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1권 - 17화
Satisfy는 중복 닉네임을 허용한다.
회원 숫자가 20억 명을 초과하는 마당에 허용하지 않으면 무슨 수로 감당하겠나?
닉네임 만들다가 포기하고 항의하는 사람들이 즐비했을 텐데.
[유일신을 제외한 플레이어는 더 이상 ‘그리드’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
쉬지 않고 떠드는 인파 탓에 소란스럽던 도시가 일순 고요해졌다.
입을 다문 사람들의 표정이 충격으로 물든 상태다.
그리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이다.
그를 동경해서 같은 이름으로 캐릭터를 생성한 플레이어는 발에 치일 정도로 많았다.
당장 라인하르트에 모인 인파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수준.
한데 앞으론 사용하지 못한다고?
무슨 수로 감당하려고?
애초에 어떤 방법으로 통제를...
“힉!”
“아, 안 돼...!”
의아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된 비명이 속출했다.
낯빛이 창백해진 사람들이 있다.
자연히 이목을 끈 그들의 머리 위로 떠오른 이름들이 하나 같이 특이했다.
주민405159
주민117995
주민680022
등등.
방금 전까지 ‘그리드’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사람들이 이 순간 강제로 이름을 박탈당한 것이다...
“이게 뭐야! 앞으로 어디 갈 때마다 주민879246라고 불리는 거냐고!!”
“엑스트라냐...”
“아, 안 돼...! 얀페이랑 호감도 가득 채워서 이제 프러포즈할 일만 남았는데! 다이아몬드 반지 살 돈만 모으면 되는 거였는데!! 주민595977이라는 이름으로 프러포즈 해봤자 거절당할 게 뻔하잖아!!”
“얀페이? 해일거리에 있는 동방불패 식당의 젊은 여사장?”
“어...? 맞소만? 당신이 그녀를 어찌 아는 거요?”
“그 아가씨 한 달에 한 번 꼴로 청혼 받는 거로 유명하거든. 얀페이한테 선물 바치다가 재산 거덜 난 호구... 흠흠, 초보가 한둘이 아니라는 이야길 듣긴 했는데 설마 실물로 볼 줄은 몰랐네.”
“헛소리하지 마! 무슨 원한으로 그녀를 음해하는 거냐!”
“얀페이를 음해하는 게 아니라 당신을 비웃는 거지. 얀페이랑 호감도 채우는 동안 손이라도 한 번 잡아봤어?”
“어...? 어어?”
“하는 짓이랑 이름이 잘 어울리누.”
난리가 났다.
곳곳에서 흉흉한 기세가 일어난 탓에 쥬드와 치안대가 바빠졌다.
“대장! 대장은 나서지 마쇼!”
치안대원 중 일부가 바쁜 와중에도 쥬드를 붙잡아 말렸다.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을 순 없는 노릇이다.
힘 조절을 못하는 쥬드가 사람들에게 필요 이상의 상해를 입힐까봐 염려하는 것이다.
매번 배상금을 물어주느라 가난한 쥬드였다...
“...?”
치안대원들이 쥬드를 채 진정시키기도 전에.
문득 소란이 잦아들었다.
누군가 특별히 나선 것도 아닌데 난리를 치던 사람들이 스스로 잠잠해졌다.
불만이 어느 정도 해소됐으니까.
[<이름 변경권>이 지급됩니다.]
<이름 변경권>
사용 시 원하는 이름으로 개명합니다.
일부 이름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거래 불가
온라인 게임에서 닉네임 변경권은 비교적 흔한 아이템이다.
보통 스킨과 함께 유료로 판매하여 게임사의 실적에 큰 도움을 줬다.
하지만 Satisfy는 몰입의 저하를 핑계로 유료 아이템의 판매를 꺼려왔다.
수많은 사람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닉네임 변경권의 출시는 언급조차 안 했었다.
주주들을 환장하게 만드는 태도였다.
주주들은 뻔히 캐시카우가 될 상품을 외면하는 S.A그룹의 태도를 쓸데없는 고집이라고 맹렬히 비난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꼼짝도 않던 S.A그룹이 오늘.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닉네임 변경권을 내놓은 것이다.
비록 일부에게 무료로 배포한 것이긴 했지만 희소식이었다.
언제라도 유료 상품으로 출시할 수 있게끔 준비해놨다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기에.
실제로 S.A그룹의 주가가 실시간으로 상승했다.
하지만 주주들보다 기뻐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던전 마스터 포식이불족발이다.
‘이름을... 바꿀 수 있게 된다!’
제발, 부디 빠른 시일 내에 일반에도 배포되기를...
닉네임 변경권을 사용해서 새로운 이름을 얻기 시작한 플레이어들의 모습을 포식이불족발이 부럽게 지켜보는 가운데.
“휴...”
그리드는 안도하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사람들의 이름을 통제해서 비난을 받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분위기가 금방 진정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주민000000’라는 이름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새로운 소란이 발생했지만... 거기까진 그리드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유일신은 절대자의 범주에 속합니다.]
[전투 시 <절대자의 영역>을 생성합니다.]
<절대자의 영역>
당신보다 위계가 낮은 대상과 비교해서 무조건 빠르게 움직입니다.
당신보다 위계가 낮은 대상의 공격을 높은 확률로 무력화시킵니다.
당신보다 위계가 낮은 대상에게 공격을 쉽게 명중시킵니다.
단, 시간이 지날수록 효과가 약해집니다.
[절대자를 제약하는 개념은 존재하기 힘듭니다.]
[생명력을 제외한 자원에 한도가 없습니다.]
[특수 자원 <투기>가 항상 최대치로 유지됩니다.]
[절대자의 의지는 세계의 법칙이 됩니다.]
[당신의 행동이 곧 스킬입니다.]
[절대자 공통 권능 <스킬 지정>이 생성됩니다.]
<스킬 지정>
특정 동작을 스킬로 분류해서 저장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순간을 원할 때 언제든지 재현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횟수 제한 없음
[금(金)의 성역이 궁극의 형태로 진화합니다. 당신이 세우는 금속의 협곡이 <탐욕>을 재질로 삼게 됩니다.]
[당신의 아이템 <탐욕>을 기반으로 새로운 권능 <무해>가 생성됩니다.]
<무해>
치명적인 공격일수록 당신에겐 무해합니다.
당신의 신체에 결손이 생길 경우 <탐욕>이 즉시 결손 된 신체를 대체합니다.
단, 신체가 훼손되는 과정에서 잃은 생명력을 회복하진 않습니다.
[당신의 스킬 <템빨신의 관조>를 기반으로 새로운 권능 <상쇄>가 생성됩니다.]
<상쇄>
당신을 상대로 아이템을 과신하는 건 하수입니다.
당신은 대상이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의 성능과 숨겨진 기능을 자연히 밝혀냅니다.
분석한 아이템이 스킬 등의 특수효과를 발생시킬 경우 그에 상응하는 파훼법을 자동으로 전개하여 무력화시킵니다.
그리드가 감탄을 연발했다.
유일신이 되고 얻은 보상들이 하나 같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치트키를 쓴 느낌마저 들었다.
‘단지 절대자가 된 걸로 만족했었는데 이런 보상들까지 얻게 되다니...’
앞으론 자원 관리가 필요 없어졌다.
마나와 검기를 무한히 쓰게 됐고 전투력에 큰 영향을 미치는 투기는 늘 최대치를 유지하게 됐다.
스킬을 횟수 제한 없이 창조할 수 있게 됐으며 금의 성역이 궁극으로 진화했다.
게다가 쓰임새가 높은 권능들이 생겼다.
큰 상처를 입을 때마다 일일이 갓 핸드에게 명령을 내려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된다.
적의 템빨이 변수를 발생시키는 상황도 차단하게 됐고.
고작 몇 시간 전의 그리드와 지금의 그리드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고 봐야 옳았다.
항상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온 그리드도 얼떨떨할 정도로 괴랄한 성장세였다.
‘...유일신. 어감 참 좋다.’
물론 유일신은 태초신과 비교해서 우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태초신들이 유일신으로 분류되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셋’이기 때문이다.
반면 유일신은 동류가 없다는 의미일 뿐.
유일신과 태초신의 위계는 똑같이 절대자에 속한다.
하지만 유일신이라는 어감이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무신 치우.
신들 사이에서도 논외로 취급 받는 존재와 동급으로 인정받는 기분이었기에.
‘물론 동급이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초월자 안에서도 위계가 나뉘었던 실정이다.
절대자 안에서도 당연히 위계가 나뉘었다.
하야테가 천상의 주신들과 동격일 거라고 보긴 힘들었기에.
‘어쩌면 여기까지가 내 성장의 한계일 가능성도 높겠지.’
플레이어가 천상의 주신들과 비슷한 눈높이에 선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여기서 더 성장해서 태초신이나 치우와 비벼볼 생각은 그리드도 없었다.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게 현실적이었다.
이제부턴 정말로 동료들을 믿고 기다릴 차례다.
사도들과 템빨단원들이 쭉 성장해서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해주길 바라야 한다.
그때가 되면 비로소 두려울 게 없어지겠지.
그리드가 생각할 때였다.
[템빨신교 교주 데미안이 ‘교황’을 자처합니다.]
[누구도 반발하지 못합니다.]
[레베카교 측에서 유일신 그리드의 위계가 레베카 여신과 ‘최소’ 동등하다고 봐야 옳다는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
그리드와 달리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유일신’이라는 명칭에 현혹되고 있었다.
유일신의 어감이 워낙 특별한 까닭에 태초신보다도 높은 거 아니냐는 의견들을 내놓는 사람이 많았다.
덕분에 교황이라는 지위를 레베카교가 아닌 템빨신교가 갖게 됐다.
현재 레베카교를 운영하는 원로들이 친그리드 인사인 탓에 벌어진 사태이기도 했다.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방관하는 건가?’
그리드가 너무나도 조용한 하늘을 가만히 올려봤다.
아주 먼 옛날에 들었던 레베카 여신의 따스한 음성을 떠올리면서.
여신은 오늘도 침묵했다.
탐욕에 깃들어 있는 그녀의 축복 또한 여전히 건재했고 말이다.
***
“음? 지금 보수하라고 했소?”
케를 옹이 귀를 쫑긋 세웠다. 의심하면서도 기대하는 눈초리였다.
그를 따르는 장인들의 반응 역시 비슷했다.
라우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께서 친히 내리신 명령입니다.”
“허허...!”
관 모양으로 만든 무대.
제라툴의 시신을 거두지 못한 건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지만, 케를 옹이 장인들과 합심해서 만든 이 거대한 무대는 제 역할을 충분히 완수했다.
제라툴을 실컷 조롱해준 한편 성전이 끝날 때까지 형태를 유지한 것이다.
마법과 결계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과학적인 설계를 토대로 괴력난신들이 발생시키는 무지막지한 충격파를 견뎌냈다.
그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일까.
이미 쓰임새가 끝난 무대를 철거하지 말고 보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폐하께선 이 무대를 국보로 지정하여 영원불멸 보존하시겠다고 천명하신 게요? 과연 위대하신 신답게 안목이 훌륭하시군. 하지만 이 거대한 무대를 계속 유지하기엔 광장이 너무 비좁아지는데...”
“도시에선 당연히 치울 겁니다.”
“...아니, 어차피 치울 거면서 왜 철거하지 말고 보수하라는 거요?”
좋다 말았다는 표정을 짓는 케를 옹에게 라우엘이 설명했다.
“폐하께서 비행정의 토대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허...?”
“제라툴의 관을 상징한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드신 눈치더군요. 국보로 지정되는 건 당연하고 신물로 거듭나겠지요. 나흘 뒤에 라드볼프 형제께서 방문하신다고 했으니 되도록 그 전까진 보수를 끝내주셨으면 합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당연하오! 짜식들아! 오늘부터 잠 잘 생각하지 마라!”
“우오오오옷!!”
케를과 장인들이 기합을 내질렀다.
자신들의 작품이 신물.
그것도 유일신의 신물로 거듭나게 생긴 것이다.
가문의 영광으로 삼아도 모자랄 일이었다.
‘케를 옹은 격이 크게 오를 수도 있겠지.’
라우엘은 케를의 새로운 성장을 기대했다.
케를은 앞서 그리드와 용광로를 만들며 전설의 건축가가 된 위인이다. 계기만 있다면 더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높았다.
다른 장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리드에 의해 전원 네임드 NPC가 된 그들의 잠재력 또한 이젠 무한했다.
하지만 지금 라우엘이 히죽히죽 웃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본래 <템빨함> 따위의 이름을 갖게 될 예정이었던 그리드의 비행정이 그나마 상징적인 이름을 갖게 될 가능성이 열린 까닭이다.
제라툴의 신화를 박살낸 무대를 토대로 삼은 비행정.
앞으로 그리드의 모든 여정에 함께하게 될 이것은 제라툴의 관, 혹은 신들의 무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그리드의 위대한 신화를 증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