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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39화 (1,637/1,794)

템빨 81권 - 15화

제라툴을 좇아 강림한 신들이 으레 그렇듯.

후회의 신 벨마 역시 인지도가 낮았다.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그녀를 알았는데 그마저도 평가가 나빴다.

후회의 신.

이름부터 영 불길하지 않나.

여태까지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라는 잔소리나 늘어놓을 것 같은 이름이었다.

벨마.

실제로 그녀의 역할은 인간들이 ‘후회 없는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임무를 떠맡았단 말이다.

그녀는 너무 많은 실패를 겪었고 큰 고민에 빠졌다.

과연 내 역할은 옳은가.

옳지 않다.

인간의 삶에서 후회를 없앤다는 건 인간을 몰라 품었던 오만이다...

깨달은 순간부터.

벨마는 방식을 바꿨다.

인간이 후회하지 않도록 돕는 게 아니라 후회에 시달리는 인간을 보듬는 식으로.

그러기 위해선 인간 개개인의 삶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위대한 신들은 무수히 많은 인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반면 그녀는 한 명, 한 명의 인간과 일일이 교감을 나눠왔다.

“지크... 나를 체험해본 그대가 가장 잘 알겠지만 나는 몹시 무능력한 신이오. 부디 많은 실망은 말아주시오.”

고독한 검사에게 살아갈 의지를 주고 싶어 검술을 배웠다.

하지만 정녕 가능할까?

내가 익힌 검술이 그 최강의 검사에게 새로운 의지를 심어줄 수 있을까?

감히 무신 제라툴의 검술을 의심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내게 있다.

평생 단 한 번도 싸워본 적 없는 내가 잘 싸울 수 있을까...

“정 스스로를 못 믿겠으면 권능을 쓰지 그래.”

지크와 마주보고 선 벨마의 마음이 흔들릴 때였다.

마법과 지혜의 신.

조금 전 막 탄생한 새로운 신이 무대 밖에서 조언했다.

“어차피 대결은 템빨계의 승리로 끝난 상황이다. 당신이 집착해야할 부분은 대결의 결과가 아닌 내용일 텐데.”

천하의 브라함이 자중하고 있었다.

하야테를 제외한 대부분의 상대에게 하대를 일삼던 그가 벨마에겐 나름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벨마를 존중해서다.

늙고 왜소한 겉모습이 아닌 본질을 존중했다.

“설마 최강의 검사를 상대로 순수한 검술을 겨룰 생각은 아니었을 것 아닌가?”

“...”

맞다.

고독한 검사를 상대로 순수한 검술을 겨루는 건 오만이다.

그리고 오만은 벨마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다.

벨마가 거의 다 설득 됐을 무렵이었다.

“저자의 말을 귀 담아 들으실 필요 없습니다.”

지크가 찬 물을 끼얹었다.

힐끔 브라함을 쳐다보는 눈빛이 드물게 날카로웠다.

평소의 차분한 눈빛과 달리 다소 공격적이었다.

브라함의 의도를 읽었기 때문이다.

브라함이 콧방귀 뀌었다.

“늦은 것 같다만.”

사실이었다.

벨마는 이미 권능을 꺼냈다.

수십 개의 분신을 생성했다.

분신들의 표정이 제각각 달랐다.

여태껏 벨마가 짊어져온 인간들의 후회가 형상화 된 분신들이었기에.

다른 신들의 권능과 달리 화려하지 않고 도리어 음울한 구석이 있었다.

“고맙소, 브라함. 귀하 덕분에 깨달은 바가 크오.”

고독한 검사도, 눈앞의 지크도.

평생토록 검을 연마해온 자들이다.

저들에게 순수한 검술을 겨루자고 해봤자 치욕을 안기는 것밖에 안 됐다.

생각하며 망설임을 버린 벨마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그러자 수십 개의 분신이 그녀의 동작을 고스란히 따라했다.

쿵.

수십 개의 발걸음이 동시에 옮겨지자 무대가 미세하게 진동했고,

스르륵.

벨마의 분신은 수십에서 수백으로 늘어났다.

쿠웅!

수백 개의 발걸음이 다시 한 걸음 옮겨지자 이번엔 다소 큰 소음이 발생했고,

스르르륵.

벨마의 분신은 수백에서 수천으로 늘어났다.

그녀가 목격해온 인간들의 후회가 그만큼 많았단 의미다.

“...브라함.”

지크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은 지크가 좌절하는 것으로 보았다.

브라함이 벨마를 자극한 까닭에 지크가 위기에 놓였으니까.

그래, 위기다.

벨마의 수천 개 분신은 저마다 다른 후회를 떠안고 있었다.

어떤 것은 늙은 대마법사의 후회였다.

젊은 시절.

마법을 더 쉽게 터득하기 위해 저질렀던 과오가 그의 말년을 고통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삶의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며 한탄하는 그의 마법을 벨마의 분신이 재현했다.

어떤 것은 중년 작곡가의 후회였다.

욕심에 눈이 멀어 소중한 벗의 작품을 표절한 그는 매일 밤 끔찍한 악몽에 시달렸다.

벗이 자살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온 친구에게 들려준 노래가 친구의 작품이 되어 세상에 울려 퍼지는 광경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아아아아아!

친구에게 빼앗은 선율을 절규로 재현하는 중년 작곡가의 비명을 벨마의 분신이 재현했다.

평범한 가장의 후회도 있었고, 아직 어린 소녀의 후회도 있었으며, 용맹한 전사의 후회도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후회들이 벨마의 분신으로 재현됐고 강력한 파장을 일으켰다.

지크에게 물리적인 고통과 심적인 고통을 동시에 선사하는 파장이었다.

얼마 전의 지크였다면 결코 감당하지 못했을 수준의 고통이다.

실제로 무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전원 괴로워하고 있었다.

간접적인 체험만으로 정신이 황폐해져서 신음하는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그리드도 눈살을 찌푸렸다.

물리적인 공격이 동반되는 정신계 공격의 궁극.

이걸 정면에서 맞으면 자신조차 무사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다.

한데 지크는 태연하게 견뎠다.

무색의 신성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벨마가 재현하는 온갖 후회가 지크에게 도달하기 전에 흡착시켜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 개변시키는 신성이었다.

전사들의 후회가 발생시키는 물리적인 공격, 마법사들의 후회가 발생시키는 마법의 난무, 평범한 사람들의 후회가 만들어낸 우울과 상태이상들이 모조리 지크의 검기로 치환됐다.

“이건...?”

믿기 힘든 광경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벨마의 떨리는 시선이 브라함에게 향했다.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브라함이 어깨를 으쓱였다.

“안타깝게 됐군.”

꽈아아아아아앙...!!

지크가 룬으로 재현하는 무색 신성은 소별왕의 신성을 어설프게나마 흉내내는 것이다.

어떤 개념이든 흡착시켜 하나의 개념으로 개변시킨 뒤 흡수, 증폭, 방출하는 성질을 지녔다.

대상의 힘이 클수록 빛을 발휘하는 성질이다.

브라함의 파훼법이 증명했듯 대상의 힘이 무한할 경우엔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지만, 그런 무식한 파훼법을 쓸 수 있는 존재는 브라함이 장담컨대 세상에 몇 없었다.

꺄아아아악...!!

벨마의 분신들이 스러져갔다.

온갖 종류들의 후회를 단 하나의 검기로 치환해서 휘둘러대는 지크의 공격력을 감당하지 못했다.

채챙! 챙!

그나마 벨마의 본신은 지크의 검기를 몇 번이나 쳐냈다.

고독한 검사를 위해 연마한 그녀의 검술은 그 마음가짐만큼이나 훌륭한 것이었다.

“지크... 못 본 새 영악해지셨구려.”

“...”

굽은 등을 활짝 펴며 세운 검으로 지크의 공격을 막아낸 벨마의 음성은 어느새 다시 차분해져 있었다. 브라함과 짜고(?)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지크를 원망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잘 됐소. 그대는 이미 올곧기만 한 삶의 최후를 이전 세계에서 체험해보지 않았소. 이번 삶에선 부디 후회가 없기를 바라오.”

“...”

지크는 몇 번이나 입을 열려다가 말았다.

브라함 때문에 억울한 부분이 있어서 뭐라 항변을 하고 싶은데 벨마가 기회 자체를 안 줬기 때문이다.

피해자인 벨마가 뭐라고 비난을 해야 항변도 하는 건데 벨마의 태도가 내내 호의적이었다.

“훗.”

뭐가 그리 잘났다고 브라함은 연신 기고만장하게 웃고 있었다...

지크의 눈살이 재차 미세하게 찌푸려지는 것을 본 벨마의 주름진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그려졌다.

“이번 세계에서도 좋은 벗을 사귀셨구려.”

“...예?”

드물게 충격 받은 표정을 짓는 지크였다.

솔직히 귀를 의심했다.

벨마가 후후 웃었다.

“그대의 얼굴에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소. 다른 선인들과 함께 지내던 시절처럼 말이오.”

“이건... 단지 화가 나서...”

드디어 항변할 기회를 얻은 지크였으나 도중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화를 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반신.

지크는 평범한 인간과 다르다.

다른 이와 섣불리 교감할 수 없어서 늘 거리를 둬왔다.

한데 브라함과는 그런 거리감이 없었다.

의식하지 않고도 자연히 그렇게 됐다.

브라함의 입장 또한 자신만큼이나 특수했기에.

그리드와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선인들이 지금의 그대를 본다면 필시 기뻐할 테지.”

순간.

“제 동료들은 확실히 살아있는 거군요.”

지크가 확신했다.

벨마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지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다만 악마가 되어서.”

“...거기까지 알아내셨소?”

벨마가 더 이상 침묵을 지키지 못했다.

놀란 기색으로 반문하는 그녀에게 지크가 답변을 요구했다.

“고독한 검사가 봉인한 대악마들이 제 동료들 아닙니까?”

뮐러.

지크는 고독한 검사의 정체를 더 이상 모르는 척하지 않았다.

애초에 벨마도 숨길 생각이 없었고 말이다.

“그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믿는 사람이었소.”

대부분의 전설들처럼.

검성 뮐러는 위대한 존재였다.

“늘 타인을 위해 본인을 희생했지. 그는 최강이되 약해질 때가 더러 있었소.”

뮐러가 산군 그레니어를 도왔던 비화가 증명하듯.

전설은 뮐러의 업적을 전부 담지 못하고 있다.

애초에 뮐러의 지극히 일부가 전설이 된 것이다.

“그러나 끝끝내 죽지 못하고 있는 그를... 그대들이라면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싶소.”

어느새 전투가 끝나가고 있었다.

인간들의 후회를 일시적으로 흡수하고 강화 된 지크의 검기를 벨마가 더 이상 감당하지 못했다.

이 순간 벨마는 깨달았다.

자신에겐 뮐러를 도울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지크와 브라함은 다를 거라는 희망을 품었다.

템빨신이야 두말할 나위 없다.

다만 템빨신은 함부로 언급하지 않았다.

위계가 달랐으니까.

무려 제라툴을 쓰러뜨린 자 아닌가.

벨마가 감히 언급해선 안 되는 대상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고독한 검사를 찾아가 주시오. 그는 구원 받아 마땅한 영웅이되 지크 그대가 품고 있을 의문들을 해소시켜줄 사람이기도 하오.”

“반드시 찾아가겠소.”

벨마의 부탁에 대답하는 건 지크가 아닌 그리드였다.

두껍게 내려앉은 눈꺼풀에 반쯤 가리어진 눈을 동그랗게 뜬 벨마가 머리를 조아렸다.

“위대하신 신께서 약조해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신을 조아리게 만드는 신.

23번째 서사시는 그리드의 위대함을 재차 서술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이어서 떠오른 월드 메시지가 성전의 종료를 알렸다.

[템빨계와 아스가르드의 제1차 성전이 종료되었습니다.]

[무신 ‘제라툴’은 템빨신 ‘그리드’의 상대가 되지 못했으며]

[템빨신의 사도들은 제라툴의 무맥을 끊어놓았습니다.]

[인류가 공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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