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1권 - 18화
“무지막지하게 거대하군. 상상 이상이야.”
라인하르트의 중앙 광장은 거국적인 행사나 황제가 연설할 때 주로 사용되는 장소였다.
이론적으로 수백만의 인파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란 말이다.
그 광장을 가득 채우는 ‘무대’의 크기는 당연히 엄청났다.
무대 위에 도시를 건설하는 게 가능할 정도로.
“이만한 무대를 단시일 내에 만들면서 측량에 오차조차 없다니. 과연 전설은 전설이라는 건가...”
라드볼프 형제.
지혜로운 거인족의 생존자이자 지혜의 탑의 결사로 명망 높은 그들이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순백의 석재를 켜켜이 쌓아 만든 무대의 가치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케를 옹이 고개를 조아렸다.
“제국의 자원이 풍족하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무엇보다 마법사들과 장인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대개 드워프는 오만한 난쟁이라고 불린다.
하물며 전설이 된 케를 옹의 콧대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하지만 라드볼프 형제 앞에선 겸손했다.
멸망한 고대의 거인족이 남긴 기술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종족이 드워프니까. 저절로 공경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는 고백이 사실이기도 했다.
케를 옹의 요구에 맞춰 석재를 세공한 석공들, 석재를 견고하게 강화시켜준 마법사들, 완성 된 석재를 케를 옹의 설계대로 조립한 건축가들 등등.
템빨제국의 무수히 많은 인재들이 힘을 보태주지 않았다면 케를 옹은 시일 내에 무대를 완성하지 못했다.
“호오, 이건... 장인들의 염원이 만든 기적인가?”
“혹은 피아로와 가리온 신의 수법일 수도 있겠지.”
라드볼프 형제의 감탄이 거듭됐다.
인공적인 지맥이 무대를 감싸고 있음을 느낀 까닭이다.
“이건 순전히 토지라고 봐야 옳다.”
“확실히 그렇군. 그리드 님께서 굳이 이 무대에 집착하시는 이유를 알겠다.”
라드볼프 형제는 이제 사적인 자리에서도 그리드를 공대했다.
굳이 신이나 황제라는 칭호를 붙이진 않았다.
유일한 존재이기에.
그리드라는 이름 자체가 모든 칭호를 초월하는 가치를 지녔다.
“움직이는 요새를 건설하기에 이만한 발판도 없겠지.”
단순한 전함을 뛰어넘는 시설.
이 무대는 탐욕을 동력으로 삼는 요새 도시로 거듭날 것이다.
수십만의 인력을 수용하며 수만 개의 포문과 병기를 운용하는.
“다만 문제는 탐욕이 이만한 질량을 움직이는 게 정녕 가능할까 인데...”
라드볼프가 그리드에게 꾸준히 보냈던 비행정의 도안은 질량에 제한을 뒀었다.
탐욕의 한계를 고려했다.
라드볼프는 탐욕의 강점을 떠올려보았다.
스스로의 판단 하에, 혹은 그리드의 명령대로 움직인다는 점과 증식한다는 점. 그리고 무한한 내구성.
딱 거기까지였다.
필시 대단하긴 했지만 도시 하나를 통째로 들고 움직이는 저력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설령 가능하더라도 필연적으로 느려질 거다.’
지난 날 그리드의 전투를 재차 복기해 봐도 탐욕의 속도는 초월자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태산을 들어 올렸다거나 하는 등의 괴력을 선보인 적도 없다.
‘그리드 님은 혹시 마나 엔진에 의지하실 생각인 건가?’
만약 그렇다면 오판이다.
이만한 질량을 기준치에 맞는 속도로 움직이기 위해선 마장기에 사용되는 엔진을 최소 10만개 이상 설치해야 한다.
그마저도 탐욕의 도움을 받는다는 가정이 붙었다.
10만 개의 엔진을 만드는 건 문제가 아니다. 시간과 자원만 있으면 해결 됐다.
엔진에 마나를 꾸준히 공급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지.
‘최소 5만 명의 마법사를 24시간 혹사시켜야 엔진의 출력을 유지 가능한데...’
템빨제국의 인선을 고려하면 그조차도 가능한 일일 것이다.
마법사들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고 노예처럼 부린다는 전제 하에.
“음?”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라드볼프의 시선이 문득 한 곳에 꽂혔다.
그의 시선을 끈 것은 템빨신전 입구에 서있는 그리드의 신상이었다.
키가 2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신상의 등 뒤로 그리드를 상징하는 신물 갓 핸드가 재현되어 있었다.
흑금색의 금속 재질로.
“...저건 진짜 탐욕이군?”
“맞습니다. 폐하의 신상마다 10개씩의 갓 핸드를 재현하는 식으로 탐욕이 활용되고 있지요.”
“확실히 수량에는 여유가 있나보군...”
그리드의 신상은 라인하르트에만 21개가 있었다.
8개의 외성문에 각 2개씩, 3개의 템빨신전에 각 1개씩, 궁전 입구에 또 2개가.
단순한 장식품으로 낭비되는 갓 핸드의 숫자가 무려 210개라는 뜻이다.
광룡철에서 추출한 증식의 권능 덕분에 가능한 사치다.
그래, 사치.
라드볼프는 그리드의 신상 주변을 맴도는 갓 핸드들을 단순한 장식품쯤으로 여겼다.
탐욕의 성질이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는 거라지만 그리드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도 기능할 거라고 생각하긴 힘든 것이다.
실상은 달랐다.
스르륵.
그리드의 신상마다 맴도는 갓 핸드들은 온전히 기능하고 있었다.
신상 근처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예의주시하며 실시간으로 반응했다.
방금 증명 됐다.
꽃바구니를 들고 뛰어가던 소녀가 넘어지려하는 순간 날아간 하나의 갓 핸드가 소녀를 지탱해주지 않았나.
“...저런 미친.”
“초월자의 속도군. 저 속도에 힘까지 실리면 경천동지할 위력을 발휘하겠지.”
라드볼프는 너무 놀란 나머지 욕설을 토하는 반면 프론잘츠는 흐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평가했다.
오직 연구에만 매진하며 학자에 가까운 형제와 달리 2좌 프론잘츠는 하야테의 책사 역할을 담당하며 탑의 운영을 책임진다. 매사에 반응이 신중했다.
“저쯤 되는 게 수만 개 모인다면 도시의 동력으로 충분하겠어. 아닌가?”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어디까지나 구조적인 도움을 받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케를이 라드볼프의 눈치를 살피며 답했다.
구조.
탐욕의 힘이 최대치로 발휘되고 효율적으로 쓰이게끔 비행정을 설계해야 한다고 감히 의견을 낸 것이다. 눈치를 보는 게 당연했다.
“흐음...”
라드볼프는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설의 의견은 존중 받아 마땅했기에.
턱을 괸 채 한참을 고민해보던 그가 입을 뗐다.
“케를 자네, 오늘부터 잠 잘 생각 말게.”
“...옙!!”
케를 옹이 힘차게 대답했다. 이젠 기억도 희미한 젊은 시절의 감각으로 외쳤다. 기합이 바짝 들어가서 누구에게나 옹(翁)이라고 불리는 나이가 무색해졌다.
그리고 한 발 늦게 후회했다.
지난 나흘 동안 한 숨도 못 자고 노동해온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여기서 더 잠을 못 자면... 나이를 감안해서 위험한 거 아닌가 싶었다.
물론 찰나뿐인 걱정이었다.
‘...설령 쓰러져도 괜찮다.’
지혜로운 거인족과의 합작.
어마어마한 공부가 될 터인데 이 기회를 어찌 놓치겠나.
***
“차원의 틈새라. 무저갱 말고도 여러 곳이군요.”
“셀 수 없이 많지.”
브라함은 스컹크의 분석과 후회의 신의 증언을 토대로 뮐러의 위치를 특정하는데 성공했다.
마법과 지혜의 신의 권능이 발현 된 것 같기도 했다.
“그중 한 곳을 너도 예전에 가봤었고.”
“아...”
언젠가 알 수 없는 새카만 공간에 떨어졌던 경험이 있다.
그때 느꼈던 몹시 불쾌한 감각을 떠올리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그리드였다.
브라함이 물었다.
“직접 나설 것이냐?”
뮐러.
역대 최강의 검성이자 초월의 경지를 수백 년 전에 이룬 인물이다.
무신 치우의 관심을 산 인물이기도 했다.
산군 그레니어와 교황 크레이슐러, 그리고 대마법사 시절의 브라함이 그의 위대함을 몇 번이나 증언해왔다.
그리드 또한 뮐러에게 자연히 흥미를 품었다. 꼭 만나보고 싶었다.
“아니요.”
하지만 직접 수고를 할 정도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러냐.”
망설임 없는 거절.
브라함은 예상했다는 눈치다.
제아무리 뮐러가 대단하다 한들 지금의 그리드보단 당연히 아래였으니까.
그리드가 친히 찾아가기엔 위계가 맞지 않았다.
게다가 현재 라인하르트엔 뮐러와의 만남에 적합한 인물이 따로 존재했다.
“그럼 네 친구 놈을 보내도록 하지.”
***
크라우젤을 통해서 소나무나 대나무를 연상하는 사람이 많다.
어떤 풍파를 겪을지언정 끝내 푸르고 올곧았으니까.
괴팍한 폭풍처럼 시시각각 변모하는 그리드와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더 그리드와 잘 어울리는 걸 수도 있었다.
브라함 또한 크라우젤이 썩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그리드의 벗이기에.
그리드가 의지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크라우젤이라는 사실을 브라함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뮐러의 행방을 찾았다.”
크라우젤의 시간은 낭비되는 법이 없다.
반드시 검을 휘두르거나 호흡을 고르며 스스로를 끝없이 단련시켰다.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활력을 되찾은 사람들이 도시를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몇 안 되는 조용한 장소에 자리를 잡은 그는 온갖 방법으로 스스로를 연마했다. 무형지기와 검기를 동시에 운영하여 충돌시킨 뒤 발생하는 파동을 회피하는 몸놀림이 무척 탁월했다.
“숨죽이고 있던 수백 년의 세월이 당신 앞에선 무색한 것이군요.”
“후회의 신이 준 힌트가 너무 컸다. 나 혼자였다면 찾아내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거야.”
차원의 틈새에 틀어박힌 놈을 무슨 수로 찾아냈겠나...
솔직하게 고백하는 브라함의 태도가 크라우젤은 조금 낯설었다.
“그리드는 네가 뮐러를 만나길 바라더군.”
“제가 말입니까...”
당장 필요한 건 뮐러에게 의욕을 불어넣는 것이다.
최강이라고 자처하는 건 오만이다.
당신보다 강한 내가 이렇게 버젓이 존재한다...
뮐러가 삶에 대한 의욕을 되찾게 만들어주기 위해선 힘으로 찍어 누를 필요가 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지목 받은 크라우젤은 난감함을 느꼈다.
“너는 신을 베었다. 한데 자신이 뮐러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나?”
“제가 신을 벨 수 있었던 건 그리드의 황혼 덕분이었지요.”
“...흥, 자신 없으면 관둬라.”
브라함이 설득을 관뒀다.
이쯤 말했는데도 내켜하지 않는다면 보내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크라우젤이 대뜸 말했다.
“자신 없다고는 안 했습니다.”
크라우젤은 굳이 힘든 길을 걸어왔다.
검성이라는 클래스에 의존하지 않고 보다 다양한 기술을 학습했으며 이를 토대로 자신만의 검술을 구축했다.
그 검술들 중 ‘스킬’로 분류된 것은 크라우젤이 <검술 창조>를 소모해서 만든 일부에 불과했지만, 나머지 배움이 무용했던 것은 아니다.
스킬로 분류되지 않은 기술들은 모두 단단한 기본기가 되어서 크라우젤을 지탱해주고 있었다. 크라우젤이 온갖 종류의 위험을 컨트롤로 무마할 수 있는 근간이었다.
게다가 크라우젤은 뮐러의 비급까지 손에 넣은 상태다.
의욕을 잃은 탓에 과거보다 발전하지 않고 멈춰있을 뮐러와 비교해서 자신이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압도적으로 승리할 거란 장담은 없지만, 못해도 자극할 수준은 된다고 자부합니다.”
그리드는 이미 오래 전에 파그마를 초월했다.
유라 또한 알렉스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듣기 시작했다.
“제가 가도록 하죠.”
전대를 초월하는 건 당대의 당연한 의무였고 크라우젤에겐 지금이 적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