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2권 - 2화
펜릴은 죽음을 기억한다.
자신의 죽음.
그날.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끝에 추방당했던 미치광이 브라함이 인간들과 손을 잡고 침략해왔다.
앞서 보낸 별동대(?)로 하치카를 암살하는 등 온갖 비열한 수작을 부리는 놈을 나는 감당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혈왕 후보 그리드의 무력이 굉장히 탁월했었고.
‘...그래, 나는 분명히 죽었다.’
과거형이 아닌 이유.
뛰지 않는 심장을 느껴서다.
혈액의 흐름을 순전히 마력으로 조율해야만 했다.
현재 펜릴은 ‘소멸하지 않은 영혼’에 의지해 육신과 의식의 형체를 깨운 상태. 굳이 비교하면 생전의 모습을 한 리치에 가까웠다.
그의 영혼이 소멸하지 않은 원인은 단순했다.
태생적으로 타고난 축복이다.
태초의 3악 중 하나였던 어머니의 피를 이은 직계들의 영혼은 견고하기에.
죽어도 영혼을 유지한 채 부활의 조건을 일부 충족한다.
지금처럼.
“가만... 이제 보니 핏덩어리 네놈, 나뿐만 아니라 ‘우리’ 전부를 잠에서 깨웠구나.”
흥분을 가라앉힌 펜릴이 감지했다.
루쏜, 티라멧, 라티나, 크레이, 에티마, 엘핀스톤...
형제들의 기척이 사방팔방에서 느껴졌다.
어딘지 모를 이 어두운 미로의 곳곳에서 형제들이 실시간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꼴로 전락한 채로.
불길한 기운을 몸에 두른 눈앞의 혈왕에게 모조리 살해당한 뒤 재차 눈을 뜬 듯했다.
“끝내 우리 일족을 손아귀에 넣고 혈왕의 의무를 이행할 속셈이냐? 너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어머니의 복수를 한답시고 지옥 원정에 나서 우리 일족의 맥을 끊어버릴 작정이냐...!”
펜릴은 베리아체가 제 목숨을 바쳐 마리로즈를 낳게 만든 원흉이다.
혈왕이 되어 어머니의 복수를 도와야한다는 의무를 타고나 ‘지배’와 ‘투쟁’이라는 가장 강력한 권능을 얻고도 의무를 거부했다.
복수 따위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이미 지난 일에 집착하느니 미래를 보는 것이 옳다고 펜릴은 주장해왔다.
브라함의 말을 빌리면 겁쟁이의 핑계다.
브라함은 나태의 저주를 이유로 현재마저 태업하는 놈이 감히 미래를 논하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펜릴을 한심한 병신 취급하며 증오했다.
반면 그리드는 펜릴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직계들이 제 삶을 복수에 바치는 순간.
베리아체가 그들을 낳은 이유는 순전히 복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함이었음을 증명하는 꼴밖에 안 됐으니까.
어쩌면 펜릴은 그게 싫었던 게 아닐까.
형제들을 아끼는 마음도 진심 같았고.
물론 제 목숨이 가장 소중한 눈치였지만, 그건 대부분의 사람도 똑같다.
“지옥엔 괴력난신 천지다. 네가 지상에서 격살해온 대악마들은 문젯거리도 아니야. 지옥엔 여태껏 지상을 침략해온 대악마보다 훨씬 더 강력한 대악마가 득실거릴뿐더러 바알이라는 돌연변이가 대악마 이상의 괴물을 은밀히 만들어 놨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곳을 침략해봤자 자살 행위밖에 안 돼.”
꽈드득!
펜릴이 이를 갈았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말을 멈추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리드의 태생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한 것이다.
자신이 잘만 설득하면 그리드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을 골랐다.
“...일단 좀 맞자. 나중에 비겁하게 변명하지 말고 어서 브라함을 불러라. 설득할 시간에 너희 두 놈을 함께 요절을 낸 뒤에 명령하는 편이 빠를 듯하다.”
기껏 고른 말이 투쟁의 권능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 문제지.
펜릴의 인내심은 종종 빠르게 바닥난다. 싸우려는 기질을 쉽게 드러냈다.
만약 마리로즈가 나태의 저주를 극복했었다면.
하여 진지하게 지옥 원정을 논했다면 펜릴은 마리로즈와도 대립했을 것이다.
아무튼.
‘승산은 충분하다.’
펜릴은 자신이 그리드를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근거는 무려 3개다.
첫째.
과거에 자신이 그리드에게 패배했던 이유는 수적 열세 때문이었다는 점.
만약 1대1로 싸웠다면 절대로 패배하지 않았을 거라고 자부했다.
지극히 당연한 추측이다.
베리아체의 자식 중 두 번째로 고강한 자신이 일개 인간에게 패배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기에.
둘째.
지금의 자신은 과거보다 훨씬 더 고강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력과 혈액의 질이 몇 배는 강력해졌다.
셋째.
그리드에게서 마리로즈의 흔적이 느껴지질 않는다.
아직 마리로즈에게 착취당하기 전이라는 증거.
그리드가 모종의 이유로 교접을 거부한 건지, 마리로즈가 그리드를 거부한 건지.
전후사정은 모른다.
‘단순히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은 걸 수도.’
죽은 뒤의 기억이 없다.
지금이 내가 죽은 후 몇 년이 지난 후일지, 고작 몇 시간이 지난 후일지 알 수 없단 뜻이다.
아무튼 그리드가 마리로즈의 종이 되지 않았다는 건 펜릴에게 희소식이었다.
그리드가 위험에 빠졌을 때 마리로즈가 불쑥 나타날 일은 없을 거란 뜻이었기에.
현 상황에서 펜릴이 그리드를 상대로 경계하는 건 딱 하나였다.
정체불명의 주황색 기운.
본능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였다.
어떻게 봐도 신성력이다.
삼신교 교인들의 신성력과는 결이 달랐으니 필시 어떤 잡신의 신성이리라.
‘어떤 인신과 계약이라도 맺은 건가.’
신의 사도가 되면 신의 권능 일부를 사용할 수 있으니 탐낼 만하다.
‘잡신의 권능이라고 해봤자 하찮을 테지만.’
스르륵.
펜릴이 마력의 운용을 가속시켰다.
체내의 혈액을 끄집어내 갑옷으로 두르는 한편 마법의 전조를 일으켰다.
“히이익...”
스컹크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꿈결 같았다.
무후총에 입장한 이후.
템빨단은 십공신을 대장으로 삼는 공대 10개를 조직해 뿔뿔이 흩어졌다.
미로가 워낙 거대해서 이용할 수 있는 통로도 많았다.
어느새 현장엔 그리드와 스컹크 단 둘만 남아있었다.
무후총.
시스템이 드래곤 레어만큼이나 위험하다고 판정한 이곳에 단 둘만 말이다.
아무리 그리드와 함께여도 솔직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펜릴이라는 거물이 나타난 것이다.
마리로즈를 제외한 직계 중 최강을 논했던 뱀파이어.
지금보다 키가 큰 브라함이 비쩍 마르고 살기등등한 표정을 지으면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브라함과 닮은 펜릴의 기세는 몹시 흉흉했다.
유일신이 된 그리드를 상대로 전혀 위축되지 않는 걸 보아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보였다.
스아아아악!
풍경이 붉게 덧칠되어 간다.
펜릴이 내뿜는 혈무였다.
원한, 증오, 살의가 내재되어 있었다.
펜릴과 그리드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봐도 펜릴의 그리드를 향한 적의를 명확히 인지할 수준으로 짙은 감정선이 피를 매개로 표출됐다.
“끝내 브라함을 부르지 않는군. 아니, 못 부르는 건가? 네놈이 마리로즈와 교접하지 못한 이유와 어떤 관련이 있는 거겠지... 뭐, 되었다. 스스로의 무능을 원망하며 죽어라.”
콰드드드득!
급기야 현장 전체를 물들인 혈무가 온갖 무구의 형상을 갖춰갔다.
혈마법으로 구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마법을 동시에 발생시킨 것에 가까웠다.
펜릴은 어째선지 강력해진 자신의 힘을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그리드를 무시하진 않았기에 조금의 방심도 없었다.
쩌어어어어어엉!!
음속을 가볍게 돌파하는 무구의 쇄도.
과연 그리드는 섣불리 반응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마법의 발생과 격발이 원체 빨라 대비책을 떠올리지 못하고 굳어버렸으니.
심지어 검조차 뽑아들지 못하는 그를 보며 펜릴은 의외로 허무한 승리를 장담했다.
‘내가 너무 강해졌나.’
아마 나는 죽음을 겪을수록 고강해지는 기질을 타고난 거겠지.
어머니의 안배일 것이다.
지옥에서 겪게 될 온갖 시련을 극복하며 복수를 완수하라고 숨겨진 힘을 주신 걸 거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지옥에 갈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재차 다짐한 펜릴이 슬그머니 등을 돌렸다.
곧 들려올 그리드의 비명소리를 기다리면서.
이 어딘지 모를 곳을 떠나 안식처로 돌아갈 계획을 짰다.
“...”
펜릴의 두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등 뒤에서 죽어가고 있어야 할 그리드가 멀쩡한 모습으로 눈앞에 서있었기에.
“순보인가... 그래 네놈, 전설이면서도 초월자였지.”
하긴, 비열한 브라함의 도움을 받았다곤 하나 나를 죽였던 놈이다.
초월의 격 따위야 기본일 터.
쿠콰콰콰콱!!
펜릴이 귀찮다는 듯이 털어낸 손의 방향을 쫓아 혈액이 격류를 일으켰다. 그리드를 전 방위에서 덮쳤다. 시야를 차단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단 한 수로 순보의 사용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리드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마리로즈 바로 다음가는 재능이란 말이지.’
최근 수색, 구조 중인 인신들보다 도리어 뛰어난 재능.
펜릴은 현재 망령의 버프를 받아 200레벨이 올랐다는 점을 고려해도 엄청난 인재였다. 반드시 부하로 삼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펜릴은 투쟁과 지배라는 권능을 타고난 존재.
제 어머니를 상대로도 투쟁한 끝에 결과적으로 베리아체를 죽게 만들었다.
단순히 힘으로 굴복시킬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리드는 좋은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기회를 맞이했다.
무후총의 망령에 의해 급격히 강화 된 펜릴.
여태껏 없던 자신감을 품은 녀석을 압도적으로 제압한다면?
서걱.
“...?”
출처를 알 수 없는 절삭임이 펜릴의 귓전에 스며들었다.
그의 조금 커진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는 혈빛이 한 발 늦게 반으로 갈라졌다.
‘뭐지?’
의문이 입 안에서 맴돈다.
의지와 달리 기울어진 펜릴의 시야는 급격히 하강하고 있었다.
그리드의 손에 쥐어져 있는 <낙월검>을 볼 수 있을 때까지.
“...!”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펜릴이 다급히 <탈각>을 전개했다.
머리를 잃은 육신을 반으로 갈라 그 안에서 새로운 육신을 끄집어냈다. 온전한 육신이었다.
“네놈...!”
기껏 회복하고도 펜릴은 뒷걸음쳤다.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그리드에게 감히 저항할 엄두를 못 냈다. 너울거리는 신성을 두려워했다.
그리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옥 원정이라면 걱정 마라. 베리아체의 복수와 무관하게 제법 수월하게 진행 중이니까.”
“...!”
펜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머릿속에 그려진 광경 때문이다.
그리드가 바알을 베는 광경이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아니, 근거라면 있다.
방금 막 체험한 그리드의 무력.
펜릴이 침음했다.
“천 년... 천 년쯤 지난 건가?”
한 명의 인간이 이만한 괴물로 성장한 것이다.
수백 단위로는 부족하다.
하여 펜릴에게도 까마득한 천 년을 불렀다.
한낱 인간의 몸으로 그 긴 세월을 견뎌낸 그리드를 저절로 공경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