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2권 - 3화
“천 년이요? 천 년은커녕 십 년도 안 지났습니다만...”
“뭐...?”
황당해서 불쑥 끼어든 스컹크.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눈치 챈 펜릴이 큰 충격을 받았다.
멈춰있는 심장이 쿵쾅쿵쾅 맥동하는 착각을 느낄 정도로.
긍정적인 의미의 흥분이었다.
그리드를 보면서다.
명성 높은 기재들도 천 년의 세월을 쌓아야 비로소 엿볼 만한 경지를 고작 몇 년 만에 완성시킨 사내.
그리드와 비교하면 뮐러며 크레이슐러의 이름이 우습게 여겨졌다.
반쯤 넋이 나가 있던 펜릴이 간신히 표정을 정돈하고 고개 숙였다.
“존경하오. 일족의 운명을 거머쥔 혈왕조차도 그대에겐 작은 역할 중 하나에 불과했구려.”
어머니 외의 존재에게 공대하는 날이 올 줄이야.
펜릴은 본인의 태도에 놀라면서도 수치심을 느끼진 않았다.
저절로 숙여진 고개는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 존경심에서 우러나온 행동.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마리로즈와 교접하지 않은 것도 그녀의 눈에 차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자가 거부한 것일 테지.’
커다란 수치심을 느꼈을 마리로즈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펜릴은 통쾌했다.
브라함처럼 그녀를 증오하는 건 아니었지만 좋아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아무튼 혈왕이 그대를 뜻하는 말 중 하나가 분명한 이상 나는 그대에게 거역하지 않겠소.”
펜릴이 베리아체, 마리로즈, 브라함과 대립해온 이유는 어머니의 복수를 거부해서다. 승산 없는 싸움에 일족의 생을 바쳐야한다는 걸 그는 납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그리드를 통해서 승산을 엿봤다.
그리드와 대립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당신의 실력을 인정한 뱀파이어 후작 ‘펜릴’이 적개심을 거둡니다. 대의 앞에 과거의 원한을 버린 그는 앞으로 최대한 당신에게 협조할 것입니다.]
그리드가 기대했던 상황이 찾아왔다.
말 몇 마디면 펜릴을 동료로 삼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리드는 조금 망설여졌다.
‘이대로 마무리 짓는 건 아쉬운데.’
시야 한편에서 점멸하고 있는 알림창이 그리드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이전 동작을 스킬로 지정하시겠습니까?]
<파혈극>
혈마법의 표적이 될 경우, 즉시 <낙월검>을 뽑아 <이십만대군 분쇄검>을 전개합니다.
혈마법을 파쇄하고 대상의 목을 베는 결과를 도출합니다.
*낙월검, 이십만대군 분쇄검과 재사용 대기 시간을 공유합니다.
절대자의 특성.
동작을 스킬로 지정할 수 있다.
스킬이 됐다고 해서 기존 동작의 위력이 상승하진 않았지만 편의성의 극대화라는 이점을 지녔다.
무기를 꺼내고 스킬을 전개하기까지의 과정을 수동으로 연계 할 필요 없이 명령값 하나로 즉시 실행하는 식이다. 전투에서 생기는 피로감을 완화해준다는 뜻.
‘거기에 추가로 ‘결과’가 저장되는 것 같기도...’
혈마법을 파쇄하고 대상의 목을 베는 결과를 도출합니다.
스킬 설명을 몇 번 더 곱씹어본 그리드는 조금 더 실험해볼 필요성을 느꼈다.
마침 펜릴은 몹시 튼튼한 대상이었고.
“말투가 거슬려.”
“...?”
“거역하지 않겠소?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듯하군.”
애초에 펜릴은 투쟁의 성질을 지닌 뱀파이어다.
확실히 교육시켜놓지 않으면 언젠가 반드시 반항심을 드러낼 터였다.
물론 펜릴은 억울했다.
“오해요. 내가 그대에게 불경을 저지를 이유가 하등 없다는 사실쯤이야 그대가 잘 알 텐데?”
“그대라는 호칭부터가 불경하다.”
“...큭!”
반박 할 말을 찾던 펜릴이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리드가 사방팔방으로 뻗친 갓 핸드들이 이 어딘지 알 수 없는 동굴의 기암괴석들을 파괴하고 있었다.
그리드의 신성이 정확히 어떤 형상을 지녔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계기였다.
황룡.
드래곤과 닮은 듯 다른 동방의 용이 그리드의 등 뒤에 떠올라 있었다.
그리드의 동작에 호응하듯 긴 몸을 뻗거나 똬리를 틀기를 반복했다. 종종 입을 벌릴 때면 무지막지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럴 수가...”
저래서야 드래곤의 기세와 다를 게 뭐지?
경악하는 펜릴을 실제로 <드래곤 피어>가 짓누르고 있었다.
조금 전 그리드의 의지로 행해진 수백 개 갓 핸드의 날뜀이 ‘공격 시 30퍼센트 확률로’ 발생하는 드래곤 피어를 발생시킨 여파다.
‘이 결과를 스킬로 지정하면 드래곤 피어를 원할 때마다 쓸 수 있는 건가?’
확률형 스킬을 확정 스킬로 만드는 것.
과연 가능할까.
그리드는 진지하게 궁리했다.
자신이 몰염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스킬 지정은 절대자의 권한.
상식 이상의 기적을 행사하는 게 오히려 당연하단 말이다.
[이전 동작을 스킬로 지정하시겠습니까?]
<신수난타(神手亂打)>
310개의 갓 핸드를 불시에 움직여 전 방위를 타격합니다.
추가 효과로 <드래곤 피어>가 발생합니다.
*드래곤 피어 스킬이 재사용 대기 시간일 땐 추가 효과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드래곤 피어의 발생 확률은 30프로로 높은 편이다. 갓 핸드로 310번을 공격하면 거의 무조건 발생한다고 봐야 옳다.
하지만 확률은 확률.
100퍼센트란 있을 수 없다.
한데 신수난타의 설명을 보면 드래곤 피어의 발생을 확정시하고 있었다.
‘이런 식이면.’
신수난타를 스킬로 지정한 뒤 갓 핸드용 보조 무기 하나를 뽑아 쥔 그리드가 단일 검무를 전개했다.
펜릴이 반응할 수 있도록 천천히.
그마저도 펜릴은 간신히 반응했고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견뎌냈다.
그리드가 휘두른 검이 탐욕이 아닌 평범한 흑철을 재료로 삼은 덕이 컸다.
메테오나 디스인티그레이트의 표적이 되는 불상사를 겪지 않아도 돼서 비교적 수월하게 생존했다.
“내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토록 잔인한 손속을...!”
<수혈>을 쓴 펜릴이 살(殺)에 뜯겨나간 왼팔을 즉시 재생시키며 외쳤다.
그리드가 손속에 자비를 뒀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눈치.
그리드는 조금 서운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집중했다.
극, 연, 파, 제, 위 등의 단일 검무를 연달아 천천히 전개했다.
<신장>이 발생할 때까지 반복했다.
끝내 펜릴이 궁극기 <부활의 수혈>을 쓰게 만들었을 무렵에.
[이전 동작을 스킬로 지정하시겠습니까?]
[이전 동작을 스킬로...]
[이전 동작을...]
...
..
<극-신장>
그리드의 검무 <극>을 전개합니다.
추가 효과로 <신장>이 발생합니다.
<연-신장>
그리드의 검무 <연>을 전개합니다.
추가 효과로 <신장>이 발생합니다.
...
..
그리드는 원하는 성과를 거뒀다.
어디까지나 단일 검무에 한해서였지만 신장의 100퍼센트 발생을 의도할 수 있게 됐다.
본래 페널티를 감수하고 <제4악>이라는 칭호를 얻어야 누릴 수 있었을 효과를 의도적으로 누리게 된 것이다.
‘이게 진짜 되네.’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그리드였으나 사람의 욕심엔 끝이 없는 법이다.
‘기왕이면 융합 검무와 신장의 조합까지 확보하고 싶다.’
무후총의 망령은 분명한 강적이었다.
그리드는 망령을 만나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스킬을 지정해두고 싶었다.
힐끔.
그리드가 덜덜 떠는 펜릴을 바라보았다.
부활의 수혈 덕분에 겉모습은 멀끔했지만 눈이 반쯤 죽어있었다.
사색이 된 모습이 반쯤 미치기 직전 같았다.
‘여기서 더 했다간 망가질 수도 있겠어.’
펜릴 입장에선 이유도 모른 채 학대를 당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예전에 자신을 죽였던 놈에게, 원한을 뒤로하고 먼저 존경과 호의를 보였음에도.
극한까지 몰린 것이다.
결국 아쉬움을 달랜 그리드가 검을 거뒀다.
“이만 쉬어라. 조만간 또 부르도록 하지.”
“대체... 대체 왜 이렇게까지...”
“말이 점점 짧아지는 거 같은데.”
“크윽...!”
경기를 일으키며 입을 다문 펜릴이 핏물로 돌아갔다. 그리드가 두르고 있는 망토로 순식간에 스며들었다.
부활의 수혈의 쿨타임이 돌아오기까지 부디 푹 쉬길.
펜릴을 배웅해준 그리드가 문득 스컹크와 시선이 마주쳤다.
귀신을 보는 듯한 눈.
얼굴이 파랗게 질린 꼴이 진짜 맹수를 마주친 스컹크 같았다. 혹시 항문에서 악취를 풍기진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잠시 뭘 실험하느라 그런 거지 악의적으로 괴롭힌 게 아닙니다. 제 인성 아시잖습니까?”
“예, 당연히 알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것 같은데.’
분위기 환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차였다.
[유일신 그리드...]
[당신의 위대한 신화가 이 무덤에 묻히리...]
진동이 울린다 싶더니 동굴 저편에서 토병들이 다가왔다.
하나 같이 키가 2미터에 이르는 병사들.
흙을 구워 만든 몸이 단단해 보였다. 속이 꽉 차있는 느낌.
‘실제로 도검불침을 패시브로 장착했다지.’
아그너스가 준 정보를 떠올린 그리드가 앞장섰다.
“들어갑시다.”
“예...”
스컹크가 당황했다.
성큼성큼 걸어 토병들에게 다가가는 그리드가 끝까지 무기를 뽑지 않은 탓이다.
물론 스컹크는 그리드를 믿었지만 그리드의 저력은 템빨에 있다.
무기가 없는 그리드는 필연적으로 약해진다는 뜻인데 굳이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
콰쾅! 쿠콰콰콰쾅!!
“...”
스컹크의 의문이 눈 녹듯 사라졌다.
수백 개의 갓 핸드가 사방팔방으로 펼쳐지며 토병들을 박살내는 광경을 보면서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천수관음을 목도한 기분이었다.
‘정녕 신과 같구나.’
두려움을 벗어던진 스컹크가 발걸음을 서둘러 그리드에게 따라붙는 그때.
‘이거 진짜 편하네.’
신수난타를 반복 사용하며 토병들을 싹 쓸어버린 그리드는 흡족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갓 핸드를 단지 확장 전개할 뿐인 신수난타엔 당연히 쿨타임이 없었다.
몇 번이고 사용하는 게 가능했다.
굳이 한 가지 단점을 뽑자면 디스인티그레이트와 메테오가 발동하지 않는다는 점.
갓 핸드가 병장기가 아닌 그리드의 손. 즉, 신체의 일부로 판정 받기 때문이다.
그리드는 전혀 아쉽지 않았다.
갓 핸드에 탐욕으로 만든 무기를 쥐어주면 마법을 떨어뜨리는 일쯤이야 간단히 해결됐기에.
애초에 갓 핸드를 병기화 시켜선 안 된다.
갓 핸드가 그리드의 손 판정을 받기 때문에 생기는 이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갓 핸드로 물건을 다루고 아이템을 제작하는 등의 수작업이 가능한 이유는 순전히 그것이 그리드의 손인 덕분이었다.
“저건...?”
그리드와 스컹크의 발걸음이 멈췄다.
미로 중간.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도사린 공동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무언가가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처음엔 거대한 토병들인가 싶었는데 신상이다.
한때 누군가가 숭배했을 인신들의 모습을 조각한 신상들.
그것들이 두꺼운 철사에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놈들 내 신상도 뒤집어 놓고 다녔다고 했지?’
대체 뭘 하는 거지?
그리드의 의문을 스컹크가 해소시켜주었다.
<탐험가의 눈>과 각종 지식에서 비롯된 스킬을 전개해서 상황을 파악했다.
“신성의 반전... 기존의 인과를 거꾸로 뒤집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인과를 뒤집는다?”
“본질을 바꿔버리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저것들은 악신의 상징이나 다름이 없...”
순간.
번쩍!
거꾸로 매달린 신상들이 눈을 떴다. 소름 돋을 만큼 기괴한 미소를 지은 채다.
쿠콰콰콰콰쾅!!
신상들이 쩍 벌린 입에서 토해낸 새카만 마기가 일대를 집어삼켰다.
스컹크의 시야가 암전됐고 그리드의 신성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