어진 템빨단원들.
아직 악신들과 싸우고 있을 그들도 곧 죽지 않는 언데드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아마 크레이슐러보단 못해도 영웅급 언데드일 터.
죽여도, 죽여도 다시 부활하는 적을 상대로 캐릭터 경험치와 스킬 레벨을 쭉쭉 올리겠지.
“재밌는 생각이라도 떠오르셨습니까?”
흐뭇한 미소를 그리는 그리드에게 스컹크가 조심스레 물었고,
“곧 다른 동료들도 죽지 않는 언데드를 마주하게 될 거 아닙니까.”
그리드가 대답했다.
스컹크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렇군요... 그들은 신목관의 도움을 받지 못하니 몇날며칠을 싸워야 할 수도 있겠군요...”
“그렇죠.”
“...?”
근데 왜 웃는 거지?
스컹크는 그리드가 조금 무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