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1권 - 8화
인마대전 당시.
잃었던 힘을 되찾은 브라함은 변치 않는 진리 하나를 깨우쳤다.
직계의 육체가 상상 이상으로 튼튼하다는 점.
지난 수백 년 동안 인간의 삶을 체험해봤기에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생물이 아닌 개념이라는 진짜 신들.
그리고 인간들의 마음속에서 ‘공포’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목숨이 무한하다는 바알 다음쯤 되지 않을까 싶었다.
몸이 산산조각 나는 수준을 넘어 입자 단위로 분해될지언정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물론 무지막지한 고통을 겪고도 살고 싶다는 ‘의지’를 유지할 만큼 강인한 정신력이 필요하다는 전제가 붙긴 했다.
그리드에게 사냥 당했던 직계들에겐 그런 정신력이 없었던 거고.
하지만 브라함에게 인내란 딱히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어머니께 버림받고 모든 걸 잃었던 사내다.
심연까지 추락했다가 과거보다 더 높은 봉우리까지 기어오른 그에게 고통을 견디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까진 아니었지만 아무튼 견딜 만했다.
제 몸을 매개로 블랙홀을 만드는 미친 짓을 벌이게 된 경위다.
“끅... 끄그윽...”
카들로는 완전히 실성해버렸다.
눈을 반쯤 까뒤집고 침을 질질 흘려댔다.
호흡 없이 존재했던 신의 위엄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신성을 빼앗긴 충격으로?
아니다.
그것은 계기에 불과했다.
조금 전 카들로의 시간은 무한대로 늘어났다.
작은 블랙홀에 신성이 빨려 들어갈수록 시간이 국수처럼 길게 늘어나는 듯하더니 갑자기 엄청 빠르게 흘러갔다.
신성에 흔적으로 남은 그의 삶이, 기억들이 무한대로 빨리 감기 되면서 그로부터 순간을 앗아갔다.
영원의 고통이었다.
어지간한 신도 백치로 만들어버릴.
그나마 카들로는 주신이었던 경력이 있어 영원을 견뎌냈지만 후폭풍이 거셌다.
‘두 번 다신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 그의 뇌리에 새겨졌다.
공포를 학습했단 의미다.
무려 신이, 템빨신의 사도 브라함을 두려워하게 됐다.
“무후총의 망령이라는 놈이... 너처럼 악독하겠구나...”
카들로는 지극히 소수의 신이 무후총의 망령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이 순간 그들에게 공감하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브라함과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로.
시선을 내리깔면서다.
“기둥이라.”
브라함은 카들로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었다.
카들로에게 빼앗은 신성을 마력과 섞어보다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활용법을 궁리했다.
그의 입에서 기둥이 언급 된 순간 카들로는 흠칫 놀라고 말았지만 이내 진정했다.
생산의 기둥.
그것은 자신의 권능이기에.
신성을 기반으로 작동시키는 것이긴 하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타고난 힘이다.
카들로 본인조차 기둥의 생성 원리는 몰랐고 당연하게 사용해왔다.
인간이 숨 쉬는 법을 자연히 습득하는 것처럼 말이다.
브라함이 카들로의 신성을 빼앗았다고 해서 생산의 기둥까지 다룰 순 없단 의미다.
‘백년이고 천년이고 애써 봐라.’
너는 절대로 기둥을 얻지 못할 테니...
열패감의 수모에 짓눌렸던 카들로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브라함을 매료시킨 생산의 기둥이 앞으로 영원토록 브라함을 옥죄는 저주가 될 거라는 확신을 품은 채다.
그때.
쿠구궁...
“대충 이런 식이군.”
저 먼 구름 너머에서 아직은 작고 미약한 기둥 하나가 솟아올랐다.
별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기둥.
아직은 단순히 뾰족한 돌산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생성해냈다는 게 문제였다.
[템빨신의 사도 ‘브라함’이 신의 권리에 침범합니다.]
[‘신화 찬탈자’ 이상의 지위가 탄생할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아스가르드의 주신이었던 ‘카들로’의 모든 신화, 그리고 아스가르드의 대규모 신화 일부에 ‘브라함’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템빨신의 사도 ‘브라함’이 새로운 신화를 씁니다.]
[그는 강력한 마법으로 신을 농락했고 드높은 지혜로 신의 권리를 침범하였습니다.]
[새로운 신의 이름은...]
“템빨마법신.”
연속해서 떠오르는 월드 메시지에 전율한 그리드가 중얼거렸고,
[마법과 지혜의 신, 브라함입니다.]
다행히 월드 메시지는 그리드의 의견을 묵살했다.
새로운 신의 탄생.
심지어 2개의 이명을 지닌 신이다.
하물며 ‘지혜’는 쥬다르의 이명이었다.
전 아스가르드의 주신이었던 카들로의 권리를 침범하며 탄생한 새로운 신은, 탄생과 동시에 존재만으로 현 아스가르드의 주신을 위협하고 있었다.
“무...슨...”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있던 카들로가 재차 큰 충격을 받았다.
신의 위엄을 잃은 걸로 모자라 뭍에 나온 붕어처럼 입을 뻥긋거렸다.
특유의 오만한 표정을 지은 브라함이 입 꼬리를 한껏 치켜세웠다.
“템빨신의 사도 브라함이 이겼다.”
브라함은 변하지 않았다.
신의 위계를 얻고도 자신을 템빨신의 사도노라 칭했다.
그 또한 그리드의 서사시에 기록 됐다.
“우와아아아아아!!”
본인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으로 스스로 사태를 마무리 짓는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표현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브라함다운 마무리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그때였다.
“이 대결은 무효입니다.”
누군가가 태클을 걸었다.
다름 아닌 라우엘이었다.
“...?”
브라함이 귀를 의심했고 사람들이 술렁였다.
잠시 가만히 서서 무대 아래 라우엘을 노려보던 브라함이 호흡을 한 번 고른 뒤 물었다.
“무효라고? 그게 무슨 헛된 주장이냐?”
“이번 성전의 본질은 폐하의 템빨과 제라툴의 무맥을 겨루는 것으로 바뀐 지 오래입니다. 카들로 신이 권능을 사용한 시점부터,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브라함 공께서 카들로 신에게 권능의 사용을 허가한 시점부터 이 대결은 주제로부터 어긋나게 된 거죠.”
“...”
브라함은 지공... 아니, 지혜의 신이다.
라우엘의 주장을 곧장 이해했다.
애초에 제라툴이 세운 규칙 따위 그냥 무시하면 되는 거 아니냐.
왜 굳이 규칙을 엄수하여 귀중한 우리의 승리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냐...
그딴 의문은 품을 가치도 없다.
라우엘은 그리드가 제라툴의 격을 온전히 흡수하길 바라고 있었다.
제라툴이 세운 규칙대로 싸우고 승리하면 제라툴은 아무런 핑계거리 없이 패배한 것이 된다.
그때 놈이 겪을 페널티와 그리드가 얻을 어드밴티지를 고려하면 브라함과 카들로의 대결은 무효 처리하는 게 옳았다.
“우우! 우우우우우!”
브라함 본인은 납득하는 반면 사방에서 야유가 빗발쳤다.
원색적인 비난을 일삼는 사람도 많았다.
라우엘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워낙 욕먹는 일에 익숙했으니까.
템빨단을 제국으로 키우는 과정에서.
그가 숙청한 사람만 수만 명이다.
항복한 적국의 병사들을 생매장시킨 경력이 있을 정도로 라우엘은 냉혹했다.
그런 주제에 자신을 향한 비난은 거부한다고?
라우엘은 그런 몰염치한 사람이 아니다.
어떤 비난이든 겸허히 받아들여 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알았다.”
브라함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사람들의 비난을 일축시켰다.
당사자인 그가 라우엘의 뜻을 존중한 만큼 사람들도 더 이상 원색적인 비난은 하지 못했다.
물론 템빨계를 응원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여전히 아쉬운 마음이 컸다.
4대1로 승기를 잡을 기회를 놓친 것이다.
다시 돌아온 3대 1의 상황.
역전 당할 여지가 커졌다.
남은 4번의 승부에서 템빨계가 연패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그만큼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강했다.
무수히 많은 관객들이 목격했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당연히 템빨신의 사도를 신뢰했고 승리하길 바랐지만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하물며 이쪽은 브라함이라는 최강의 패가 허무하게 소모된 반면 아스가르드에는 브라함이 지목한 소년 신이 멀쩡히 남아있었다.
소년의 좌우로 도열해 있는 신들 역시 과묵하여 하나 같이 존재감이 엄청났고.
“보통 만화를 보면 여기서 주인공 팀이 질 차례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나설게요.”
유페미나가 무대 위로 올랐다.
안 그래도 소녀처럼 어린 외모를 금발 트윈테일이 한층 더 부각시켰다.
전장에 도통 어울리지 않는 외견.
하지만 그녀가 바로 템빨단의 비밀병기다.
비밀이라기엔 만인이 알고 있었지만, 예전부터 그리드가 그녀를 두려워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유페미나아악!!”
“경멸어린 시선으로 노려봐줘!”
“비웃으면서 개허접이라고 말해줘!!”
복제술사 시절.
미인계로 쉽게 사기(?)를 치고 다녔던 만큼 그녀의 팬은 몹시 많다.
유페미나의 이름을 비명처럼 연호하는 소리가 끝없이 퍼졌다.
제발 이겨달라는 덧붙임은 기본이다.
유페미나가 혀를 내둘렀다.
‘여기서 무슨 수로 활약하라는 거야?’
무무드의 후계자는 본래부터 신화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클래스다.
선악과를 먹고 잠재력을 크게 개화시킨 그녀의 실력은 보통의 범주를 확실하게 초월했다.
하지만 신들과 비교하면 당연히 손색이 있었다.
앞선 전투들.
카들로는 명색이 신이 칼부림이나 하고 있는 꼴이 웃기다고 자책했지만 제3자 입장에선 비하할 부분이 전혀 없었다.
신이 한 번 휘두르는 칼은 그 자체로 재해를 일으켰으니까.
제국의 온갖 집단이 펼쳐놓은 결계가 없었다면.
라인하르트는 신이 칼을 휘두를 때마다 폭탄을 맞은 것처럼 일부분씩 소멸했을 것이다.
저런 무자비한 존재들과 싸워서 이기라고?
유페미나는 자신이 없었다.
‘내가 크라우젤도 아니고.’
아주 간혹 크라우젤을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크라우젤을 그리드와 비교한다는 점이다.
그래, 비교 대상부터가 잘못 됐다.
그리드를 제외하면 크라우젤은 최강의 플레이어가 맞다.
심지어 크라우젤은 검성이라는 직업 특성 덕분에 그리드의 검을 고스란히 휘두르지 않나.
유페미나는 자신이 크라우젤보다 한 수 아래라고 평가했다.
자신을 크라우젤과 같은 수준으로 보는 사람들은 크라우젤의 진가를 모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리드의 약팔이에 당했거나.
‘그리드 오빠는 항상 나를 너무 높이 평가했으니까.’
세희와 자주 어울리다 보니 오빠라는 호칭이 익숙해진 유페미나다.
피식 웃고 말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나를 믿어준(?) 그리드에게 제대로 보답해주고 싶다는 생각.
‘...무조건 질 거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이제는 그리드뿐만 아니라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너무 많다.
영원의 탑 마법사들은 단체로 응원을 왔을 정도다.
“다쳐도 되니까 마음껏 싸우고 와요.”
세희.
성녀 루비마저 어울리지 않게 파이팅을 불어넣어주었다.
평소엔 되도록 다치지 말라며 타박하더니.
‘...그래, 중요한 시점이야.’
클리셰는 깨라고 있는 거다.
“정정할게요.”
조금 전까지 나란히 함께 서있었던 지크, 미르, 사리엘을 돌아 본 유페미나가 웃었다.
특유의 자신감과 장난기가 느껴지는 미소.
소악마의 미소다.
“아직은 우리가 질 차례가 아닌 것 같아요.”
유페미나의 결심엔 피아로와 브라함의 지분이 컸다.
선악과라는 커다란 선물을 안겨준 피아로.
앞서 패배를 겪고 의기소침해진 그를 위해서라도 유페미나는 이기고 싶었다.
당신이 나의 승리를 만들었노라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브라함.
그는 누구보다 무무드를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늘 유페미나를 유의 깊게 관찰했다.
그리고 매번 실망했었다.
브라함이 기억하는 무무드와 무무드의 힘을 계승한 유페미나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가 엄청 클 테니까.
물론 브라함이 대놓고 실망을 내색한 적은 없다.
하지만 유페미나는 항상 느꼈다.
이번에야말로 브라함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고 싶었다.
그가 감탄하는 모습을 봐야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풀릴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반드시 이기고 올게요.”
지금 막 그리드가 던져준 지팡이가 그녀의 자신감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선악과를 복용하고 다수의 자원을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설계하고 만들어온 지팡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의 자신과 궁합이 좋은 옵션을 지닌 신상 지팡이다.
“넌 할 수 있어.”
청공의 그리드가 속삭였다.
신이 되기 전의 자신과 현재의 유페미나를 비교하면서.
평소와 달리 객관적인 시각으로 유페미나에게 기대를 품었다.
쏴아아아아...
무대가 우주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