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1권 - 11화
오만, 질투, 욕망 따위에 매몰된 것이 아닌 이상에야.
신이 인간을 혐오할 이유는 없다.
특히 다리너는 첫 번째 인간의 영혼을 빚은 신이다.
언젠가 인간이 죽었을 때 천상에 올라 행복하길 바라며 최대한 아름답게 빚어냈다.
인간의 본질이 선하단 사실을 여신 만큼이나 잘 알며 사랑했다.
다리너는 양반의 본질 또한 선하다고 믿었다.
반인반신.
한울이 양반을 만들 때 사용한 재료 중 하나는 다리너가 만든 인간의 영혼을 참고한 것이기에.
실제로 눈앞의 미르는 훌륭한 영혼을 지녔다.
다리너가 처음 빚은 인간의 영혼처럼 따스하고 아름답다.
꺾고 싶지 않은 꽃과 같았다.
어디까지나 사적인 감상이었다.
까차창!!
미르의 검이 두꺼운 대검의 칼날을 타고 미끄러진다. 대검에 실린 무게를 털어내듯 흘려내고 벌어진 틈새로 검을 꽂아 넣었다.
다리너의 깊은 눈동자가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노을을 마주한 것처럼.
그를 베는 건 황혼이었다.
심지어 그리드의 황혼.
미르가 사도의 자격으로 휘두르는 중이다.
꽈앙!
비스듬히 기우는 대검을 곧추세운 다리너가 황혼의 무게를 견뎠다. 쉽지 않다는 듯이 침음을 삼키면서.
미르의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손목이 꺾이는 방향과 무관하게 사방팔방 번지는 검로가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황혼에 담긴 그리드의 신성만큼이나 화려한 것이다.
눈으로 좇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 지금은 그리드의 신성과 맞물린 까닭이다.
미르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들불마냥 번지는 그리드의 신성이 안 그래도 복잡한 미르의 검로를 티나지 않게 가렸다.
앞서 검성 크라우젤과 조합됐을 때와 같았다.
문제는 미르의 검속이 차츰 가속하고 있다는 점.
다리너가 뮐러의 검술을 재현할 때마다 미르의 무의식을 건드렸다. 심층 아래 가라앉아 있는 기억을 조금씩 끄집어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눈치 챘다.
미르가 실시간으로 강해지고 있음을.
“내가 그대의 은자가 되는 격인가.”
미르의 검을 감각으로 읽고 쳐낸 다리너가 멈췄던 호흡을 토하며 말한다. 숨결과 함께 번지는 신성이 반투명했다.
무색에 가까운 형태.
언젠간 제라툴이나 소별왕과 같은 위계에 도달할 것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하지만 정작 다리너는 알고 있다.
자신에게 상승은 없음을.
여신을 돕는 일을 한다는 건 그의 자부심인 동시에 그를 옥죄는 속박이었다.
여신께서 생명을 창조하실 때 그가 큰 힘을 보태고 있다는 사실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테니까.
여신의 위대한 은덕을 인간들에게 강렬하고 확실하게 전파하기 위해선 당연히 그래야 옳았다.
“예, 당신을 만난 일 또한 제 운명 중 하나인 것이겠죠.”
“...”
내가 그대의 은자가 되는 격인가.
다리너는 다소 질린다는 심정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절대로 진지하게 한 말이 아니라 스치듯 뱉은 푸념에 가까웠다.
한데 미르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녕 내게 은혜를 입었다고 말하듯이.
순간.
다리너의 마음이 어떤 감정으로 충만해졌다.
반투명했던 그의 신성이 조금 더 투명하게 변모해갔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자신이.
여신께서 저 많은 존재들을 창조하실 때 그들의 영혼을 빚는 작업을 하고도 세상에 기억되지 못했던 자신이.
이 순간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쳤고 기억 된 것이다.
하물며 썩 나쁘지 않은 형태로.
“...그대 또한 나의 은자다.”
꽈르릉!!
묘한 표정을 짓고 말한 다리너의 대검이 더 큰 천둥을 울렸다.
가일층 가속한다 싶더니 검에 깃든 무게 또한 무거워졌다.
미르가 기억하는 수백 년 전 뮐러의 검술보다 한층 더 강력하게 진화해버린 것이다.
츠카카카칵!!
검로를 꿰뚫고 솟구친 대검을 막아낸 미르의 몸이 수십 미터 바깥까지 밀려났다.
즉시 상체를 기울이고 회전하였는데, 만약 생각이라는 과정을 거친 판단이었다면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그의 장발이 대검에 싹둑 잘려나갔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깃든 양반의 격이 속절없이 허물어졌단 의미다.
대검의 두꺼운 날이 무색에 가까워진 신성에 의해 극강의 예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채채채채챙!!
공방의 수준이 초월자의 범주를 언뜻언뜻 웃돌기 시작했다.
황혼에서 번진 주황색 신성이 여러 갈래로 갈라질 때마다 한 발 늦은 폭음과 충격파가 발생하며 거대한 무대를 뒤흔들었다.
미르의 몸에만 상처가 늘어났다.
사람들은 그가 베이는 순간을 포착하지 못한 채 나부끼는 핏물을 목도할 뿐이다.
[양반 미르, 훗날엔 다를지 모르나 이번엔 내가 이겼다.]
공간을 채운 다리너의 의념이 미르의 뇌리에 못 박혔다.
순간.
점차 인지하기 힘들어지는 다리너의 공격에 난감함을 느끼던 미르가 황혼을 쥔 손에 감각을 집중시켰다.
급소를 파고드는 공격들을 아무런 저항조차 않고 허용하면서, 그 희생을 대가로 다리너의 다음 공격을 예측하고 전력의 검술을 전개했다.
사방신의 힘을 모조리 동시에 운용하는 검술이었다.
사방신이 섬기고 자신이 섬기게 된 템빨신의 황룡을 숭상하는 의미를 지녔다.
푸화하하학!!
다리너의 대검이 미르의 상체를 사선으로 베어냈고,
[지금, 양반 미르는 당신의 손에 확실하게 죽었습니다.]
포효하는 황룡의 형상을 그려낸 미르의 황혼은 다리너의 목을 갈랐다.
[다음번엔 템빨신의 사도라 칭해주십시오.]
미르의 의념이 다리너에게 실시간으로 전달 된다.
의식의 흐름이 공간의 흐름을 쫓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절대자의 경지를 이루기 직전에 도달한 다리너의 공간에 미르가 간신하나마 적응하고 있었다.
푸화하하학!!
미르가 피를 분수처럼 뿜어냈다.
쓰러질 듯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으나 그건 베였기 때문이다.
그의 두 발은 단단히 대지에 못 박혀 있었다.
반면 다리너의 목에선 옅은 핏물이 흘러내릴 뿐이었다.
옛 실력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한 순간 초월한 미르의 공격이 제대로 통하질 않았다.
한 발 늦었고, 조금 옅었다.
신성으로 목의 상처를 지열한 다리너가 말했다.
“내가 바알이나 리파엘이었다면 베였을 거다. 그것이 그대의 자질이니까.”
서사시에 새겨지는 말이었다.
제라툴 다음으로 고강했던 천상의 신이 미르의 실력과 가치를 증명했다.
“템빨신의 사도 미르, 여신의 사도가 간신히 꺾었다.”
대검을 거둔 다리너가 서사시의 성질을 역으로 이용했다.
미르를 추켜세움으로써 템빨신의 가치를 높였고 궁극적으론 여신의 명예를 높였다.
정작 스스로는 배제했다.
여신의 사도라는 지위를 밝히되 이름은 대지 않았다.
어차피 무명의 신이었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같을 것이기에.
그는 다만 미르의 인정을 받은 것으로 족하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미르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어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지 않도록.
잘 보이지 않게 된 신성으로 미르의 상처를 이어 붙여준 그가 무대를 내려가던 도중 걸음을 멈췄다.
“위대하신 템빨신께서 영혼의 신 다리너의 훌륭한 활약을 치하하셨소.”
어느 인간의 외침 때문이었다.
그리드의 대변인 후로이의 외침이다.
덕분에 다리너의 신격이 한층 더 강화되고 말았지만 템빨신의 서사시 역시 강화됐다.
템빨신이 여신의 사도를 치하함으로써 여신보다 낮지 않다는 뜻을 전파했으니까.
“...당했구나.”
기쁜 듯, 분한 듯.
애매한 미소를 지은 다리너가 무대에서 내려갔고.
우와아아아!!
사람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창공의 그리드는 통쾌함을 느꼈다.
‘지금쯤 제라툴은 울고 있겠군.’
제라툴 입장에선 기껏 힘들게 얻은 귀중한 승리였다.
한데 정작 다리너는 제라툴의 명예 따위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승리가 무효가 되는 건 아니지만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것이다.
“...기껏 신의 힘을 빌리고도 진 저를 벌하여주십시오.”
어느새 하늘에 오른 미르가 그리드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두 손 위에 공손히 올린 황혼을 돌려주면서, 마치 그걸로 제 목을 쳐달라는 듯이 목을 내밀었다.
그리드가 그의 어깨를 붙잡아주었다.
“고개 들어. 기껏 잘 싸워놓고 왜 그래?”
“저는 패배를...”
“무사히 돌아왔으면 됐지. 너무 멋졌다.”
“...”
환국의 양반들은 어떤 실패를 겪을 때마다 죄인 취급을 받았었다.
실제로 미르는 소중했던 기억조차 소거당하지 않았나.
하지만 템빨계에선 달랐다.
이곳에선 실패가 죄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논밭의 양반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
“놔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스가르드.
대천사 리파엘의 손을 뿌리친 제라툴이 으름장을 놓았다.
여신께서 자리를 비우신 공간에서 상석을 차지한 도미니언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앞으로 남은 두 번의 대결에서 이기면 비긴다. 내가 재차 강림해서 그리드와 싸울 명분이 생기니 그때 설욕하면 돼.”
“네 설욕을 운운할 자리가 아니다.”
건강과 지혜의 신 쥬다르가 말했다.
“네가 마족 출신의 신이 탄생하도록 일조한 죄를 묻기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 본질을 흐리지 마라.”
“개소리를...! 그깟 악신 따위 안중에도 없으면서 허튼 소리 마라! 네놈들이 집착하는 건 아스가르드의 명예 아니냐! 내가 그 명예를 지켜내면 모든 게 해결 될 문제다!”
“어째서일까.”
급기야 언성을 높이는 제라툴의 말을 끊은 쥬다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네 탄생이 비록 늦었다 한들 명색이 신이건만 왜 그토록 감정적인 것이냐. 정녕 치우를 상대로 품은 열등감이 원인일까. 만약 그렇다면 네가 인간과 다른 점은 무엇이냐?”
“열등...감? 내가 인간과 닮았다고?”
제라툴이 이성의 끊을 놓았다.
쥬다르가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눈에서 동공을 지우고 흰자위만 드러낸다 싶더니 즉시 출수했다.
어느새 신들이 앉은 석탁까지 도달해 쥬다르에게 검을 휘둘렀다.
당연히 막혔다.
쥬다르가 직접 나설 것도 없이 쥬다르를 섬기는 신들이 세운 방벽이 가로막았다.
“무신... 그것은 애초에 다른 이가 짊어질 만한 이름이 아니었다.”
치우를 제외한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므로 치우가 유일한 신인 것이다.
제라툴의 검에 깃든 무게가 한없이 가볍다는 사실을 실감한 쥬다르가 고개를 저었다.
그를 섬기는 신들은 눈과 귀, 코와 입에서 피를 쏟고 있었다.
제라툴의 검을 막아낸 여파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곳 아스가르드에서 제라툴은 무척 강했다. 아무런 축복도 받지 못하는 지상에서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신의 아들들에겐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엄청난 수치심을 느낀 제라툴이 얼굴을 대춧빛으로 물들인 채 씩씩거렸다.
더 이상 함부로 날뛰진 못했다.
쥬다르와 자신의 격차를 실감하고 말았기에.
쥬다르가 리파엘에게 눈짓했다.
“어서 옥에 가두지 않고 뭐하는가?”
“하하... 네, 서두르겠습니다.”
결국.
재차 리파엘과 가브리엘에게 붙잡힌 제라툴은 헥세타이아가 갇혀있는 옥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혹시 또 멋대로 지상에 강림해서 활개를 칠까 우려하여 내린 조치다.
여신이 주기에 든 천상에선 도미니언과 쥬다르가 곧 법칙이라지만, 그들은 제라툴과 달리 선을 지킬 줄 알았다.
여신께서 창조하신 제라툴이 아무리 많은 죄를 범했다 한들 여신의 허락 없이 해치진 않고 그저 속박할 뿐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일에 무관심하기도 했다.
리파엘이 은연 중에 활개칠 수 있는 이유였다.
“제길...! 빌어먹을!! 그리드으으으!!”
고성을 내지르며 끌려가는 제라툴.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드를 원망하는 그를 여러 신들이 한심하다는 듯이 노려보는 가운데.
“꼴좋네요~”
기둥 뒤에 숨은 채 모든 과정을 지켜본 금전의 신 베니스는 히죽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