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2권 - 4화
[이름 잃은 악신의 분노가 당신을 억압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대폭 하락합니다.]
[이름 잊은 악신의 슬픔이 당신을 망설이게 만듭니다. 상태이상 혼란과 전의 상실에 걸립니다.]
[이름 버린 악신의 광기가 당신을 유린합니다. 생명력과 마나를 비롯한 모든 자원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악신들의 저주가 당신의 시야를 차단하고 스킬과 마법의 사용을 금합니다.]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신상을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을 끊어야합니다. 사슬을 끊고 뒤집힌 신상을 똑바로 세우면 악신들의 기운이 약해질 겁니다.”
시야가 꺼졌다.
온통 어둠뿐인 세계에 갇힌 스컹크는 현장의 상황을 식별할 수 없었다. 곧 다가올 죽음을 기다릴 뿐인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괜찮다.
처음 공동에 진입했을 때 최대한 주변을 관찰해놨으니까.
나와 달리 상태이상에 저항했을 그리드 님께 조언할 수 있다.
“물론 사슬을 끊는 게 여의치 않으실 겁니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3이라는 숫자를 기억해주십시오. 신상의 형태, 신상에 새겨진 문양, 신상이 두른 장신구... 아니, 공동 벽면에 달라붙어 있는 이끼나 바닥을 구르는 자갈 따위도 좋습니다. 무조건 세 개를 이루는 것을 찾아 파괴하십시오. 만약 세 개를 이루는 것이 없다면 역으로 만드셔야 합니다. 가능한 대칭을 이루...”
콰앙!
쿠과과과과과광!!
귀를 찢는 폭음이 들려온다 싶더니 지반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신상을 통해 현현한 악신들과 그리드가 전투에 돌입한 듯했다.
“큭...”
발 디딜 곳이 사라졌다.
허우적거리면서 끝 모를 지하로 추락하기 시작한 스컹크가 간신히 마지막 말을 쥐어짰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리드의 승리를 기원하는 외침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나를 구하려다가 기회를 낭비하지 말고 전투에 집중하라는 염원을 담았다.
자신의 목숨 따위보다 그리드의 승리가 수백수천 만 배는 더 귀중했으니까.
‘반드시 천상에 도달하셔야 할 분이다.’
이젠 세상사람 모두가 알고 있다.
아스가르드 정벌.
사람들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Satisfy의 엔딩일 거라고 짐작하고 꺼렸던 ‘신들의 최후’는 끝이 아닌 시작일 확률이 높다.
심지어 99.9퍼센트의 확률이다.
왜냐고?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이나 바람대로 Satisfy를 이용하기 위해선 천상의 신들이 사라져야 했으니까.
그래, 저들은 쓸모없는 훼방꾼이다.
하늘 높은 곳에 도사리는 위험에 불과하다.
그 위험을 없애기 위해서 그리드가 필요한 것이고.
그리드는 더욱 더, 계속해서 강해져야 했다.
동료라는 명목으로 그의 발목을 붙잡는 일은 없어야...
“뭐가 그렇게 비장해요?”
“아...”
정수리부터의 수직 낙하.
이를 악 문 채 곧 다가올 충격에 대비하던 시한부가 탄식했다.
그리드의 단단한 팔이 그의 등을 받치고 있었다.
“어차피 죽어도 부활할 사람을 왜 굳이 챙기시는 겁니까?”
시한부 신세에서 벗어난 스컹크가 다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리드에게 화내는 게 아니다.
그리드를 강제하는 상황을 만들어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살릴 수 있으면 살려야지. 내가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안 죽어도 될 사람을 왜 죽게 놔둡니까?”
두 눈을 게슴츠레 뜬 그리드가 혀를 내둘렀다.
스컹크가 그 모습을 보았다.
어느새 시야가 회복 된 것이다.
“어...?”
턱.
그리드에게 이끌려 지상에 안착한 스컹크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포악하게 날뛰고 있어야 할 악신들이 어째 잠잠했다.
그리드가 뻥 뚫린 천장을 가리켰다.
“이미 끝났습니다.”
“...!”
고개를 치켜든 스컹크가 입을 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꾸로 뒤집혀있던 신상들이 똑바로 서있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신상들을 구속하고 방향을 비틀어 놓았던 쇠사슬이 죄다 끊어져 있었다.
그리드가 손에 쥔 낙월검을 흔들어보였다.
“쇠사슬 베는 일쯤이야 껌이지.”
사실 0.001초 망설이긴 했다.
신상을 빌려 현현한 악신들은 하나 같이 펜릴처럼 튼튼해 보였으니까.
스킬 지정의 샌드백으로 삼기에 딱이었단 의미다.
하지만 당장 동료가 죽게 생겼는데 어쩌겠나.
펜릴이 있는 한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스킬 지정 놀이야 다음으로 미뤄도 됐지만 스컹크의 목숨은 귀중했다.
안 그래도 비전투 직업군이라 성장을 힘들어하는 그의 소중한 경험치를 그리드는 지켜주고 싶었다.
애초에 스컹크는 곁에 둬야한다.
방금처럼 위험을 쉽게 극복하기 위해선 스컹크의 지식과 정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굳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고.
“...왜 그렇게 인기가 많으신지 알 것 같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제가 좀 잘생기긴 했죠?”
“그게 아니라... 아, 아니, 못생기셨다는 게 아니라...”
“오해 안 합니다. 지슈카가 그러더라고. 가까이서 볼수록 더 잘생겼다고. 그래서 자꾸 키스하고 싶다나 뭐라나. 저를 주인공으로 염두에 두고 쓴 극본이 헐리우드에 범람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니까 뭐, 말 다했죠.”
“...”
멀거니 그리드를 바라보던 스컹크가 웃고 말았다.
신이 된 이후.
그리드는 사람들 앞에서 늘 성숙한 모습만 보여 왔다.
옛 성격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대중이 원하는 모습에 부응했다.
감히 가엾다고 생각했다.
막중한 책임에 짓눌린 그리드가 언젠간 자기 자신을 잃게 되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한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그리드는 여전히 그리드다.
다만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 됐을 뿐.
“이제 긴장 좀 풀렸습니까?”
“예.”
“그럼 다시 올라가죠.”
스컹크를 데리고 훌쩍 날아오른 그리드가 순식간에 다시 벼랑 위에 섰다.
벼랑과 벼랑 사이 공동에 평온히 잠든 신상들이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듯했다.
“아마 다른 공대들이 향한 미로에도 이런 공동이 하나씩 자리를 잡고 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낙오자가 발생하겠군요.”
공동을 뒤로하고 새로운 미로를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
스컹크는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정작 그리드는 태연했다.
뒤늦게 템빨단에 합류한 스컹크와 달리 그는 10년이 훌쩍 넘게 동료들과 함께해왔다.
이번 원정에 참가하지 못한 유라와 크라우젤을 제외한 동료들.
지슈카, 페이커, 레가스, 극검, 폰, 반트너, 토반, 라엘라, 제드노스, 유페미나, 코크, 이벨린, 크리스, 지발 등등.
동료들의 면면을 떠올리다가 반트너의 유독 반짝이는 대머리가 떠올라 실소한 그리드가 단언했다.
“사상자가 있을지언정 낙오자는 없을 겁니다.”
악신들이라.
무후총의 망령에게 신화를 빼앗기고 이름 잃은 인신들의 잔재에 불과했지만 아무튼 신은 신이다.
“다들 신격을 얻을 기회라고 도리어 기뻐하고 있겠죠. 상대 입장에선 무서울 정도로 집요하게 싸울 겁니다. 설령 죽어도 다시 도전하고, 또 다시 도전하면서.”
절대적인 믿음.
그리드는 템빨단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에 비해 부족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랑 비교했을 때의 평가다.
그리고 나보다 센 사람은 존재하기 힘들다.
초연한 절대자들과 드래곤조차도 나의 성장 속도에 매번 놀라곤 하는데 동료들이라고 무슨 수로 감당하겠나.
그리드가 보기에 동료들의 성장 속도는 충분히 빨랐다.
내 보폭에 맞추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해준 세월이 무색하지 않다.
“아무튼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겁니다.”
잠시 걸음을 멈춘 그리드가 스컹크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다른 사람 걱정하지 말고 본인만 신경 쓰세요. 걱정은 제가 하면 됩니다.”
“...”
세상 모든 걱정을 홀로 떠안기라도 하겠다는 기세.
터무니없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리드를 보면서, 스컹크는 그리드에게 조금이라도 더 보탬이 되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다.
다른 템빨단원들과 같은 전철을 밟는 것이다.
그리드가 더 많은 책임을 떠안을수록 그의 책임을 나누려는 사람은 늘어만 갔다.
인망.
템빨 못지않은 그리드 최대의 저력이었다.
***
“이런 게 갑자기 왜 튀어 나와?”
“이건... 우선 첫째로 벌레 먹은 열매 그림을 찾아야 합니다. 그 열매가 열린 나뭇가지에 앉은 조류의 왼쪽 눈에 아까 먹은 열쇠를 꽂고...”
거대한 모자이크.
여러 가지 빛깔의 돌, 색유리, 타일, 조가비 등의 조각을 맞춰 그림으로 표현한 거대한 예술작품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앞길을 가로막는 장벽이었다.
미로 중간에 불쑥 나타나 웅장한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현혹하는 이것은 물리적인 힘이나 마법으론 파괴가 불가능했다.
심지어 낙월검에도 베이지 않는, ‘퀘스트적 장치’인 것이다.
‘혼자 왔으면 여기서 막혔겠는데.’
모자이크의 규모가 너무 크다.
그나마 한 눈에 담을 수 있으면 그림을 수색하기 쉬웠을 텐데, 미로가 워낙 좁고 구불구불해서 시야각이 나오질 않았다.
비행 상태를 유지한 채 그림을 살펴보는 그리드 밑에서 스컹크가 말했다.
“아마 다른 공대원들도 이것과 비슷한 걸 마주하게 되겠죠.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동료들도 이 정도 문제는 풀 수 있을 겁니다.”
몇 년 전.
스컹크 탐험대 전체가 템빨단에 합류했다.
스컹크와 오랫동안 함께 활동해온 모험가들이 현재 각 공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든든합니다.”
함께할수록 신뢰가 쌓여간다.
걱정을 내려놓은 두 사람이 모자이크 관찰에 집중했다.
스컹크는 탐험가의 눈을 적극 활용했고 그리드는 높은 통찰력에 의존했다.
그리고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그림을 발견했다.
벌레 먹은 열매가 달린 나뭇가지 위.
각양각색의 새 4마리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2마리는 정면을 보았고 2마리는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4마리 전부 왼쪽 눈을 노출하고 있었기에 난감했다.
“어떤 새의 눈에다가 열쇠를 꽂아야 합니까?”
“음...”
스컹크가 4마리 새를 유심히 관찰했다. 4마리 전부 왼쪽 눈에 홈이 파여 있었다. 조금 전 확보했던 열쇠를 꽂으라고 유혹하듯이.
‘빨강, 초록, 파랑, 노랑, 자홍... 삼원색... 여기서 끝이 아닐 텐데?’
지식과 정보를 뒤지며 한참동안 궁리하던 스컹크가 이내 어떤 결론을 내렸다. 턱을 한껏 치켜들고 모자이크의 끝을 보았다.
4마리 새의 머리 위로 수십 미터 뻗어진 하늘이 그의 시야를 채웠다.
흰색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었다. 밝은 하늘색과 겹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 힘들 정도로 흐릿하게 그려졌다.
“저 새입니다. 저 새의 왼쪽 눈이요. 한데 나뭇가지에서 휴식하는 새가 아니라 하늘 높이 뜬 새라니... 이 결계의 형식은 다른 곳으로부터 무언가를 소환하는 구조를 띄는군요.”
“함정이라는 겁니까?”
“당할 수밖에 없는 함정입니다. 함정을 작동시켜야만 문이 열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탐험대도 전투력을 갖춰야하는 이유다.
세상엔 너무 많은 종류의 모험이 있었고 그중 상당수가 지금처럼 위험을 동반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도약했다. 스컹크였으면 클라이밍으로 간신히 도달했을 흰색 새의 왼쪽 눈에 열쇠구멍을 손쉽게 꽂아 넣었다.
동시에.
쿠르르르릉!!
모자이크의 그림이 변하기 시작했다.
모자이크를 이룬 타일들이 쪼개지고, 포개지고, 이어지길 반복하며 나무가 땅이 되고, 땅이 건물이 되고, 하늘이 멀어지는 등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나버렸다.
“...교황청?”
본래 숲이었던 모자이크의 그림에 익숙한 풍경이 담겼다.
숲길 끝에 우뚝 솟은 순백의 건물.
빛의 상징물이 곳곳에 장식 된 건물이었다.
현대의 교황청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지만 레베카교의 교황청이라는 사실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과거 시대의 교황청인 듯하군요...”
철컥, 철컥!
그리드와 스컹크가 살피는 동안에도 일부 타일은 계속해서 움직이는 중이다.
쪼개지고 뒤집히고 다시 이어지길 반복했다.
그에 따라 궁전의 입구처럼 높이 솟은 교황청의 정문이 서서히 열려갔다.
애니메이션을 보는 느낌.
“어...?”
그리드와 스컹크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급기야 활짝 열린 교황청 정문에서 일단의 무리가 걸어 나오는 모습을 발견한 까닭이다.
세 명의 소녀와 한 명의 사내였다.
사내는 성스러운 빛의 갑옷을 무장했고 소녀들은 레베카교의 삼신기를 무장했다.
과거 시대의 교황과 레베카의 딸들을 묘사한 그림인 것이다.
타일이 움직일 때마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들은 금세 그리드와 가까워졌다.
그리드가 그들의 정체를 눈치 챘다.
“크레이슐러...!”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유추하기 쉬웠다.
크레이슐러의 시신이 무후총에 묻혀있다고 산군이 알려줬었기에.
꽈르르르르르릉!!
크레이슐러의 그림이 끝내 사람 크기만큼 확대됐을 때.
모자이크가 무너졌다.
마리로즈를 봉인했던 초월자.
역사상 최강의 교황이 그림 바깥으로 성큼 걸어 나왔다.
활짝 펼친 손바닥에서 뽑아낸 빛의 성검이 그리드를 덮쳤다.
하지만 성검보다 빠르게 날아든 것이 있었으니.
퍼어어어어억!!
순백의 관이었다.
다짜고짜 날아와 크레이슐러를 짓뭉갠 관 위에 매혹적인 여인이 다리를 꼬고 걸터 앉았다.
“마리로즈...?”
누나가 왜 여기서 나와?
당황하는 그리드의 귓전에 누군가의 비명이 스며들었다.
-이런 미친! 이거 내 시체... 아아! 아무래도 좋다!! 마리로즈의 엉덩이만 있으면 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