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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38화 (1,636/1,794)

템빨 82권 - 14화

“죽일 겁니다.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

무대에서 내려온 사리엘이 가장 먼저 접한 것은 메르세데스의 살인 예고였다.

메르세데스는 아이린과 완전히 달랐다.

사리엘의 입장, 사리엘과의 친분 따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사리엘이 그리드에게 보인 태도를 증오했다.

아이린보다 메르세데스가 더 그리드를 사랑해서?

아니, 그녀들의 그리드를 향한 사랑은 똑같이 무한했다.

그녀들의 차이점은 입장에서 나왔다.

황후인 아이린이 짊어진 책임이 메르세데스가 짊어진 책임보다 클 뿐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을 고려해야했다.

“정말로... 정말로 미안해요...”

혐오와 증오가 담긴 메르세데스의 시선은 비수와도 같아서 사리엘의 심장을 헤집어놓았다. 조금 전 아이린에게 맞은 뺨이 다시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본래 아프지 않아야 옳은데.

“그만들 하라니까.”

그리드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죄책감에 짓눌려 고개를 숙인 사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한편 메르세데스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러자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던 메르세데스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녹아내린 것이다. 뺨에 홍조를 띄우더니 예쁜 입술을 씰룩이며 애써 웃음을 참았다.

기사왕의 평소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순수한 소녀와 같은 반응이었다.

주변이 술렁였다.

안 그래도 신과 타천사의 본격적인 대결을 보고 압도당했던 관중이 번뜩 정신을 차리고 일제히 공분했다.

그리드의 여성 편력을 혐오하는 사람들의 분노였다.

혐오심은 대개 윤리관이 아닌 질투에서 비롯됐다.

시대의 흐름을 대변하는 태도다.

Satisfy에서 귀족의 작위를 얻은 여성이나 남성은 여러 명의 배우자를 거느리는 바.

이제 사람들에게 있어서 ‘홀로 여럿과 나누는 사랑’은 낯설지 않고 이해 범주의 영역이었다.

애초에 현대 사회에서도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국가는 의외로 많았던 실정이고.

아무튼 사람들이 그리드에게 분노하는 이유는 메르세데스와 사리엘이 너무 잘났다는 부분에 있었다.

절세의 미모와 출중한 능력을 지닌 여인들.

심지어 종족조차 다르다는 매력이 있다.

그녀들을 독차지하고 있는 그리드가 너무 부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사리엘은 여자가 아닌데?”

분위기를 읽은 그리드가 어리둥절해하는 그때.

“사리엘 너는 진정으로 반성해야할 거다.”

무너지는 결계를 실시간으로 수복하느라 고생했던 브라함이 다가와 으르렁거렸다.

죄?

사안으로 들여다봐서 죄 없는 사람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을까?

감히 그리드에게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고 비난한 사리엘에게 브라함은 진심으로 분노했다.

사리엘도 반성하고 있었다.

사악한 마음에 집어삼켜지고 이성을 잃은 상태로 저지른 실수였지만 순순히 뉘우쳤다.

감히 섬기는 신을 비난하다니...

백 번 죽어 마땅한 죄라고 여기면서.

“그만들 하라니까.”

그리드가 결국 사리엘의 어깨에도 팔을 둘렀다.

“사리엘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타천사가 돼서 이성을 잃고 저지른 실수인데 뭘 자꾸 물고 늘어지는 거야? 누구보다 사리엘 본인이 가장 괴로워하고 있다는 걸 뻔히 알잖아?”

“흥, 마치 애처럼 달래는군.”

“비꼬지 마쇼. 이참에 확실히 말해두겠는데, 당신들이 내게 실수가 아닌 의도적인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나는 당신들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뭐...? 그게 무슨 미친 개소리냐?”

“당신들이 나를 배신한다는 건 내게 문제가 있다는 걸 테니까. 그만큼 당신들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

당신들을 의심하느니 나를 의심하겠다.

그리드의 선언이 사도들에게 많은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지크와 피아로는 묵묵히 미소 지었고, 메르세데스는 감격해서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려야만 했으며, 사리엘은 더 큰 죄책감을 느낌과 동시에 그 이상의 충성심을 느꼈다.

충성심.

자신을 창조한 신조차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던 정의의 천사에겐 낯설기만 했던 감정이다.

“...”

미르는 전율했다.

환국에서 목격했던 신과 사도의 관계들을 떠올려 보며 그리드가 얼마나 파격적인 존재인지 실감했다. 그의 사도가 된 것이 탄생 이후 최대의 행운이자 업적이라는 확신을 품고 말았다.

“...개자식.”

브라함은 불만어린 표정으로 욕설을 뇌까렸다.

그리드가 제시한 전제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네펠리나의 반응도 비슷했다.

“우, 우리가! 너를 배신할 리 없지 않느냐!!”

“가정을 하셨을 뿐이잖아요. 어디서 언성을 높이시나요?”

“메, 메르세데스! 너... 너! 그리드와 짝짓기 한 뒤로 점점 무례해지는구나...!”

“크흠!”

깜짝 놀란 그리드가 헛기침했고 도시 곳곳에선 물 뿜는 소리가 빗발쳤다.

후로이가 다급히, 그러나 몹시 태연한 얼굴로 수습했다.

“네펠리나 님께선 두 분의 혼인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 드래곤이라서 표현이...”

“그게 아니야! 짝...! 웁! 우웁!!”

네펠리나가 퇴장했다.

페이커와 카심이 그림자 속으로 끌고 들어가 버렸다.

잠시 분위기가 어색해졌지만 이내 회복 됐다.

반트너와 폰이 특유의 너스레를 떨며 사람들의 관심을 돌린 덕분이다.

무대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별자리의 신이 입을 열기도 했다.

“사리엘... 나는 과거의 너를 방관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너를 멋대로 재단하고 해치려고 했다. 마음 깊이 사죄하마.”

다라는 사리엘이 완전히 타락했다고 믿고 그녀를 죽이려들었다.

그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사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었으면서.

“...괜찮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론 더 이상 당신을, 천상의 신들을 원망할 것 같진 않군요.”

무대 위로 시선을 돌린 사리엘이 답했다.

다라에겐 의아하게 들렸다.

“어째서 원망하지 않겠다는 거지?”

모두를 주목하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그리드와 사도들은 물론이고 템빨단원들과 관중들, 그리고 시청자들까지 사리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용서하겠다는 말인가?”

“아니요. 단지 하찮은 원한과 복수심에 집착하기엔 지금의 행복이 너무 소중해서요.”

“...”

이 순간.

사리엘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응어리졌던 한이 풀렸다.

복수가 아닌 귀중한 행복으로 풀어냈다.

복수에 집착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그녀를 폭주하게 만들었을 ‘사악한 마음’이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지기 시작했다.

[당신의 사도 ‘사리엘’이 타천의 저주를 극복합니다.]

[당신의 사도 ‘사리엘’이 더 이상 악마화의 위험을 겪지 않습니다.]

“네가 나보다 백배천배 낫다.”

그리드의 찬사가 사리엘의 신성을 더욱 밝게 만들었다.

수줍게 웃는 그녀의 얼굴엔 그늘 한 점 없어서 여느 때보다 아름답고 찬란했다.

진정한 천사로 거듭난 느낌.

그녀의 변화, 혹은 성장을 느낀 사람들이 환호했다.

그리고 분위기가 진정됐을 무렵.

“눈치 없이 나서는 것 같아 미안하오만... 마무리는 지어야 하지 않겠소?”

다라가 떠난 무대에 마지막 신이 올랐다.

백발이 성성한 노파 모습의 신이었다.

허리가 90도 이상 휘어 몸의 균형을 지팡이에 의지하는 형상이다.

악취미로 느껴졌다.

영원한 젊음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신이 굳이 늙고 병든 형상을 한 것은.

“오해하지 마시오. 내 모습은 인간의 유한함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외다.”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낌새를 읽은 신이 설명했다.

그녀의 이름은 벨마.

“나는 후회의 신... 인간들이 외면하는 것을 떠안는 역할을 맡았소. 이 늙은 모습도 그중 하나지.”

“늙기를 바라지 않는 인간들을 대신해 네가 늙어주었다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절대 다수의 인간이 노화를 피하지 못하고 있는데.”

브라함이 콧방귀 뀌었다.

네 희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일침을 놓는 것이다.

대놓고 말하지 않을 뿐이지 순전히 쓸모없는 놈 취급이었다.

“대신 늙어주는 게 아니오. 함께 늙어주는 것이지.”

“...”

브라함이 입을 다물었다.

벨마의 설명을 듣고 그녀가 선한 신이란 사실을 단번에 눈치 챈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인간들과 같은 고통을 짊어지고 나누는 신.

후회의 신 벨마는 구조적으로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신이었다.

굳이 적대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지크는 그녀를 일찍부터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꾸벅.

무대 위로 오른 지크가 벨마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한울이나 소별왕을 대할 때와도 느낌이 사뭇 달랐다.

차라리 치우를 대할 때와 닮은 느낌.

단순히 존중하는 수준을 넘어서 공경하는 태도였다.

“무예를 공부하신 걸 보면 이번엔 어떤 무인이 당신의 심금을 울렸나 보군요.”

“적수가 없어 고독한 검사가 죽지 못해 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프더구려.”

“그의 적수가 되어주고 싶으셨던 겁니까? 먼 옛날 제 공부를 도와주셨던 것처럼.”

“나는... 그대를 도왔던 게 아니오.”

벨마가 ‘이전 세계’의 기억을 떠올렸다.

모든 지식을 섭렵하고 무료해져 후회하는 인간 소년을 만났다.

세상엔 아직 소년이 모르는 지식이 있음을 알려줬다.

소년이 후회가 아닌 희망을 품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건 소년에게 저주였다.

새로운 지식을 찾아 헤맨 끝에 청년이 된 소년은 급기야 레베카 여신께 룬어를 배웠으니까.

그 결과 반신이 되고 끝내 칠악이라는 누명을 쓴 소년의 지난 삶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벨마의 주름진 얼굴에 점차 짙은 그늘이 지는 순간이었다.

“당신을 만났던 소년은 그런 나날을 겪었기에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죠.”

“...”

“요즘 제 상태는 매우 좋습니다, 벨마.”

행복하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아직 동료들을 구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행복에 가까워지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지크가 지난날의 선택들을 후회하지 않게 된 이유다.

“고독한 검사에게도 당신의 친절이 닿을 수 있도록 저와 한 수 겨뤄주시겠습니까?”

“...고맙소, 지크.”

최강이 된 것을 후회하는 검사가 있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자다.

벨마는 그에게 아직 설 곳이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뮐러.’

그리드와 지크는 벨마가 말하는 검사의 정체를 당연히 눈치 챘다.

거대한 만남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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