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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40화 (1,638/1,794)

템빨 81권 - 16화

무신의 추종자들이 제라툴의 강림을 예고했을 때.

사람들은 자연히 끔찍한 상상에 휩싸였다.

라인하르트와 템빨계가 무너지는 광경 따위들을 떠올렸단 말이다.

한데 지금.

라인하르트는 멀쩡했다.

중앙 광장에 설치된 거대한 무대만이 훼손되어 간신히 ‘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 도시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템빨계의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평소와 똑같았다.

아니... 차츰 달라지기 시작했다.

템빨계를 물들이고 있는 주황색 신성의 범위가 도시 전역을 물들일 기세로 확장되어가고 있었다.

템빨계가 커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드가 얻은 승리 보상인가...? 특히 신들이 템빨계에서 얻는 버프가 굉장하다는 풍문이 있던데, 템빨계의 영역이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그리드도 강해진다고 봐야 옳겠지?”

“그마저도 보상 중 극히 일부일 거다.”

그리드는 무려 무신과 싸워서 이겼고 무신의 무맥보다 템빨이 우위에 있음을 증명해버렸다.

보통의 플레이어는 상상하기 힘든 보상 내역이 그의 눈앞에 떠오르고 있을 터였다.

실제로 그리드는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십공신과 사도들에게 둘러싸인 소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유라, 지슈카, 아이린, 메르세데스, 바사라와 중간중간 눈빛을 교환할 때를 제외하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집중하는 기색이다.

보고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정도로 많은 보상이 발생했다는 뜻이리라.

“아무튼 정말 잘 됐어. 이로써 지상은 안전하다는 인식이 사람들에게 뿌리내렸을 테니까. 그리드에겐 늘 고맙군.”

인마대전은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었다.

너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인간에게 죽음이란 안식이 아니라는 절망적인 사실까지 밝혀졌기에.

사람들은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늘 불안에 떨게 됐다.

NPC의 이야기다.

플레이어는 모든 상황을 나름대로 즐길 수 있었지만 NPC는 달랐다.

안 그래도 숫자가 대폭 줄어든 그들은 모든 분야에서 능률이 감소했다. 거리에 활력이 줄었고 경제가 위축되는 게 빠르게 체감됐다. 퀘스트 발생률과 출산율이 여태껏 없던 하락 곡선을 그렸다.

수십 년 후엔 Satisfy도 지구처럼 인간만이 존재하는 세상이 될 거라고 분석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오늘.

그리드가 지상의 안정성을 증명했다.

지옥의 악마들과 천상의 신들이 언제 다시 침략할지 몰라 노심초사했던 사람들의 불안감이 해소 됐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단 2개.

지옥의 왜곡 된 법칙을 올바르게 고치는 한편 천상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다.

“저 돼지새끼들 발등에 불 떨어진 것 봐라. 아스가르드를 거래처로 삼겠다고 준비한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게 됐으니 초조할 수밖에 없겠지.”

“상인들을 비난하는 건 좀 과한 것 같군. 저들이 천상과의 교류를 바랐던 건 인간과 신의 관계를 친숙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어. 그들 나름대로 세상의 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했단 말일세.”

“그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거겠지. 돈에 눈 먼 놈들을 왜 굳이 두둔하는 거야?”

라인하르트에는 사람과 재물이 모인다.

당연히 확장을 거듭해왔다.

서대륙과 동대륙을 포함해서 라인하르트보다 거대한 도시는 없을 지경이다.

한데 사람들의 말소리가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막말로 모든 구역이 왁자지껄했다.

“그리드의 고속 전투는 아무리 봐도 신기하네. 전문가들이 분석하기론 베테랑급 공군 조종사도 감당하지 못할 속도로 거듭나고 있다는데 일반인인 그리드가 무슨 수로 감당하는 거지?”

“초월적인 존재가 전투 상태에 돌입하면 별도의 서버에 진입하게 되는 거 아닐까? 그리드는 평소와 같은 상태로 움직이는데 외부에서 관찰할 땐 빠르게 인식되는 거지.”

“그건 아닐 거다. 랭커들은 현실에서도 동체시력, 순발력, 인지능력 등이 올랐다고 증언하는 경우가 많잖아. 내가 볼 땐 시스템이 플레이어의 뇌에 걸린 리미트를 서서히 해제하는 식으로 플레이어를 진화시켰고 그 궁극에 있는 인물이 그리드야.”

일부 언론에서 떠드는 ‘초월론’인가.

동료의 억측에 지긋지긋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일부는 흥미를 보였다.

“너도 그 동영상 봤구나?”

“너도?”

“뭔데? 뭔 동영상?”

“그리드 혼자서 수십 명의 유단자를 때려눕히는 동영상. 지금은 삭제 됐지만 그리드랑 같은 동네 사는 주민이 자기네 집 CCTV에 찍힌 거라고 업로드했던 영상인데...”

카메라 위치가 영 좋지 않아서 모든 상황이 담기진 않았다.

하지만 얼핏 보기에도 그리드와 싸운 사람들은 엄청난 싸움 실력을 갖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특수부대원들이 아닐까 추측했을 정도로.

그들을 그리드가 모조리 때려눕힌 것이다. 심지어 아주 가볍게.

“그리드는 이미 현실에서도 일반인의 레벨이 아니야.”

웅성웅성.

들뜬 사람들의 대화가 끝없이 퍼져가는 가운데 그리드는 여전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 쓰인 대규모 서사시 <지상에서의 성전(聖戰)>의 주인공은 당신이 아니었습니다.]

‘얘 아직도 삐쳤나?’

그리드는 모르페우스와 직접 대화를 나눠본 경험이 있다.

본래라면 단순한 알림 취급했을 메시지에서 모르페우스의 감정을 유추했다.

마침 시스템은 그리드의 활약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리드는 모르페우스와 재차 대화를 나누는 기분을 느꼈다.

착각이다.

현재 모르페우스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다.

그리드와 ‘대화’를 시도하는 게 아니라 상황을 ‘설명’할 뿐이다.

굳이 설명이 필요한 이유는 전달 사항이 워낙 많아서였다.

그리드의 활약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지상에서의 성전>의 주인공은 당신과 당신의 사도들이었죠.]

[검성 ‘크라우젤’과 무무드의 후계자 ‘유페미나’, 그리고 웅변가 ‘후로이’ 또한 이번 서사시의 주역이었습니다.]

[그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제1차 성전>이라는 대규모 서사시는 완성되지 못했겠지요.]

‘후로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리드가 짐짓 당황했다.

시스템이 후로이의 활약을 제대로 평가해줬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그래, 제대로 평가했다.

후로이는 이번 성전의 참가자가 아니었지만 굉장히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매번 중요한 순간마다 궤변... 아니, 촌철살인을 날려서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지 않았나.

신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 것은 기본이고 <광신광룡>의 비화를 세상에 널리 알리기까지 했다.

후로이가 없었으면 상황이 유리하게 유지되기 힘들었으리라.

다만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영향력이다.

직접 전투에서 활약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할 거라고 염려했는데 과연 모르페우스는 달랐다.

‘애초에 후로이는 과소평가 된 적이 없긴 해.’

오죽하면 최초의 세컨드 클래스를 얻었고 비전투 직업군 최초로 비룡의 주인이 되었겠나.

이후로도 후로이는 쭉 잘 먹고 잘 살았다...

직업 특성상(?) 워낙 원한을 많이 샀고 다른 템빨단원들에 비해 화려하지 못해서 대중의 평판은 비교적 낮았지만, 시스템만큼은 후로이를 늘 올바르게 평가해온 것이다.

[서사시의 주역들에게 공통 된 보상을 줘야한다고 판단합니다.]

[당신이 받아야 할 보상을 나눠주는 개념이 아니니 안심하시길.]

[23번째 서사시 달성 보상으로 서사시 주역들의 격이 상승합니다.]

격의 상승.

현재 시점의 그리드는 변화를 체감하기 힘든 보상이다.

치명타를 입히는 확률 상승, 치명타를 당하는 확률 하락, 받는 데미지 경감, 속도 제한 해제, 공격력 상승, 회복력 상승 등등등.

격의 상승으로 발생하는 중요한 효과들을 그리드는 이미 대부분 누리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도들과 크라우젤, 유페미나, 후로이가 느끼는 변화는 컸다.

잠시 전능감에 휩싸였을 정도로 자신의 비약적인 발전을 체감했다.

이번엔 그리드가 느끼는 체감도 컸다.

드디어 새로운 경지에 오를 조건을 충족했기에.

[당신의 격이 매우 높아 초월자의 범주에 넣기 힘듭니다.]

[당신에게 초월자란 발밑에 있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신이 된 자를 사도로 두었습니다.]

[당신은 신이 될 자들을 사도로 두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신들을 구원하였으며 어떤 신들을 벌하였습니다.]

[지옥의 악마들이 당신을 두려워합니다.]

[당신이 지옥의 왜곡 된 법칙을 고쳐줄 거라고 믿는 지옥의 주민들이 많습니다.]

[당신은 무수히 많은 인명을 구했고 인류의 존엄을 지켜냈습니다.]

[당신이 대륙의 구분을 희미하게 만들었고 인류의 화합을 이뤘습니다.]

[당신이 존재하는 한 국가간의 전쟁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지상의 모든 국가가 당신이 세운 국가의 규범, 문화, 기술을 본받기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

[당대의 대장장이들은 반드시 당신의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습니다.]

[당신은 지옥의 대적이자 인류의 자랑이고, 희망이고, 기둥이며]

절대자의 편린이 모인다.

[신들이 본받아야 할 대상일 것입니다.]

그리드는 가슴의 떨림을 느꼈다.

지나온 순간들이 모조리 생생하게 떠올랐다.

온갖 감정이 느껴졌다.

[당신을 만물의 창조자이자 지배자라고 규정했던 이유는 당신의 업적이 실제로 만물을 창조한 태초의 신들과 비견 되서는 아니었습니다.]

템빨신이 만물의 창조자이자 지배자였던 이유는 단순하다.

그리드도 예상할 수 있었다.

‘탐욕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던 거겠지.’

탐욕은 파그마와 브라함이라는 최고의 전설들이 탄생시킨 합작품이다.

후대에 이르러서 그리드가 진화시켰으며 진화의 배경엔 신들의 축복과 광룡철, 그리고 서사시가 있었다.

탐욕은 말 그대로 그리드와 함께 성장해온 광물이며 가능성이 무한했다.

온갖 아이템의 토대로 삼을 수 있었으며 ‘스스로 움직이는’ 물체 즉, ‘인간과 닮은 것’을 만들 수도 있었다.

[당신이 <탐욕>을 토대로 새로운 만물을 창조할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했던 것이죠.]

하지만 그리드는,

[하지만 당신은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인형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

지옥의 진실과 신들의 태도...

마주한 현실에서 몹시 큰 절망을 느꼈음에도 거짓 된 세상을 만들 시도 자체를 안 했다.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리드는 지금 살아가는 현실을 지켜낼 생각뿐이었다.

[당신은 위대합니다.]

[당신의 모든 순간이 훌륭했던 것은 아니지만, 점차로 찬란하게 바뀌어온 당신의 삶은 존경 받아 마땅합니다.]

[이건 일반적인 관점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사견이 아니다...

그리드는 굳이 덧붙이는 모르페우스가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여러 근거를 토대로 당신을 새로이 규정합니다.]

[유일신 그리드.]

[당신은 태초의 신들과 달리 만물과 생명을 창조하지 못했고, 무신 치우와 달리 모든 생명의 염원이 되는 대상도 아닙니다. 그들과 비교해서 존재해온 세월조차 한없이 짧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지옥, 지상, 천상 모든 차원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습니다.]

[당신이기에 가능했던 일이겠죠.]

이어서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템빨신 ‘그리드’가 유일신으로 거듭납니다.]

[유일신을 제외한 플레이어는 더 이상 ‘그리드’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

감격하고 있던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쉴 틈 없이 떠오르는 화려한 보상 내역을 보고도 마냥 웃지 못했다.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를 통제하게 된 것이다.

들썩일 여론이 벌써부터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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