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1권 - 9화
푸른색의 투명한 지팡이.
유페미나의 작은 손에 꼭 맞게 쥐어지는 짧은 지팡이는 유리를 세공해놓은 작품처럼 아름다웠다.
조만간 현실에서 액세서리로 유행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고아한 외관을 자랑해서 예쁜 것을 좋아하는 유페미나의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유페미나를 감동시키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아이템의 옵션이다.
<찬사>
등급:신화
마법 공격력:8,990 내구력:1,480/1,480
*지력 +1,000
*최대 마나 2배 상승.
★퍼펙트 메모리얼 최대 2개 가능.
★사용하는 공격 마법의 위력 소폭 상승.
단, 마법에 소모하는 자원이 바뀔 때마다 다음 마법의 위력 상승폭 증가. 최대 5회 중첩 가능.
같은 종류의 자원을 연속해서 소모시 효과 초기화.
★사용하는 방어 마법의 쿨타임 소폭 감소.
단, 마법에 소모하는 자원이 바뀔 때마다 다음 마법의 쿨타임 감소폭 증가. 최대 5회 중첩 가능.
같은 종류의 자원을 연속해서 소모시 효과 초기화.
★사용하는 보조 마법의 효과 지속 시간 소폭 증가.
단, 마법에 소모하는 자원이 바뀔 때마다 다음 마법의 지속 시간 상승폭 증가. 최대 5회 중첩 가능.
같은 종류의 자원을 연속해서 소모시 효과 초기화.
마나, 신성력, 흑마력.
여러 종류의 자원을 다루는 유페미나에게 안성맞춤인 옵션들이다.
옵션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선 상당한 숙련도가 요구 됐지만 그조차도 그리드가 보내는 신뢰로 느껴졌다.
유페미나는 그리드가 자신을 늘 지켜봐오고 있었단 사실을 실감했다.
아이린, 메르세데스, 유라, 지슈카, 바사라 등에게 종종 보였던 그리드의 녹아내릴 듯한 눈길이 자신에게 향하는 모습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러지 말자고 오래 전에 다짐했잖아.’
도리도리 고개를 저은 유페미나가 햄스터처럼 튀어나온 양 볼을 작은 손으로 톡톡 때렸다. 불쑥 떠오른 홍조를 털어내듯이.
하지만 애써 되돌린 그녀의 얼굴은 곧 다시 붉게 물들었다.
아이템 옵션 아래로 나열 된 설명을 보면서다.
템빨신 그리드가 위대한 대마법사 유페미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창조한 지팡이입니다.
유페미나의 활약상과 사도 브라함의 조언을 참고했습니다.
착용자의 의도에 맞춰 변모하는 이 아름답고 강력한 지팡이는 유페미나에게 보내는 그리드와 브라함의 찬사인 것입니다.
“...”
유페미나가 가볍게 마법을 운용해보았다.
그녀의 정순한 마나처럼 푸르렀던 지팡이가 백열한다 싶더니 이내 빛을 엿가락처럼 늘어놓은 듯한 형태로 변모했다.
신성력을 매개로 삼은 마법을 쓰자 지팡이의 질(質)이 바뀐 것이다.
흑마력을 썼을 때도 마찬가지다.
‘코디에 더 신경을 써야겠네.’
실시간으로 바뀌는 지팡이의 색상을 모조리 커버하는 코디.
또래 여성처럼 평범한 고민을 품는 유페미나의 만면엔 밝은 미소가 가득했다.
그리드와 브라함의 호의가 깃든 선물.
그들의 ‘찬사’를 얻은 것이다.
오늘이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마침 유페미나의 상대가 무대에 올랐다.
“선악과를 복용한 아이로구나.”
여성 형태의 신이었다.
사랑의 여신 멜로리처럼 보는 이를 매혹하는 성질은 없었지만 아름다움은 비견되고도 남았다.
물론 그녀를 마주보고 선 유페미나의 미모도 꿀리진 않았다.
다만 신장과 흉부가 조금.
아주 조금 덜 발달했을 뿐이지.
‘사실 별 차이도 없는 수준이야.’
여성의 속옷은 중세시대부터 발달해왔다.
현대에 이르러선 여성의 속옷이 템빨이란 단어를 탄생시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기능을 자랑하게 됐다.
흉부와 골반의 크기쯤이야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는 의미다.
유페미나가 생각하기에 자신과 여신의 차이는 정말로 무의미했다...
“너에 대해서 논할 때... 천사들은 악마라도 본 것처럼 호들갑을 떨더구나. 하지만 실상은 영 딴판이야. 아담하고 귀여운 걸.”
“제가 작아요? 특이한 감상이네요.”
유페미나의 관자놀이가 씰룩거렸다.
얼굴에 번진 미소는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채다.
“다 큰 숙녀인 제 어딜 봐서 작다는 걸까요? 신의 관점은 인간이랑 달라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나이가 많아 세대 차이가 나는 건지 영 보는 눈이 없으시네요.”
“인간과 보는 관점은 달라도 인간을 이해할 수는 있단다. 또한 신에겐 나이라는 개념이 없지. 그러므로 내 감상은 일반적인 것일 텐데... 흐음, 혹 조롱 받았다고 오해하는 것이냐. 너를 비하할 의도는 아니었으니 오해를 풀어줬으면 좋겠구나.”
여신 시아라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맑고 아름다운 음률을 이뤘다.
단순히 대화를 나누는데 노래를 듣는 느낌을 줬다.
그녀가 선율의 여신인 까닭이다.
유페미나는 어느새 마음이 평온해졌다.
‘작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운 시아라에게 느꼈던 분노를 털어냈다.
애초에 상대는 신이다.
후광을 밝히는 신비로운 외모부터가 경외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저절로 한 발 물러나게 됐다.
신을 보통 인간과 똑같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그리드와 브라함 정도밖에 없지 않을까.
“뭐 사과까지 하셨으니... 오해쯤이야 얼마든지 풀어드리죠.”
“고맙구나.”
선율의 여신 시아라는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호의적이다.
특히 예술가를 아꼈다.
그녀 스스로가 창작의 고통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인간들에게 쉽게 공감했다.
“답례로 너를 위한 선율을 들려주마.”
시아라가 인간에게 전파한 음악들은 하나 같이 공들여 만든 역작이었다.
그녀의 영감은 차츰 고갈되어갔고 늘 새로운 영감을 필요로 했다.
시아라가 제라툴에게 무예를 배운 경위다.
그녀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무예.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지키기 위해, 생존을 위해, 명예를 위해 체득하는 기술.
격렬하게 몸을 쓰고 '투지'를 품어본 경험 등이 시아라에겐 신선한 자극이 됐다.
이 순간 그녀가 표현하는 음악은 여태껏 없을 만큼 격정적이었다.
쿠우웅...
협도를 꺼내 땅에 꽂는 순간부터가 연주의 시작이었다.
두꺼운 창대를 훑는 시아라의 손짓이 만드는 소리, 도가 바람을 가르는 절삭음, 무대가 떨리면서 울리는 굉음 등등.
모든 소리들이 차곡차곡 선율을 쌓아가며 음악을 이뤄갔다.
유페미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만약 시아라가 권능을 사용했다면.
그녀의 연주가 시작 된 순간 자신은 큰 위기에 빠졌을 것임을.
선율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공격으로 작용했을 테니까.
꽈아앙!
유페미나의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제 키보다 큰 협도를 휘둘러 허공을 가른 시아라가 도기의 격랑을 일으킨 까닭이다. 무지막지한 기파가 대기를 찢어발기며 공간 자체를 일그러뜨렸다.
순전히 물리적인 힘으로 이런 게 가능하다니...
순식간에 중첩시킨 보조 마법으로 민첩성과 반사 신경을 강화하고 실드 마법을 전개한 유페미나가 부질없게도 피를 흘렸다.
“곡조가 난폭하고 음울하네요. 제라툴을 위한 위령곡인가요?”
“후훗, 같은 음악이라도 듣는 이의 심경이나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들리는 법이지. 네가 느끼는 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친절하게 응대하는 시아라였으나.
사실 그녀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조금 전 탄생한 신.
마법과 지혜의 신 브라함은 공교롭게도 마족이다.
태초의 3악 베리아체의 자식이었다.
악마의 혈통이 신이 된 것이다.
신들의 신화와 신성을 빼앗았다 한들 본래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곳에 모인 수많은 인파가 브라함을 숭배했기에 일어난 기적이었다.
결과론적으로 말해서 제라툴이 공헌했다는 뜻이다.
악마를 신으로 만든 대죄.
어쩌면 지금 천상에선 제라툴의 처분을 논하고 있지 않을까.
이번 사건에 가담한 우리들도 처벌을 받을 공산이 컸다.
‘이 상황에서.’
시아라는 눈앞의 인간 소녀가 쥐고 있는 지팡이를 보았다.
문득문득 마기를 띄는 지팡이.
그것은 소녀의 본질을 나타내고 있었다.
세계의 법칙을 개변시키는 선악과.
그 끔찍한 열매를 먹은 대역죄인이 브라함과 다를 바 없는 마(魔)를 품었음을 뜻했다.
만약 이 상황에서 시아라가 패배한다?
그녀 역시 제라툴과 똑같은 대죄를 범할 우려가 있었다.
유페미나가 신을 쓰러뜨리는 순간 그녀 또한 브라함처럼 신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유페미나의 이름을 연호하는 인파가 가능성을 시사했다.
‘절대로 져선 안 되겠구나.’
칠악성이 아스가르드를 침공했을 당시.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애도하는 곡을 연주했던 시아라가 이 순간 살심을 품었다.
인간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었단 말이다.
탄생 이후 최초였다.
처벌 받을 것이 두려워서?
아니, 그녀는 단순히 ‘악신’의 난립을 방지하고 싶을 뿐이다.
천상의 신으로서 당연하게 짊어진 의무였다.
꽈아아아앙!!
시아라가 협도를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창대를 쥔 기다란 손가락이 토톡, 톡. 실시간으로 창대를 두드리며 음파를 일으켰다. 권능의 영역으로 보긴 힘든 수법. 신성의 활용이었다.
‘미쳤어.’
이를 악 문 유페미나가 재차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모든 종류의 보조 마법을 몸에 두르고도 반격할 기회를 도무지 엿보지 못했다.
시아라의 공세가 워낙 빠르고 강력해서 의식을 분산할 틈이 없었다.
말 그대로 신의 위엄.
시아라는 유페미나가 여태껏 싸워온 누구와도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사도들은 물론이고 크라우젤은 어떻게 이런 괴물들과 싸워서 이긴 걸까?
새삼 큰 의문을 느끼며 짙은 패색을 띄우던 그녀가 문득 손에 쥔 지팡이를 자각했다.
크라우젤이 신을 벨 수 있었던 이유.
그의 실력이 고강해서만이 아니다.
그리드의 템빨이 도왔다.
지금의 나 또한 그리드의 템빨이 돕고 있었고.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야.’
무조건 이겨야 옳다.
그게 그리드에게 ‘찬사’를 받은 내 의무다.
찬사에 귀속 된 옵션 <퍼펙트 메모리얼>을 떠올린 유페미나가 트리플 캐스팅을 시도했다.
전개 중인 방어 마법의 유지를 위해 마나를 운용하는 한편 머리와 입으로 각기 다른 주문을 외웠다.
“...!”
유페미나가 세운 방어벽을 손쉽게 허물어가던 시아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유페미나의 지팡이가 청색, 흑색, 백색을 동시에 발산한 까닭이다. 자연스럽게 경계했다.
“이런 식이다.”
제라툴의 음성이 시아라의 뇌리에 울렸다.
옛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거대한 협도를 종으로 끊어 치는 기술.
베기보단 때린다는 개념에 가까워서 습득하기 난해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떠오른 기억이 그녀에게 완전한 도법을 구사하게 만들었다.
파아아아앙!!
종으로 떨어진 협도의 도날이 층층이 이루어진 유페미나의 방어벽을 순식간에 허물어뜨렸다.
우주를 연상시키는 어둠을 이루고 있던 마기가 즉시 몰려들어 새로운 방어벽을 세우려 했지만 시도로 그쳤다.
협도는 이미 유페미나의 안쪽 방어벽까지 꿰뚫고 유페미나의 쇄골을 갈라놓았다.
때마침 유페미나의 주문이 끝났다.
단지 새카만 배경으로 감싸였던 무대에 은하수가 수놓이기 시작했다.
마나, 신성력, 흑마력을 동시에 운용해야 발현되는 마법.
본래라면 존재할 수 없는 마법으로 유페미나에게 희미한 신격을 안긴 계기가 된 <스타더스트>의 전조였다.
“쿨럭!”
새카만 피를 한 바가지 쏟아낸 유페미나가 아찔한 고통을 견뎌내며 웃었다.
진즉에 작동을 멈춘 방어 마법을 대신해 공격 마법을 난사하면서다.
스터더스트를 가동하지 않고 펼쳐만 놓은 상태로 다른 마법들을 뿌려댔다.
물론 각기 다른 자원을 소모하는 마법들을 순차적으로.
찬사의 위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과정이었다.
[5초 후 불사 상태가 종료 됩니다.]
[4초 후 불사 상태가 종료 됩니다.]
[3초 후...]
[2초 후...]
시야가 연신 붉게 점멸하며 그녀에게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시간이 촉박함을 재차 알렸다.
유페미나에겐 낯설지 않은 위기다.
초조함에 매몰되지 않고 냉정함을 유지한 그녀가 다섯 번의 마법 시동 끝에 스타더스트를 움직였다.
은하수가 시아라를 덮쳤다.
“음...!”
대비하고 있던 시아라가 적절하게 응수했다.
협도를 크게 휘둘러 청녹색 신성을 퍼뜨렸다.
사방에서 덮쳐오는 은하수를 물리치는 한 수였다.
하지만 한 번으론 부족했다.
물러난 은하수 뒤로 새로운 은하수가 쏟아지고 있었기에.
<퍼펙트 메모리얼>
마법을 온전한 형태로 귀속시킵니다.
퍼펙트 메모리얼로 귀속시킨 마법은 당신이 직접 사용하는 마법과 별도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공유합니다.
지팡이의 옵션을 활용한 연격이다.
어차피 죽음을 각오해야하는 상황.
유페미나는 <마나 역류>라는 최악의 상태이상을 감수하고 궁극기를 연속으로 전개했다.
무지막지한 탈력감이 뒤따르며 즉시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불사의... 지속... 끝...]
[사망...습니...]
뒤따르는 알림창이 희미해서 제대로 식별되지 않을 정도였다.
‘아...’
이 감각.
죽었다.
‘졌구나.’
미안해서 어쩌지.
죽음으로 잃게 된 것보다 그리드와 브라함을 실망시켰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 그녀의 시야로 새로운 알림창이 갱신 된다.
[선율의... ‘사아... 격퇴...]
...
..
내용이 길다.
정작 잘 보이지 않아서 문제지.
하지만 한 가지 문장만큼은 똑똑히 보고 말았다.
[당신을 수식... 템빨마법...]
‘???’
[저장 된 포인트에서 다시 부활하시겠습니까?]
“...”
유페미나는 차마 ‘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나마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