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634화 (1,632/1,794)

템빨 81권 - 10화

‘아무래도 누적 된 업적의 차이인가.’

유페미나와 시아라는 0.1초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전투 불능 판정을 받았다.

물론 시아라는 죽지 않고 유페미나 혼자서 사망하긴 했지만... 대결은 누가 봐도 무승부로 결착이 난 것이다.

한데 월드 메시지가 잠잠했다.

서사시가 유페미나의 활약을 기록하곤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위대한 템빨신’으로 귀결되는 내용일 뿐.

유페미나 개인의 업적을 칭송하는 별도의 월드 메시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메르세데스, 크라우젤과 같은 것이다.

신과 싸워서 승리했다고 그 업적을 칭송 받고 곧바로 ‘신’에 등극한 존재는 브라함이 유일했다.

브라함의 전투 내용이 유독 독보적이어서?

그렇게 해석하기엔 메르세데스의 활약도 엄청났다.

신성을 흡수해버린 브라함의 정신 나간 활약엔 미치지 못했다고 하지만 멜로리를 실력으로 압도하지 않았나.

‘오늘날의 활약뿐만 아닌 지난 업적들까지 고려한 판정이겠지.’

상황을 헤아리던 크라우젤이 문득 새로운 의문을 품었다.

‘...아니면 혹시 그녀들도 나와 같은 것을 얻었나?’

신살.

그리드의 황혼으로 우주 검을 전개했을 때다.

신을 단숨에 두 쪽으로 갈라버린 업적을 높이 평가 받은 건지 희미하게나마 <신살의 자격>이 싹텄다.

굉장히 불길한 힘이라는 듯이.

세상에 알려져선 안 되는 힘이라는 듯이 월드 메시지가 아닌 크라우젤 개인에게만 전달 된 내용이었다.

‘...아니, 그녀들이 이 힘을 얻었을 것 같진 않군.’

신살자는 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쯤이야 크라우젤도 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신화 등급을 보장 받는 유페미나에게 신살자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템빨신전 입구마다 세워진 기사신상. 즉, 메르세데스의 석상을 떠올려 보면 메르세데스 또한 신살자보단 신이 될 운명이었다.

‘조금 쓸쓸하긴 하군.’

혼자보단 함께가 좋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크라우젤이다.

그리드와 템빨단과 함께하며 깨달았다. 익숙해졌다.

언젠가 하나둘씩 템빨계의 신이 될 템빨단원들과 달리 홀로 신살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자 썩 기쁘진 않았다.

물론 배부른 소리라는 건 자각하고 있다.

신살의 자격.

신을 죽일 힘으로 진화할 이 자격이 얼마나 가치 높은 축복인지 알고 있었기에.

‘...다시 혼자가 되더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족하다.’

유페미나와 시아라의 무승부가 템빨계의 유리한 스코어를 유지시키고 있었다.

이번 성전에서 템빨계는 아스가르드를 확실히 앞서나가고 있는 셈이다.

대중을 열광시킬 만한 결과였다.

하지만 정작 템빨단원들은 아스가르드의 저력을 실감하며 긴장하고 있었다.

현재 템빨계가 싸우는 상대는 아스가르드 전체가 아닌 일부.

무신 파벌에 불과했으니까.

제라툴 외엔 주신이 없었으며 그조차도 권능을 봉인한 상태로 싸우고 있었다.

언젠가 템빨단이 아스가르드에 오르는 날.

그곳에서 마주칠 신들은 얼마나 막강할까.

하물며 스킬을 제한 없이 난사할 주신들의 위용은 상상만으로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므로 크라우젤은 더욱 더 성장할 필요성을 느꼈다.

Satisfy가.

이 세계가 온전히 사람들의 것이 되는 날까지 쉬지 않고 박차를 가해서 강해질 필요가 있음을 알았다.

신살의 자격을 짊어진 자의 의무?

아니, 템빨제국의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자의 의무다.

오늘 아침 아이린 황후에게 받았던 찻잎과 쿠키를 떠올린 크라우젤이 재차 각오를 다지는 순간이었다.

“스승님, 저도 언젠간 이런 무대에 오를 수 있을까요?”

로드가 다가와서 물었다.

그리드와 아이린의 장점만 쏙 빼닮은 아이.

혹자는 호부견자를 운운할 정도로 로드가 부친에 비해서 손색이 크다고 비판하곤 했지만 그건 로드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드의 문제였다.

그리드가 너무 빠르게 압도적으로 강해져왔기에.

로드는 이미 훌륭했다.

이 상태면 몇 년 내로 초월자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젊은 시절의 그리드와 비교해서 압도적인 기연을 등에 업은 까닭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로드는 그리드와 성격이 닮았다. 노력을 멈추는 법 없이 손에 넣은 기연을 적극 활용했다. 그리드의 삶을 고스란히 답습하며 많은 경험과 배움을 얻기도 했고.

“당연히. 충분히 가능하다.”

드문 미소를 머금은 크라우젤이 로드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로드가 어린 시절부터 쌓아올린 정이란 크라우젤 본인도 종종 놀랄 만큼 깊었다. 로드가 현실에도 존재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문득 품게 될 정도로.

궤도를 바꾼 줄 알았던 운석이 달의 이면에서 발견됐다는 기이한 뉴스를 접했을 당시.

SF영화의 도입부를 보는 것 같다고 느끼면서 지구와 Satisfy가 합쳐지는 상황을 상상해봤을 지경이었다.

“반드시... 반드시 아버지와 스승님과 나란히 서고 싶어요. 두 분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로드가 고즈넉한 얼굴로 다짐하는 그때.

톡.

물 같은 것이 로드의 머리카락 위로 떨어졌다.

‘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다니?

의아해하며 손으로 빗물을 쓸어낸 로드가 기겁했다.

손에 묻어난 건 빗물이 아닌 핏물이었던 까닭이다.

로드의 시선이 자연히 그리드를 좇았다.

저 높은 하늘 위에 고고히 서있는 아버지.

로드의 시야엔 아주 어렴풋이 포착 됐다.

그리드의 몸 상태를 살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로드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부친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다, 당장 고모님께 말씀을...”

“됐다. 치료를 바랐다면 그리드가 진즉 루비를 불렀겠지.”

“...”

로드는 부친의 마음을 헤아렸다.

자신의 상처를 우연이라도 누군가가 목격하는 걸 바라지 않으시는 거겠지.

그게 아버지께서 당연하게 짊어져온 책임이고,

“언젠간 너 또한 짊어지게 될 책임이다.”

내가 계승해야 할 책임이다.

“...예.”

로드의 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다른 이의 심상처럼 화려하진 않았다.

다만 아버지의 모습을 새길 뿐이다.

***

관중들이 크게 술렁였다.

무대 위로 소년 신이 오른 까닭이다.

브라함이 가장 경계했던 대상.

마지막 대장전에 출전할 줄 알았던 그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일찍 무대에 올랐다.

하물며 그의 상대로 나선 건 지크가 아니었다.

“한 수 배우겠습니다.”

미르.

가장 최근에 사도가 된 인물.

대중에겐 다소 낯선 대상이었다.

양반 출신이라는 소문이 아름아름 퍼지긴 했지만 글쎄...

양반은 그리드가 일찍부터 해치우고 다녔던 존재들이다.

그리 고강할 것 같지 않다는 게 세간의 평가였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은 미르가 대천사 리파엘을 상대로 그리드를 지켜줬단 사실을 알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극히 소수인 것이다.

하물며 지금의 미르는 그 당시 미르와 달리 기운이 적어보였고.

“상태가 안 좋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템빨단원들이 기억하는 미르는 몹시 표표한 인물이었다.

그의 대수롭지 않은 한 가지 행동이 자연히 눈에 각인 됐고 고작 한 마디의 말이 귀에 강렬하게 꽂히곤 했었다.

하야테와 조금쯤 닮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미르에겐 그런 특별한 느낌이 없었다.

“버리는 패... 라고 봐야겠지.”

미르의 자격을 의심하는 템빨단원은 없었다.

그를 사도로 삼은 건 그리드니까.

다만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상대가 너무 나빴다.

흘러가는 상황을 토대로 미르를 버리는 패라고 인식했다.

과연.

꽈르릉!

벽력처럼 쏘아진 소년 신의 대검이 천둥소리를 터뜨렸을 때.

미르는 이미 피를 토하며 쓰러진 상태였다.

충돌할 때 발생한 충격 여파가 얼마나 컸던 건지 도를 쥔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철철 흘러내렸고 손가락 몇 개가 기이한 방향으로 꺾여있었다.

소년 신이 무표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야탄께선 리파엘을 이길 심산으로 바알을 빚으셨던 반면 한울께선 리파엘과 비기라고 너를 빚으셨구나. 그분다운 조심성이 느껴진다. 네겐 안타까운 일이야.”

“제가 바알이나 리파엘과 비교해서 손색이 크다는 말씀이십니까.”

“오히려 그들과 비교하면 손색이 없다. 네 힘은 그들과 대적할 때 비로소 개화하는 거니까. 다만 그 외의 상황에선 모든 걸 억압받는군.”

목줄이 채워진 상태로 태어났구나.

소년 신의 표정이 처음으로 바뀌었다.

미르를 위해 눈물이라도 흘려줄 기세로 슬픈 표정을 지었다.

몹시 가엾게 여기는 눈치다.

당연하다.

소년 신의 이름은 다리너.

여신께서 생명을 창조하실 때 그녀를 도왔던 영혼의 신이다.

인간에게 전파된 창세신화는 단순히 ‘여신께서 생명을 창조하셨다.’로 축약되어 다리너 신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최초의 인간과 개, 소와 닭 등의 영혼을 만든 신이 바로 다리너였다.

대상이 어떤 영혼을 지녔는지 엿보는 건 그에게 쉬웠다.

미르의 영혼이 한없이 상냥하고 따스하면서도 단단하단 사실을 알았다.

보기 드문 영혼의 소유자인 것이다.

“자신이 섬길 신을 스스로 선택한 것은 잘한 일이다. 템빨신께서 그대를 잘 인도하여 언젠간 운명을 바꿔주실 수도 있겠지.”

스륵.

다리너가 재차 기수식을 취했다.

거대한 대검을 역수로 거머쥐어 검날이 지면으로 향하게 만드는 특이한 기수식이다.

안 그래도 작은 다리너의 몸이 절반 이상 대검의 날에 가려졌다.

얼핏 방어에 치중 된 자세처럼 보였으나.

꽈르릉!

다리너는 신이다.

인간에겐 불가능한 움직임으로 자세를 역이용했다. 신성까지 활용해서 가속한 그의 대검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미르를 덮쳤다.

무상의 쾌검.

다리너를 매료시켰던 검사가 애용하던 검술이다.

누구보다 강인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지녔던 검사 뮐러.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던 다리너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욕망하게 됐다.

제라툴에게 검술을 배우게 된 계기다.

그리고 뮐러의 검술은 미르에게도 익숙했다.

정확히는 미르의 ‘무의식’이 기억하고 있었다.

쩌어어어엉!!

“...!”

가로막혔다?

조금 전엔 전혀 반응하지 못했던 일격인데?

미세하게 커진 다리너의 동공을 코앞에서 마주본 미르가 말했다.

“제 목줄은 진즉에 벗겨졌고 운명 또한 바뀐 지 오래입니다.”

템빨신을 적으로 만나 그의 사도로 간택되기까지.

그간의 모든 과정이 나의 모든 걸 바꿔놓았다.

의심 없이 단언하는 미르의 손에 쥐어진 검 또한 황혼이다.

사도의 자격으로 쥐었다.

같은 시각...

-저, 신의 지위를 얻었어요. 클래스 말고 지위요.

하늘 위 그리드는 유페미나의 귓속말을 받고 있었다.

엄청난 희소식에 만면에 미소를 그리면서.

“거기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야. 너라면 당연히 잘 해낼 줄 알았어. 정말 잘 됐다.”

소중한 이의 경사다.

그리드는 자신의 일처럼 축하해주는 반면 정작 유페미나의 목소리는 어둡기만 했다.

-근데...

“응?”

-...저를 상징하게 될 이름은 템빨마법...이라는데요...

“쵝...”

최고다.

반사적으로 외치려던 그리드가 황급히 입을 닫았다.

자신이야 뭔가 세트가 완성 된 느낌이라 기뻤지만 유페미나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무래도 템빨의 덕을 크게 봐서 그런 거겠죠? 찬사의 위력이 너무 강한 것 같아요. 아쉽지만 신이 될 때까진 찬사의 사용을 봉인하는 편이 좋을지도...

“안 돼.”

-...?

“찬사는 너와 함께 성장하게 될 무기야.”

-이거 성장형 아이템 아닌데요?

“아니... 네가 찬사를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 데이터가 누적돼야 나중에 내가 더 멋진 무기를 만들어 줄 수 있단 의미야.”

-...

“그리고 시스템은 매번 바뀌는 상황에 실시간으로 발맞춰서 움직이잖아? 네가 반드시 템빨마법신이 될 거란 보장은 없어. 그러니까 미리 동요할 필요 없다고.”

-그렇네요. 애초에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는 하찮은 이유로 템빨을 봉인하겠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요. 어린 애의 투정이었어요. 정신 차리고 미르 님 응원이나 열심히 할게요.

“...그래...”

괜한 죄책감을 느끼는 그리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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