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1권 - 13화
천사의 본질은 신의 하수인이다.
인간들에겐 한없이 고귀하고 성스럽게 보인다 한들 실제 지위가 높진 않았다.
대천사도 마찬가지다.
천사들 중 으뜸을 논하며 어지간한 신 이상의 능력과 권한을 지녔다지만 신분은 낮았다.
일개 천사가 어떤 처분을 당한다고 해서 신들의 관심을 사긴 힘들다는 말이다.
한데 사리엘이 추방당한 사건은 수많은 신들에게 목격 됐고 회자되었다.
제라툴도, 제라툴을 쫓아 내려온 신들도 하나 같이 사리엘을 알아보며 언급하지 않았나.
‘진즉 눈치 챘어야 돼.’
사리엘은 대천사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다.
깃털에 베인 뺨에서 흐르는 핏물을 닦아낸 그리드가 확신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당연한 것이다.
정의의 대천사.
사리엘은 천상의 율법을 수호했던 존재다.
그녀의 <사안>은 천사와 신들을 감시하며 그들의 죄를 밝혔다.
어쩌면 처벌할 권한까지 지녔던 걸지도 모른다.
신들에겐 무척 불편한 존재이기에 끝내 추방당하게 된 걸 테지.
‘집행관.’
신을 감시하고 벌할 권한을 지닌 대천사...
사리엘을 정의해본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의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언을 유추하자 그녀가 얼마나 대단했던 존재인지 실감한 것이다.
기형적인 일이 아니다.
지옥을 봐도 태초의 3악 외에 숨겨진 거인들이 많다. 흑기사나 아수라 같은.
‘말려야 돼.’
그리드가 손을 쥐었다가 펼쳐보았다.
호흡을 고르며 바람의 냄새를 맡았다.
코를 찌르던 혈향이 흐릿해졌다.
잘려나갔던 팔과 얼굴의 상처가 대부분 재생 됐다.
어떤 심한 상처라도 시간이 지나면 회복한다는 것.
이건 모든 플레이어가 누리는 플레이어의 특권이다.
물론 ‘죽어야만’ 회복되는.
정확히는 ‘리셋’되는 저주 계열의 상처 앞에선 플레이어도 어쩔 도리가 없지만 제라툴의 공격엔 저주가 깃들어있지 않았다.
놈은 그리드를 증오하는 마음과 별개로 무신답게 순수한 무예로 그리드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
몹시 치명적이어서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는 게 문제지.
‘다소 아쉽지만 이 정도면 가능할 거다.’
몸 상태를 점검해본 그리드가 이어서 지상의 상황을 살폈다.
지상이라기엔 전투 범위가 너무 크다.
거대한 별자리 전사가 떨어뜨린 검이 무대 전체를 뒤덮었고, 깨질 듯 출렁이는 결계 사이사이로 사리엘의 깃털이 파고들며 무대 바깥의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결계가 미치지 않는 상공 높은 곳.
즉, 그리드가 있는 장소엔 아예 전투의 여파가 들이닥치고 있었다.
별자리 전사의 기파와 칼날 같은 깃털에 맺힌 군청색 마기가 충돌할 때마다 발생하는 충격파가 그리드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그리드도 무시하기 힘든 데미지가 점차로 누적 됐다.
무대를 감싸고 있는 결계가 오래 버티지 못할 거란 사실을 암시했다.
이대로는 사람들이 위험하다.
“...!”
순보를 써서 사리엘과의 거리를 좁히려던 그리드가 흠칫 놀라며 멈췄다.
무대 위.
여섯 쌍의 날개를 접어 별자리 전사의 검을 막아내고 있는 사리엘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온 까닭이다.
탁한 회색의 눈동자가 마치 청동거울처럼 그리드를 흐릿하게 투영했다.
[탐욕과 폭력, 살인, 배신... 당신 또한 많은 죄를 범해오셨군요.]
사리엘의 의념이 그리드의 뇌리로 파고들었다.
은은한 슬픔과 커다란 분노가 느껴졌다.
그리드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았다.
탐욕.
너무 많은 것을 욕심냈다.
물질도, 사람도, 사랑도.
폭력.
복수를 명목으로 종종 부조리한 폭력을 휘둘렀다.
살인.
돈, 권력, 성장, 백성, 국가... 온갖 이유를 빌미로 너무 많은 사람을 해쳤다.
배신.
에트날 왕국을 전복시켰다.
“...맞아.”
일곱 신은 단 한 종류씩의 죄만 저질렀다고 한다.
그들과 비교하면 나는 더 큰 죄인이리라.
사실 진즉부터 깨닫고 있었다.
헥세타이아와 쉽게 교감하게 된 것도 내게 그를 비난할 자격이 없음을 자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가 사람들을 보았다.
무수한 인파를 이루고 있는 각계각층의 사람들.
그들 중 상당수가 나를 의지하고 있다.
“나를 벌할 순 없다.”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뭐라고 지껄여봤자 궤변밖에 안 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리드는 과거에 매몰 될 순 없는 입장이었다.
지난 날 저질렀던 죄 때문에 미래를 포기하기엔, 그가 책임져야 할 미래가 너무나도 거대했다.
[나의 죄는 특별하다. 사연이 있고 명분이 있다, 이겁니까.]
사리엘이 흘리는 피눈물이 더욱 짙어졌다.
[당신도 천상의 신들과 같군요.]
누군가를 벌한다는 것.
그녀라고 좋아서 하는 게 아니다.
탄생과 동시에 짊어진 의무이기에 이행하는 것이고, 때때로 그 사실이 슬펐다.
하물며 벌해야 할 대상이 자신이 섬기는 신이라면 더욱 더.
콰아아아아아아앙!!
사리엘이 접었던 날개를 펼치자 칼날 같은 깃털이 폭풍을 이뤘다.
그리드가 그녀의 모습을 제대로 식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순보를 써서 폭풍 내부로 진입하는 게 요원해졌다는 의미다.
별 문제 없었다.
“종횡무진.”
몸소 피하고 진입하면 그만이니까.
까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강!!
폭풍에 돌입한 그리드의 몸 주위로 무수한 불똥이 튀겼다.
칼날의 깃털이 <베리드의 힘>과 충돌하며 발생시키는 불똥이었다.
자동 연성.
1분에 한해서 자신을 표적으로 날아드는 투사체를 모조리 막아내는 패시브 스킬이 그리드를 지켰다.
하지만 종횡무진과 자동 연성에도 한계는 있었다.
모든 면적을 뒤덮어버리는 규모의 공격.
그것은 종횡무진의 퇴로마저 차단했으며 자동 연성으로 감당하기엔 너무 강력한 위력을 간직했기에.
꽈아아아아아아아앙!!
별자리 전사가 휘두른 검이 사리엘과 그리드를 동시에 덮쳤다.
실시간으로 박살나는 결계의 기척이 그리드의 감각에 잡혔다.
다행히 즉시 수복되고 있었다.
사도들과 템빨단원들이 힘을 합치고 있는 덕분이다.
“사리엘!!”
사도들과 템빨단원들이 사리엘의 이름을 목청껏 외쳤다.
제발 정신 차리라고.
더 이상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라고.
공교롭게도 닿지 않는 듯했다.
사리엘은 오직 그리드와 다라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고통은 죄를 범한 자들이 감수해야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니라요.]
슬픔이 원망으로 바뀐다.
[당신들을 죽이고 그 힘을 취해 천상에 오를 겁니다. 그곳에서 이루지 못했던 정의의 심판을 내리고 이 내가, 흐트러진 질서를, 올바로 다잡는 거지요.]
분노가 희열로 바뀐다.
타천사.
신들에게 추방당하면서 강제로 ‘악’한 성질을 부여받은 그녀는 본래의 성격을 완전히 잃어가고 있었다.
퍼어어어엉!!
새카만 고리가 다라가 있는 방향으로 궤도를 바꾸더니 군청색의 빔을 쏘았다.
이를 막기 위해 다라가 방패를 세우자 별자리 전사 또한 방패를 세웠고 덕분에 그리드 또한 압박에서 벗어났다.
“사리엘! 일단 진정하고 정신 차려라!”
<천지 뒤집기>를 써서 사리엘을 지면에 꽂아버린 그리드가 소리쳤다.
당연하게 황혼은 휘두르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사리엘을 해치는 게 아니라 말리는 거였으니까.
공교롭게도 사리엘의 이성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를 감싼 기운은 여전히 군청색의 마기였다.
“젠장! 정신 차리라고!”
빠악! 쾅쾅쾅!!
그리드가 <혼투격>으로 사리엘의 면상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아...”
곳곳에서 탄식이 흘렀다.
사리엘이 잠시 이성을 잃었다지만 명색이 사도인데 복날 개 패듯 패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일단 말로 설득해야 옳은 거 아닌가...
사람들은 아쉬움을 느꼈지만 그리드는 그런 감상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빨라지고 있어.’
그리드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사리엘이 가속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녀가 빨라질수록 세상의 흐름이 느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설프나마 절대자의 영역이 형성되려하는 것이다.
본래부터 막강했던 정의의 천사가 추방당하고 타락한 상태로 쌓아올렸던 힘마저 완전하게 소화하자 절대지경을 넘보기 시작했다.
“사리엘! 정녕 완전히 타락하였는가!”
다라가 한탄했다.
그가 휘두르는 검을 별자리 전사가 곧이곧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굉장히 까다로운 상대다.
다라 본인도 강할뿐더러 별자리의 권능이 너무 압도적이었다.
시야에서 다라가 휘두르는 공격을 의식하는 한편 우주에서부터 행해지는 별자리의 연계를 염려해야만 했다.
“타천사... 아니, 정의의 대천사 사리엘. 네 명예를 위해서 차라리 내가 너를 죽이겠다.”
칼과 방패를 버린 다라가 활을 꺼내 쥐었다.
하늘에 수놓인 별자리의 형태가 다라의 변화에 호응했다.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날렵한 여자 사냥꾼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끼릭...! 꽈아아아아아앙!!
핵폭탄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눈앞에서 다라가 쏜 화살은 크게 위협적이지 않은 반면 별로 이루어진 화살은 행성을 꿰뚫어버릴 기세로 떨어졌다.
연신 혼투격을 날려대는 그리드에게 재차 발이 묶여있던 사리엘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위기를 감지한 것이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별 화살을 등지고 선 그녀를,
덥썩!
그리드가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다라를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다.
“네가 뭔데 사리엘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거지?”
“...!”
다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드의 살기가 워낙 강력해서 압도당하는 동시에 혼란에 휩싸였다.
방금 전까지 사리엘을 죽일 듯이 패고 있던 자가 이제와 사리엘을 품에 안고 저런 말을 지껄이니 황당한 것이다.
스아아아아아!!
무대의 풍경이 사라지며 강철의 협곡이 펼쳐졌다.
사리엘의 몸을 감싼 수십 개의 발할라가 별의 화살을 막아줬다.
그리드의 의지가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그 탓일까.
정작 그리드는 지켜지지 못했다.
그리드의 심상이 사리엘을 아군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그녀가 그리드를 ‘공격’하는 걸 인식하지 못한 걸 수도 있다.
푸우욱...
갑옷과 견갑 사이의 이음새를 비집고 들어간 사리엘의 손이 그리드의 겨드랑이를 꿰뚫었고,
[아... 아아... 안 돼...]
그리드가 아닌 사리엘이 신음했다.
오열하기 직전의 표정으로 피눈물을 쏟아냈다.
이성을 완전히 잃은 상태로도 그리드를 해친 것을 후회하는 것이다. 무척 혼란스럽고 괴로워보였다.
“정신... 차리라고... 쿨럭...”
검붉은 피를 쏟아내며, 그리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사리엘의 양 뺨을 붙잡았다. 그리드의 손이 워낙 크고 사리엘의 얼굴이 작아서 얼굴이 완전히 감싸졌다.
상황과 모습이 비극적인 순정 만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기에 여성 관객들이 울컥하는 가운데.
또각, 또각, 또각...
누군가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사리엘과 다라가 권능을 쓴 시점부터 이 승부는 의미가 없어졌다.
그리드 외에 또 다른 누군가가 난입해도 큰 문제가 없는 상황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아이린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템빨제국의 황후.
템빨신 그리드의 부인인 그녀는 필시 특별한 존재다.
하지만 신들의 전쟁에 난입해서 무사할 리가 없었다.
“어서 내려와요!”
“위험하잖아!”
아이린의 인기를 실감시키는 사람들의 다급한 외침.
그녀의 안전을 걱정해서 소리치는 사람들은 거의 절규하는 듯했다. 당장 무대 위로 뛰어들 기세인 사람도 많았다.
소란 속에서.
“사리엘.”
아이린은 꿋꿋이 그리드와 사리엘의 곁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은 아찔해졌다.
이성을 잃은 사리엘이 아이린을 해코지하는 장면을 자연히 떠올렸다.
하지만 의외로.
[아이린 님...]
사리엘은 아이린을 알아봤을 뿐더러 적대심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도리어 평소처럼 공손했다. 애써 미소 지으려고 노력하는 기색도 보였다.
[당신께는... 아무런 죄가 없군요...]
신들의 죄마저 낱낱이 밝혀내는 사안이 아이린의 죄를 밝히진 못했다.
그녀처럼 깨끗한 존재는 사리엘도 처음 보는 것이어서 감탄하고 말았다.
한 순간 이성이 돌아와 버릴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또각.
안도하듯, 기뻐하듯 희미한 미소를 짓는 사리엘에게 아이린이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사람들은 아이린이 사리엘을 포옹하는 전개를 상상했다.
보통은 그런 장면이 나올 타이밍이었으니까.
하지만...
짜아아악!!
아이린은 의외로 사리엘의 뺨을 날려버렸다.
위력이 어찌나 강력한지 사리엘의 얼굴이 아주 살짝 돌아갔을 정도다.
소리도 몹시 커서 사람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이린의 맑고 또렷한 음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모든 죄를 죽음으로 갚아야 한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
“폐하께서 범해오신 죄는 지금의 제국과 지상을 만드는 발판이 되었어요. 발판이 되지 못했던 죄는 충분한 반성과 봉사로 사하셨습니다. 폐하를 비난할 수는 있어도 감히 벌할 순 없는 거예요.”
[아... 아아아...]
사리엘도 알고 있었다.
그리드가 천상의 신들과 같다고?
전혀 달랐다.
천상의 신들이 범한 죄는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었던 반면 그리드의 죄는 대부분 타인을 위한다는 전제로 행해졌다.
도덕적으론 결코 면죄부가 될 수 없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선 이해가 가능했다.
무수히 많은 그리드 ‘빠’와 ‘까’가 긴 세월 공존해온 이유다.
아무튼 이에 대해선 길게 논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드라는 인물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꾸준히 변해왔다.
지난날의 행적을 통해서 현재의 그리드를 평가하는 건 다소 가혹했다.
애초에 아이린이 당장 바라는 건,
“정신 차려요, 사리엘.”
사리엘이 이성을 되찾는 것이다.
“정의의 천사 사리엘도, 타천사 사리엘도 필요 없어요. 제가 바라는 건 매일 저와 함께 티타임을 즐겼던 제 친구 사리엘이에요.”
[...아이린 님...]
마음속에 맺힌 한은 쉽게 풀리지 않는 법이다. 어쩌면 영원히 응어리진 채 존재할 수도 있다.
아이린은 감히 자신이 사리엘의 한을 풀어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어제의 상처를 되새기기보단 내일 마실 차를 고민해 봐요.”
순간.
사리엘의 몸을 감싼 군청색의 마기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찬란한 신성과 아름다운 금발이 되돌아오며 그녀가 흘리는 눈물도 투명하게 변해갔다.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이성을 되찾은 사리엘은 가장 먼저 그리드 앞에 무릎 꿇었다.
내가 섬기는 신께 감히 나의 잣대를 겨눴다.
내가 섬기는 신을 감히 내가 해쳤다...
커다란 죄책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안 그래도 넝마가 된 그녀의 마음에 새로운 상처가 아로새겨졌다.
그 상처를,
“천사가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지 죄는 뭔 죄야.”
그리드가 보듬었다.
“돌아와서 다행이다, 사리엘.”
“...”
태양처럼 밝은 그리드의 미소가 사리엘에게 안식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