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1권 - 12화
앞으로 단 1번.
1번만 더 이기면 템빨계가 승리하는 상황이 도래했다.
계산이 빠른 상인들은 제국에 투자하는 규모를 대폭 확대할 계획을 짰다.
템빨단이 지상의 패권을 자력으로 지켜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직전이었으니까.
플레이어가 일군 세력.
하물며 같은 플레이어에게 호의적인 그리드의 세력은 본래부터 가치가 높은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번에 신들의 침략마저 막아내고 안전성까지 증명한다면 가능성이 무한한 시장으로 거듭날 터였다.
“이 정도였나...”
랭커들은 연신 침음했다.
초월자라는 경지가 익히 알려진 시대다.
당대 하이랭커들의 목표는 한계를 돌파하고 인간의 경지를 초월하는 것에 있었다.
머지않았다고 자부하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잃었던 야망을 되찾아가는 사람들이 득실거리게 됐단 뜻이다.
한데 오늘.
그들은 초월 내에서도 경지가 세분화 된다는 사실을 실감했고 초월조차 넘어서는 절대지경을 수차례 목도하기도 했다.
신들과 맞선 그리드의 사도들이 선보였다.
언젠가는 사도들과 동등한 입장이 되어 그리드에게 중히 쓰이고 싶다는 바람을 품었던 랭커들 입장에선 몹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기껏 되찾은 야망이 다시금 희미해졌다는 의미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의기소침 한다고? 한심한 놈들.”
술렁임을 읽은 아스카가 콧방귀 뀌었다.
이 정도 수준의 좌절감은 여태껏 몇 번이나 느껴오지 않았나?
이젠 그러려니 할 법도 한데 매번 절망하는 모습들이 웃기다.
애초에 주제 파악 못하고 들 뜬 게 문제였다.
우리가 누구에게 도전하고 있는지 늘 자각하고 있다면 들 뜰 일 자체가 없었을 텐데.
‘그리드는 태양이라고 봐야 옳아.’
한없이 찬란하지만 다가가기 힘들 뿐더러 가까워질수록 괴롭다. 각오했던 것 이상의 격차를 실감하게 되기에.
그리드를 정의해본 아스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높은 첨탑 위.
도시 곳곳을 관중석으로 삼은 관객들과 무대의 풍경이 한 눈에 담기는 명당이다.
“남은 대결은 볼 필요 없어. 돌아가자.”
이제 남은 사도는 사리엘과 지크다.
아스카의 흥미를 끌기 힘든 대상들이었다.
사리엘은 대천사 출신으로 신성력을, 지크는 고대의 룬어를 다루기에.
백날 봐야 공부가 안 되는 것이다.
“네, 아가씨.”
테디베어가 수행했다.
대결의 결과까진 보시는 게 낫지 않겠냐는 의견을 낼 법도 한데 군말 없이 따랐다.
아스카의 입 꼬리가 씰룩이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대결을 관람하는 도중에 어떤 영감을 얻어 손이 근질거리는 눈치였다.
***
“오오...”
사리엘을 목격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비슷했다.
탄식하고 만다.
그녀, 혹은 그의 외모가 워낙 아름답고 고귀한 까닭이다.
온화한 표정과 깊은 눈동자만으로 성스러움을 자아냈다.
빛의 고리, 순백의 날개, 신성력 등.
천사를 상징하는 요소들을 드러내지 않고 숨겨도 감히 범접하기 힘든 신성한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다, 따위의 말을 해봤자 가식으로 들리겠지.”
무대 위로 오른 신이 말했다.
다라.
별자리를 관장하는 신이다.
제라툴을 쫓아 강림한 신들 중 그나마 가장 인지도가 있었다.
일부 지역의 몽크들이나 천문학자 등이 다라의 희미한 신화를 찾아 숭배해온 덕이다.
‘사리엘, 가장 고결했던 천사여.’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말이다.
만인이 지켜보는 앞인 까닭이다.
이곳에서 신의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템빨신의 성전(서사시)에 먹혀버린 신들의 모습을 앞서 목격하지 않았나.
하지만 이 말은 꼭 전하고 싶었다.
“미안했다.”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나를 부디 용서해다오.
스아아아아...
하늘의 별들이 움직였다.
유페미나처럼 마법으로 빚어낸 별의 형상들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진짜 우주의 별들이 움직이는 것이다.
다라의 의지에 호응해서 여태껏 세상에 없던 별자리를 만들어냈다.
검과 방패를 쥔 전사의 별자리였다.
제라툴의 검술을 구사하는 다라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따라했다.
하염없이 거대한 저 우주의 전사가 휘두르는 검은 본래 지상까지 영향력을 행사해야 옳았다.
하지만 그건 다라의 권능이다.
다라는 이번 성전의 본질을 알기에 권능의 효과를 당연하게 봉인했다.
“시작하지.”
결연한 얼굴로 말하는 다라의 속내는 몹시 우울했다.
그가 제라툴에게 검술을 배운 이유는 강해질 필요성을 느껴서다.
필요성을 느낀 이유?
사리엘처럼 억울한 일을 겪는 천사를 두 번 다신 방관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누구보다 아스가르드를 사랑하고 누구보다 여신의 뜻을 잘 헤아려 질서를 수호했던 천사가 바로 사리엘이다.
한데 정작 신들의 죄를 들추어내자 추방당했다.
사리엘을 만들고 역할을 부여한 신들이 도리어 사리엘을 부정한 격이다.
몹시 추악했다.
하지만 다라를 비롯한 수많은 신들은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약했으니까.
신성도, 무력도 내세울 게 없으니 말에 무게가 깃들지 않았다.
그때 많은 신들이 다라와 똑같은 생각을 품었다.
우리가 나아지자.
높은 신들이 더 이상 추해지지 않도록 돕기 위해선 우리가 그들에게 대항할 힘을 지니는 수밖에 없다.
이때부터 일부 신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나아지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중 다라는 무력의 단련을 선택했다.
‘너를 위해 쌓은 힘을 너를 쓰러뜨리는데 쓰게 될 줄은.’
씁쓸하고 슬펐으나.
다라는 마음을 추슬렀다.
제2의, 제3의 사리엘이 탄생하지 않도록 막기 위해선 사리엘을 쓰러뜨릴 필요가 있었으니까.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라는 자신의 무위를 뽐내고 만인에게 숭배 받을 각오다.
굳이 사용하지도 않을 별자리를 움직인 이유 또한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할 수단으로 써먹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그는 순수한 의도와 달리 철두철미했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말이다.
그리드도 눈치 챘다.
‘세 번짼가.’
미르를 꺾은 소년 신 다리너와 브라함에게 신성의 일부를 빼앗긴 카들로.
그 다음으로 강한 신이 바로 저 다라 신이었다.
사리엘이 감당하는 건 사실상 힘들다고 봐야 옳았다.
‘괜찮다, 사리엘.’
앞서 미르에게 말했듯이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건 너희들 본인의 가치다.
반드시 이기겠다는 부담감은 버리고 성장의 기회로 삼아라. 귀중한 적을 만났다고 생각해라...
그리드가 바랄 때였다.
파츠측!!
지상이 술렁였다.
여섯 쌍의 날개.
사리엘이 펼친 정의와 학살의 날개가 기이하게 변해가는 것이다.
날개를 이루는 순백의 깃털 하나하나가 칼날처럼 단단하고 날카롭게 변했다.
그리드에게 죽은 제3위 대천사 미카엘.
본래 그의 것이었던 날개에 내장 된 기능이 발현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학살을 위한 형태였다.
“으윽...”
이를 악 문 사리엘이 양팔로 제 가슴을 감싸 안았다.
괴로운 얼굴이다.
무언가를 억누르기 위해 애쓰는 표정에 가까웠다.
그리드의 얼굴이 굳었다.
‘마기...’
다라의 사죄와 친절은 이기적인 것이다.
다라 본인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행위에 불과했다.
정작 사리엘은 마음 속 깊이 묻어뒀던 상처가 들쑤셔져 간신히 억제해온 어둠을 드러내게 되었다.
마기를 통제할 수 없었고 그로인해 힘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사리엘...!”
이변을 눈치 챈 다라가 다급히 손을 뻗었다.
사리엘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보듬어줄 생각밖에 없었다.
이 순간의 그는 인간들과 천상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진심이다.
하지만 사리엘이 거부했다.
과거에 그녀가 입었던 상처가 너무 컸다.
죄라는 것이 고작 한 마디의 사과로 씻어질 것이었다면.
나는 왜 천상에서 쫓겨나 억겁의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나.
무의식이 그녀를 분노케 했고 잠재 된 마기를 키워갔다.
그리드의 신성을 닮았던 신성이 군청색으로 변했고 찬란하게 빛났던 금색의 머리카락은 붉게 물들어갔다.
피눈물을 흘리며 질끈 감겼던 그녀의 두 눈이 다시금 뜨였을 때.
“별자리의 신 다라, 당신 또한 죄인입니다.”
짙은 회색으로 물든 눈동자가 다라를 투영했다.
눈동자의 색이 탁해서인지 일그러진 형태로.
“당신은 신들이 범한 죄를 알고도 외면했을 뿐더러 신들의 죄를 추궁한 끝에 궁지에 몰린 저를 방관했지요.”
“아무런 힘도 없던 내가 그럼 뭘 어찌해야 했단 말인가?”
다라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렸다.
정의의 천사 사리엘의 권능.
바로 ‘사안’에 낱낱이 해부당하고 치부를 드러낸 기분을 느낀 까닭이다. 몹시 부끄럽고 불쾌했다.
“힘이 없는 건 면죄부가 되지 않아요. 당신이, 당신들이 한 마디씩만 거들어줬어도 신들은 죗값을 피하지 못했을 겁니다. 다라 당신도 내심은 알고 있잖아요?”
방관은 큰 죄다.
레베카 여신께서 몸소 증명했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하며 다라를 비판하는 사리엘이었지만,
“...죽어요.”
그녀의 의식은 딱 거기까지였다.
억눌러온 마기가 폭발하고 사안까지 발동하면서 그녀의 의식은 완전히 끊어졌다.
힘이 폭주하기 시작됐다.
그리드의 사도가 된 이후로 쭉 억눌러왔던 힘.
하물며 그리드로 인해 미카엘의 힘까지 흡수하게 된 그녀가 해방시킨 전력은 그리드의 상상마저 초월하는 것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어?”
사리엘의 돌진 후폭풍으로 비산하는 깃털들.
그중 일부가 높은 하늘까지 솟구쳐 그리드의 인공감각을 자극했다.
한 발만 늦게 반응했어도 깃털이 뺨에 스쳐서 핏물을 흘렸을 것만 같았다.
당황해서 넋을 잃은 그리드와 반대로,
‘이게 이렇게 된다고?’
라우엘은 좋아 죽으려고 하고 있었다.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쥔 채 간신히 환호를 억눌렀다.
사리엘이 권능을 사용한 시점부터 이 대결은 무효가 됐으니까.
사리엘의 승리를 점치기 힘들던 상황에서 이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너무 억지가 아니냐며 신들이 따질 일도 없다.
현재 사리엘은 ‘마기가 폭주해서’ 이성을 잃고 권능을 사용한 거니까.
게다가 그녀에게 마기를 내재시킨 범인이 바로 천상의 신들이다.
천상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권패도 없다.
사리엘이 학살의 날개를 펼치고 돌진한 시점부터 다라도 권능으로 대응했기에.
큰 위협을 느낀 건지 반사적으로 별자리를 움직였다.
별로 이루어진 우주의 거대한 전사가 휘두른 거검이 무대 위로 떨어졌고 대결은 개판이 되고 말았다.
으아아악...
하늘에서 비명이 들려오는 듯했다.
제라툴의 비명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