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1권 - 6화
템빨계와 아스가르드의 격돌.
템빨계의 승산을 낮게 점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드를 비롯한 사도들의 면면이 화려할지언정 상대는 천상의 신들이었기에.
한데 이미 2승을 거뒀다.
아쉬운 석패가 뒤따랐지만 그조차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겼다.
정작 피아로를 쓰러뜨린 신이 피아로를 높이 평가한 까닭이다.
불쑥 쓰이기 시작한 그리드의 서사시도 증명했다.
[템빨신 ‘그리드’가 23번째 서사시를 써내려 갑니다.]
[서사의 시작은, 무신을 섬겼던 어느 신의 깨우침에서 비롯합니다.]
[무신을 쫓아 지상을 침략했던 풍요의 신 ‘알드로’가 말하길 템빨신의 사도를 스승으로 섬기겠노라 하였다.]
“...”
피아로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주던 알드로.
인간들의 함성 속에서 자신을 향한 숭배를 느낀 그의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한데 부지불식간에 굳었다.
사기꾼에게 집문서를 강탈당한 피해자의 표정과 흡사했다.
“크흠...”
바로 곁에서 알드로의 표정 변화를 목격한 피아로가 민망해서 침음했다.
마주잡고 있는 알드로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면서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멋대로 상황을 해석하고 있었다.
[앞서 무신을 섬겼던 ‘알드로’의 선언은 템빨신의 사도가 무신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음을 뜻했다.]
지옥에서와 같았다.
그리드의 행보가 인간들에게 목격됨으로써 쓰이는 대규모 서사시는 일종의 성전이다.
그리드 본인의 시선이 아닌 그를 섬기는 신도들의 시선으로 쓰이는 성전.
내용이 다소(?) 왜곡될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의 상황이 그리드에게 유리하게 해석됐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황당한지 할 말을 잃은 알드로에게 피아로가 설명했다.
“이는 나의 신께서 왜곡하신 게 아니라...”
“알고 있다.”
알드로가 대뜸 말을 끊었다.
“모든 건 인간들 앞에 선 내가 감수해야 할 일이겠지.”
주신이 아닌 이상에야.
대부분의 신들은 지상에 자유롭게 강림하지 못한다.
신이 세계에 개입하여 자칫 주신의 위계에 도전하는 사태가 야기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알드로에게 이번 지상행은 욕심낼 수밖에 없는 기회였다.
쉽게 오지 않는 기회를 쟁취하기 위해 어떤 위험을 감수할 각오야 진즉에 다진 것이다.
애초에 템빨신이 쉬운 상대던가.
그의 명성은 진즉부터 아스가르드 전역에 퍼졌다.
실시간으로 피아로와 템빨신의 양분이 되고 있음을 느끼면서도 딱히 큰 대가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얻은 것도 컸기에.
‘제라툴 같은 꼴을 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지.’
스윽.
알드로의 금빛 눈동자가 하늘로 향했다.
카메라에 잡히는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오직 푸른 하늘만을 투영하고 있었으나, 알드로의 시야에는 그리드의 상태가 자세하게 보였다.
절로 어떤 감정이 샘솟았다.
태어난 순간부터 군림해온 다른 신들을 봤을 땐 쉽사리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존경심.
꾸벅.
묵묵히 그리드를 바라보던 알드로가 아주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여신께 문안을 올릴 때처럼 경건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무지막지한 파장이 뒤따랐다.
우와아아아...
끊이질 않던 사람들의 함성이 한층 더 커졌다.
믿기지 않는 일의 연속에 광분해서 웃통을 벗어던지는 사람들이 생길 지경이었다.
반면 신들은 여전히 차분했다.
처음 나섰던 가장 낮은 신을 제외하면 제라툴이 퇴각해도 큰 동요를 보이지 않던 그들이다.
대개 진정한 신이란, 감정을 다스림에 있어서 특출한 면모가 있었으니까.
그러므로 아스가르드라는 고요한 세계에서 수천 년을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던 것이다.
제라툴이 지난 수백 년 동안 수차례 지상을 방문하고 추종자들을 만드는 등의 기행을 벌인 것도 기본적으론 무료함을 달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치우가 아스가르드를 떠나고 나서야 탄생한 제라툴.
운 좋게도 처음부터 주신으로 태어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라는 권리를 거리낌 없이 누벼온 반면 다른 신들은 제약에 익숙했다.
“일단 동수를 이루면 좋겠는 걸. 여기서 진지한 신은 나밖에 없는 듯하니까 내가 나설게.”
2대 1의 상황.
승기를 이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낀 신이 나섰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성이었다.
무척 아름다웠는데 짙고 투명한 속눈썹이 특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쥬드. 결혼한다.”
무대 아래서 병사들과 함께 호위를 서던 쥬드가 생뚱맞은 헛소리를 지껄였다.
최근 네임드화되고 오르기 시작한 지식 스탯과 별개로 그는 여전히 순수했다.
사랑의 여신 멜로리에게 순식간에 매료되어버렸다.
“대, 대장!”
무대에 난입하려는 쥬드를 병사들이 간신히 뜯어말리는 그때.
“어디서 눈웃음을 치나요?”
가벼운 발소리가 울린다 싶더니 메르세데스가 무대 중앙에 섰다.
저절로 매혹을 뿌리는 사랑의 여신 앞에서도 퇴색되지 않는 미모.
덕분에 번뜩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메르세데스의 거대한 존재감을 새삼 깨우쳤다.
실제로 커다란 무대가 메르세데스와 멜로리 단 두 명에 의해 가득 찬 느낌을 줬다.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게 만드는 미인들의 존재감?
그런 것보단 신성의 여파였다.
멜로리가 흩뿌리는 분홍색 신성과 메르세데스가 흩뿌리는 주홍색 신성이 무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화려하되 천박하지 않고 따스하게.
“인간 처녀야. 너는 나처럼 웃을 필요가 있겠구나. 예쁜 얼굴이 아깝게 너무 도도하지 않느냐.”
“처녀가 아닙니다. 내겐 어엿한 낭군님이 있어요.”
“그건 참 다행이구나. 표정이 사납고 독살스러운 면이 있기에 독수공방한 노처녀인 줄 알았는데.”
“...노처녀...”
안 그래도 엄마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품게 된 메르세데스다.
그러자 불쑥 걱정이 들었다.
아이를 낳기엔 나이가 너무 많지 않나 하는 걱정.
그리드를 처음 마음에 품었을 때는 꽃다운 20대였던 반면 사랑의 결실은 30대에 이르러서야 맺게 됐으니까.
물론 그녀의 타고난 미모는 검술과 격으로 단련되어 있었다.
누구에게나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외모였고 앞으로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기분의 문제였다...
그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불쾌한 건 불쾌한 거다.
“노처녀라니...”
싸아아...
한층 더 사늘한 표정을 지은 메르세데스가 한기를 불러일으켰다.
주황색 신성에 가리어 잘 보이지 않았던 투명한 눈동자가 멜로리의 시선을 끈다.
“그대가 혜안의 주인이었구나. 템빨신의 신성을 짊어진 기적을 행사하고 있기에 새로운 사도인 줄 알았어.”
승리를 바라는 건 어렵겠는 걸...
멜로리의 희미한 뒷말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신들의 의복은 나풀거리는 얇은 천 한 장이 전부다.
그 한 장의 천으로 새하얀 나신을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었다.
한 걸음 떼는 동작만으로 만인의 시선과 정신을 사로잡는단 의미다.
심지어 하늘 위 그리드도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메르세데스의 표정이 한층 더 차갑게 굳었다.
그녀의 기감은 늘 그리드에게 우선적으로 향해있었기에.
꽈창!!
멜로리가 가볍게 뗀 한 걸음이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켰다.
사랑의 신.
그녀의 삶은 의외로 아름답지 못했다.
간혹 타인과 타인의 사랑을 이어주며 보람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선 그녀가 타인의 사랑을 받게 되는 입장이 됐기에.
심지어 같은 신에게조차.
원치 않는 일을 너무 많이 겪을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부터 스스로를 지킬 힘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다름 아닌 제라툴이 그녀에게 동아줄이 되어주었다.
고고했던 치우와 달리 무예를 뽐내길 즐기는 제라툴은 다른 신에게 가르침을 베푸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뒤늦게 탄생한 주제에 기고만장하여 스스로를 진짜라고 믿는 가짜 무신.
많은 신들이 제라툴을 뒤에서 험담하며 비웃을 때 멜로리만은 그에게 진정으로 감사해왔다.
제라툴이 멜로리를 위해서가 아닌 스스로를 뽐내기 위해서 그녀에게 무예를 전수했을지언정.
실제로 멜로리가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까.
꽈아아아아앙!!
초고속 이동에 이은 난타 연계.
짧은 크시포스 두 자루를 역수로 쥐고 휘두르는 멜로리의 연계 공격은 무척 빨랐다.
양날의 칼을 적절하게 활용해서 베기, 찌르기, 부딪치기를 모두 활용하였는데 꽃이 피는 순간을 가속해서 표현하듯 화려한 공방을 자랑했다.
“...”
메르세데스는 멜로리의 표정이 신 같지 않다고 느꼈다.
이를 악 문 채 치열한 모습.
우리네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치 그리드처럼 말이다.
“노력으로 연마한 기술이군요.”
천상의 신들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
메르세데스는 늘 궁금했는데 이 순간 작게나마 의문이 풀렸다.
적어도 ‘낮은 신’들의 삶은 인간들이 상상해온 신의 삶과 크게 다를 거라는 확신이 선 것이다.
채챙! 채채채챙!!
메르세데스 역시 최선을 다해서 응수하기 시작했다.
자신처럼 똑같이 노력해온 적을 상대로 방심할 순 없었으니까.
“허...”
무대 밖 곳곳에서 감탄사가 빗발쳤다.
눈에 보이지도 않던 그리드와 제라툴의 대결.
압도적인 스케일의 검술을 난사하던 크라우젤과 바래로의 대결.
자연을 이용했던 피아로와 알드로의 대결.
앞선 대결들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었다.
특히 그리드와 제라툴의 대결 같은 경우에는 사도들과 신들조차 제대로 흐름을 읽지 못했었다.
반면 메르세데스와 멜로리의 공방은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라면 누구나 이해하기 쉬웠다.
순전히 기술을 겨루는 양상에 가까웠기에. 흐름이 교본처럼 체계적이어서 빠르되 읽혔다.
메르세데스가 멜로리와 ‘호흡을 맞춰주는’ 덕이 컸다.
처음부터 강신을 쓰고 무대에 올랐던 그녀에게 멜로리는 크게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끝내.
까아앙!!
멜로리가 두 자루 검을 모조리 놓쳐버리고 말았다.
도움이 되지 못했구나.
“나는... 쓰임새가 없는 신이야.”
사랑의 신이기에 앞서 하위 신.
인간과 인간의 사랑을 엮어주기엔 세계에 개입할 여지가 너무 적다.
거의 늘 아스가르드에서 조용히 머무는 수밖에 없는데 매번 분란을 조장하게 된다.
하물며 이번엔 제라툴에게 은혜조차 갚지 못했다.
쏴아아아...
멜로리의 분홍색 신성이 빛을 잃어갔다. 점차로 흩어져갔다.
소멸을 바라는 신의 염원이 만드는 현상이다.
치우의 신성이 없는 것처럼 희미했던 점을 떠올린 그리드가 다소 초조해졌다.
지금 당장 무대로 내려가 멜로리를 달래주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이다.
순수한 동정심이기도 했고 미래를 위한 투자이기도 했다.
양반들도 템빨계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마당에 아스가르드의 신들이라고 못할까?
하지만 그리드는 도무지 지상으로 내려갈 수가 없었다.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처들 때문이다.
메르세데스가 오해할까봐 걱정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그의 마음.
메르세데스가 진즉에 헤아렸다.
“쓰임새가 없는 게 아니라 아직 찾지 못한 거겠죠. 제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알아요.”
사하란 제국의 기사였던 시절.
약소국 억압과 이민족 학살이라는 역할을 수행했던 그녀는 자주 회의감을 느꼈었다. 물론 내색하진 못했지만 자신의 쓰임새가 올바르지 않다는 자각이 있었다.
나라는 존재가 민폐이고 해악인 느낌.
부모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했던 까닭에 자존감이 높지 않았던 그녀의 마음은 상시 고통스러웠다.
그러므로 멜로리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한다.
진심 또한 전달 됐다.
“...고맙구나.”
이번에 패자에게 손을 내밀어준 건 신이 아닌 인간이었다.
모든 광경이 그리드의 서사시에 기록되고 있었고 사도들의 격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