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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29화 (1,627/1,794)

템빨 81권 - 5화

신의 높고 낮음은 무엇으로 구분하는가.

후광의 명도? 위치와 복식의 차이?

그보다는 ‘축복’의 정도다.

단지 마주하는 것만으로 상태 이상을 유발하는 악마나 몬스터와 달리 신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축복을 내렸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대부분 축복을 차단하거나 즉시 다시 회수한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아무튼 제라툴을 쫓아 지상에 내려온 신들은 후자에 속했다.

나중에 회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인간들에게 축복을 내렸단 말이다.

자신의 신화를 널리 알리고 숭배 받고 싶다는 욕망의 표출이었다.

오래토록 인계에 강림하지 못했던 하위 신들에게 이번 성전은 커다란 기회였기에.

알드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한 흥미 본위로 제라툴에게 무예를 배운 그 백발의 신은, 제라툴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번 지상행을 결정했다.

거대한 축복을 인간들에게 내리고 제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언젠간 자신 또한 아스가르드의 주신이 되어 전지전능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였다.

“오라.”

알드로에게 브라함은 몹시 적절한 상대였다.

지상이 정녕 새로운 신계로 거듭났구나.

자연히 납득 될 정도로 대단한 인물들이 즐비한 이곳에서도 브라함은 군계일학이었기에.

신의 눈으로 봤을 때도 브라함은 특별한 존재였다.

무지막지한 마력을 지녀서, 베리아체의 혈육이라서가 아니다.

히드라의 신화.

절대 다수의 신들에게 치명적인 그 대괴수의 신화가 브라함의 일부인 것처럼, 혹은 브라함이 대괴수 신화의 일부인 것처럼 혼재되어 있었다.

존재 자체가 위협이란 의미다.

하물며 인간들에겐 공경의 대상일 터.

다소 두려울 지경이었으니 도전할 만한 가치가 차고도 넘쳤다.

그와 싸워서 승리하는 순간 격이 몇 단계는 상승할 테니까.

본래 침입자를 억압했어야 할 템빨계의 차원 특성은 제라툴이 ‘무신’의 권능으로 상쇄시킨 상황.

어쩌면 두 번 다신 없을 기회가 눈앞에 찾아온 것이다.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싫다.”

“...?”

들뜬 마음으로 브라함에게 승부를 요청했던 알드로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설마 거절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만인이 지켜보는 자리 아닌가.

사람들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여 봤자 좋을 게 없을 입장인데 대결을 거부하다니?

심지어 오만한 표정은 유지한 채로.

표정과 선택이 전혀 매치가 되질 않는다...

“겁먹은 것치고 방자하구나.”

“좋을 대로 지껄여라.”

콧방귀 뀐 브라함이 알드로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알드로가 처음 강림하면서 보란 듯이 내렸던 축복을 떠올리면서다.

풍요.

세상에 젖과 꿀이 흐르게 만들었다.

세계 각지에서 굶주려온 이들 중 상당수가 단숨에 구원 받았을 거란 확신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자신의 상대는 아닌 것이다.

브라함은 세 번째로 낮은 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처럼 작디작은 신.

사람들의 지혜와 마력을 증폭시키는 축복을 내렸었고 그 정도가 미약했다.

후광까지 옅어 낮은 신으로 보였다.

하지만 브라함은 간파했다.

저놈은 다른 신들과 달리 스스로를 뽐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저놈이 가장 강하다.

“나는 대장전에서 저 녀석과 싸우도록 하지.”

“...”

잔뜩 긴장한 채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게슴츠레한 눈이 되었다.

피아로와 나란히 템빨국을 상징하는 최강자.

그리드도 존경한다는 브라함이 가장 낮은 신 중 하나와 싸우겠다는 선언에 내심 실망한 것이다.

상대는 생김새부터 꼬맹이 아닌가.

어린애를 괴롭히는 고약한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다.

아저씨라기엔 너무 젊고 잘생겼지만...

“넌... 내 예상보다 대단한 실력자로구나.”

브라함과의 격차를 눈치 챈 알드로가 오싹함을 느낄 때였다.

“당신이 풍요의 신이라고”

한 사내가 무대 위로 올랐다.

밀짚모자를 쓰고 농기구를 거머쥔 사내.

알드로가 그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봤다.

“템빨신의 일곱 사도 중 최약체라는 피아로. 최근 대천사들을 상대로 승전하여 희미한 신격을 얻었다고 듣긴 했으나... 어떤 마법사의 도움을 받은 덕분이라고 알고 있는데. 내 상대로는 손색이 크다.”

알드로는 내키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반면 피아로는 달랐다.

함박웃음을 지을 만큼 상대가 마음에 들었다.

“실망시키는 일 없도록 하겠소.”

피아로는 여러 시선을 느꼈다.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보내오는 농부들의 시선, 간절한 바람을 품은 백성들의 시선, 그리고 부인과 딸, 그리드의 시선...

한결같이 소중한 이들이 보내오는 시선이었다.

그들의 간절한 염원에 부응하지 못한다?

그건 애초에 신이 될 자격이 없다는 의미다.

피아로는 이번 대결에서 반드시 이길 필요가 있었다.

상대가 풍요의 신이기에 더욱 더.

비로소 ‘농부의 신’이 되기 위해선, 이기는 수밖에 없다.

“왜 농부의 신이냐고...”

피아로의 의지를 읽은 하늘 위 그리드가 한탄했고,

“어서 신전으로 돌아가자.”

진즉부터 그를 태울 수 없게 된 네펠리나가 염려 섞인 목소리로 재촉했다.

초월룡의 지속 시간이 끝나고 다시금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리드의 상처들이 온전히 회복되질 않았으니까.

잘려나간 신체 부위를 수복하는 건 본래 시간이 필요할뿐더러 하필 제라툴에게 당한 상처였기 때문이다. 무신의 집념이 상처의 회복을 더디게 만들었다.

재차 돌이켜봐도 무신 제라툴은 무지막지하게 강했다.

다른 사람들에겐 채 1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그리드에게 무참히 패배하고 퇴각한 것으로 보였겠지만 네펠리나는 바로 곁에서 똑똑히 목격했다.

제라툴이 순간순간 보여준 각종 무예의 수준은 망자의 기술을 모두 다루는 바알의 기술보다 고절했다. 네펠리나는 도무지 범접할 수 없는 경지였다.

한데 그리드가 이겼다...

태어난 순간부터 쭉 그리드를 지켜봐온 네펠리나는 너무 큰 감동을 느끼고 말았다.

처음 봤을 때도 대단했던 인간이긴 했지만, 설마 지옥의 악마와 천상의 신들을 줄줄이 박살내고 아버지의 인정을 받는 수준까지 성장할 줄이야...

결합을 허락 받았던 순간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힌 네펠리나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 상황 자체에 흥분감을 느끼는 것이다.

“아니, 난 여기에 있어야 돼.”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잘려나간 코에서 여전히 흐르는 핏물을 투구로 가린 채, 형형한 눈빛을 지상으로 보낸다.

막 대결을 시작한 피아로의 모습을 지켜봤다.

“나와 함께해온 사람들이 신이 되려는 순간이야.”

내가 지켜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호미를 휘두르기 직전.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오는 피아로에게 고개를 끄덕여 화답해준 그리드가 기적을 목도했다.

피아로가 씨앗을 뿌린 즉시 논밭으로 변모한 무대의 정중앙에 거대한 나무가 우뚝 선 것이다.

비릿한 혈향으로 가득 찼던 그리드의 후각에 풀냄새가 스쳤다.

울창하게 뻗어나간 가지에서 솟아난 잎사귀들이 하늘을 뒤덮어버린 여파다.

“세계수...?”

피아로가 신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물며 저토록 고강한 신을.

반신반의한 채 지켜보던 사람들이 곳곳에서 탄식을 터뜨렸다.

하늘을 받친다고 알려진 세계수와 감히 비교 될 정도로 피아로가 세운 나무가 크고 울창했다. 물론 실제 세계수와 비교하면 한없이 작았지만 세상에서 두 번째로 큰 나무라는 것엔 누구도 이견이 없을 터였다.

사람들의 염원 덕분이다.

피아로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농부들과 엘프 출신인 부인의 염원이 섞여 세계수의 재현이라는 기적을 일으켰다.

신뢰를 보내는 농부 중에 검성, 템빨신교교주, 오러 마스터라는 무지막지한 거물들이 포함 된 까닭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피아로는 알고 있다.

설령 저들이 없었을지언정.

오직 그리드만큼은 자신을 지지해줬을 거란 사실을.

그리드가 있는 한 자신은 지금 이 순간의 기적을 반드시 행사할 수 있었으리란 확신이 그에겐 있었다.

“농부의 신이 되는 걸 지지한 적은 없...”

신과 사도.

실시간으로 짙어지는 교감 속에서.

피아로의 의념을 읽은 그리드가 태클을 걸었지만 소용없었다.

피아로는 그리드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풍요의 신’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농부의 신과 풍요의 신.

어차피 거기서 거기 아닌가.

어획의 신 라스가 누군가에겐 풍요의 신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가리온의 말이 증명한다.

그러므로 괜찮다.

꽈아아아아앙!!

“음...!”

알드로의 두 눈이 커졌다.

제라툴에게 배운 권술.

피아로의 작디작은 호미를 단번에 부서 버릴 작정으로 휘두른 주먹이 의외로 가로막힌 까닭이다.

호미와 주먹이 충돌한 순간 크게 휘청거린 나무가 거슬렸다.

‘지금 설마 충격을 흡수해준 건가?’

알드로가 권능의 사용을 고민했다.

그의 권능은 생물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성장을 촉진시키는 게 가능했고 한도가 넘는 생명을 부여하여 도리어 명을 짧아지게 만들 수도 있었다.

저 거대한 나무를 금방 시들게 만들 수 있단 의미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 성전에서 권능을 사용하는 순간 성전의 본질이 훼손되는 까닭이다.

권능을 써서 이겨봤자 제라툴의 무맥을 증명하지 못하면 패배한 게 된다.

‘추하게 억지를 부리고 싶진 않아.’

높은 신들의 원죄를 알고 있다.

무대 아래의 지크와 사리엘이 증명하는 진실이다.

저들 앞에서 또 한 번 추태를 보여 신의 위신을 추락시킨다면.

알드로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내 상대로 손색이 없음을 인정하마.”

심호흡한 알드로가 집중했다.

두 주먹을 가볍게 쥐고 보폭을 벌리며 한쪽 어깨를 비스듬히 내린다. 제라툴의 가르침을 온전히 실천했다.

이 순간.

알드로의 머리 위로 떠오른 후광이 처음보다 찬란해져 있었다.

따스한 빛.

코앞에서 마주해도 눈부시지 않다.

그리드의 신성을 어렴풋이 닮아서, 피아로는 자신이 진정한 신을 마주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영광으로 알겠소.”

꽈아아아앙...

피아로의 움직임에 맞춰 함께 흔들리는 거대한 나무가 라인하르트의 하늘을 녹색으로 덧칠해갔다.

알드로는 피아로의 농기구와 공격을 교환할 때마다 나무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정확히는 나무에 담긴 사람들의 염원이나 믿음 따위들.

몹시 무거웠다.

한 번의 무게를 견딜 때마다 알드로는 신음을 삼켜야했다.

문득 씁쓸해졌다.

자신이 아닌 눈앞의 인간이 신처럼 보였으니까.

“...애초에 잘못 됐던 거지.”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인간의 숭배를 필요로 하는 신을 자처한다는 것은.

문득 드는 생각에 씁쓸하게 웃은 알드로의 주먹이 피아로의 안면을 강타했다.

피아로의 호미가 알드로의 이마에 구멍을 뚫기 직전이었다.

꽈아아아아아앙!!

거대한 나무가 폭발했다.

본래 산산조각 났어야 할 피아로의 얼굴을 대신해서 자신이 희생한 것이다.

수백 회의 공방 끝에 급격히 시들어가는 논밭 위에서.

“언젠가 그대에게 농사를 배우고 싶군.”

알드로는 피아로에게 주먹이 아닌 손을 내밀었다.

“인간들의 마음을 얻는 법을 배울 겸.”

본래 알드로는 배움에 거리낌이 없는 자였다.

그러므로 제라툴을 공경하지 않으면서도 무예를 배웠던 것이다.

자신보다 낮은 자에게 가르침을 구해도 이상하지 않단 의미였다.

게다가 그는 피아로를 인정하고 있었다.

당연하게 숭배 받는 제라툴과 달리 피아로는 존경할 구석이 많았기에.

“...”

침묵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알드로의 손을 섣불리 붙잡지 못하고 망설이는 피아로의 귓전에 그리드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벗을 사귀는데 망설이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자신 또한 아스가르드와 지옥에서 친구를 사귀지 않았냐면서.

-...허면 기꺼이.

슬며시 웃은 피아로가 알드로의 손을 붙잡았다.

사람들의 함성이 뒤따랐다.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각각 승리를 취했을 때만큼이나 거대한 함성이었다.

비록 피아로는 싸움에서 졌지만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신의 인정을 받고 신에게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된 것이다.

승자 이상의 명예를 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이는 알드로에게도 이롭게 작용했다.

알드로는 자신의 신성이 실시간으로 강해지는 걸 느꼈다.

“쉽게 현혹되기는...”

자신에게까지 환호하며 손을 흔들어주는 인간들을 보면서, 알드로는 한심하다는 듯이 핀잔을 주는 한편 웃고 말았다.

탄생 이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그를 기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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