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1권 - 4화
애초에 그리드의 손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갓 핸드가 서로 결착되어 그리드의 팔과 손을 이룬 것이다.
<의수>라는 아이템 판정을 받았고 그리드는 당연하게 모든 종류의 아이템을 제약 없이 다룰 수 있다.
[늦었다.]
제라툴의 의념이 울려 퍼진다.
들뜬 것처럼 들썩이는 의념이었다.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한 눈치였다.
확신할 수밖에 없다.
그의 호신강기는 다시 처음 상태로 수복되어 있었다.
그리드의 검무를 철저하게 무력화시킬 만한 구조 말이다.
무신의 권능으로 특정 검술을 분석하고 무력화시키는 건 천사가 날갯짓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하고 손쉬운 일이었다.
그리드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비해온 것이다.
촤아아아악!!
의수를 이룬 갓 핸드를 제외한 모든 갓 핸드가 거대한 날개처럼 펼쳐졌다.
각자 다른 형태의 무기를 쥐고, 일제히 평타를 휘둘렀다.
멀리서는 날개가 접히는 광경으로 보였다.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저정!!
[...!?]
제라툴의 당혹이 그리드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절대자의 공간을 가득 채운 의념으로 전달 됐다.
‘신에게 고정 데미지’를 입히는 무기 300자루가 동시에 휘두른 평타가 제라툴의 호신강기를 뒤흔들고 있었다.
[정녕 집요한 놈이구나...!]
동요를 드러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걸까.
분노를 숨기지 못한 제라툴이 기파를 일으켰다.
날개를 이룬 갓 핸드들을 사방팔방으로 흐트러뜨릴 의도였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리드의 의수와 맞물린 그것들은, 그리드를 기둥 삼아 제라툴의 기파를 견뎌냈다.
그리고 그리드는 흔들리지 않는 존재다.
정확히 말하면 흔들려선 안 됐다.
당장 발밑에 있는 저 수많은 인파 중 상당수가 자신을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제라툴의 기세를 이 악 물고 견뎌냈다.
펄럭!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정!!
그리드가 재차 휘두른 흑금색의 거대한 날개가 2차 폭격을 개시했다.
이번엔 무구의 비까지 함께 내렸다.
원덕구까지 개방한 그리드의 총공세였다.
함께 휘두르는 봉쇄가 제라툴에게 점차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리드가 아직 쿨타임에 걸려있는 낙월검을 꺼내 쥐는 페이크를 쓸 때면 움찔움찔 놀랄 정도였다.
[정녕... 이딴 하찮은 방법으로 신을 대적할 각오였느냐!]
온갖 종류의 무예로 무구의 폭우를 막아내던 제라툴이 다시 가속력을 얻었다. 폭우를 순식간에 돌파하고 그리드의 지척에 도달했다.
이 순간 그의 호신강기가 구조를 바꿨음을 그리드는 이해하고 있었다.
앞서 두 팔을 잃은 대가로 배웠다.
제라툴이 도착한 시점에 그리드가 6융합 검무를 펼쳤음이 증거다.
위룡극파살연(爲龍極派殺聯).
악룡의 기세를 재현하는 검무였다.
콰자작!!
황혼으로 스왑한 그리드가 제라툴의 몸을 관통했다.
[당신은 템빨계의 주인입니다.]
몸이 한없이 가볍다.
궁극기를 사용한 여파로 자원이 크게 소모되거나 쿨타임에 걸리는 후유증 따위가 없었기에.
콰자작!!
그리드가 재차 제라툴의 몸을 관통했다.
정면에서 뒤로.
뒤에서 다시 정면으로.
정면에서 측면으로.
측면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위룡극파살연을 무려 수차례나 쉬지 않고 반복 전개했다.
그때마다 제라툴의 완벽했던 호신강기가 무너졌다.
다시금 검무를 무력화시키는 구조를 이루려다가 실패하고 깨지길 반복했다.
[...크아아아악!!]
절대자의 영역이 흩어져간다.
제라툴의 비명이 천지사방으로 메아리쳤다.
무신.
비록 가짜라곤 하나 당연히 승리하고 무적이어야 할 존재가 그리드에게 처참히 무너진 순간이었다.
꽈아아아아앙!!
넝마가 된 제라툴이 제 무덤을 찾아가듯 무대 위로 떨어진 순간.
쿠르릉! 쾅! 콰쾅쾅!!
그리드와 제라툴의 격전이 맞든 온갖 굉음이 천둥처럼 뒤따르며 라인하르트 전역에 울려 퍼졌다.
[내 무맥은... 내 무맥은 아직 지지 않았다...!]
핏물을 철철 흘리며 입을 뻥긋거리던 제라툴이 끝내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고 의념으로 외쳤다. 잿빛으로 산화하면서다.
정녕 추악한 모습으로 무대에서 퇴장한 것이다.
[템빨신 ‘그리드’가 무신 ‘제라툴’을 패퇴시켰습니다!]
사람들이 이미 인지하고 있던 결과가 월드 메시지로 떠올랐다.
“우와아아아!!”
어마어마한 함성이 퍼졌다.
라인하르트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승전보를 접한 사람들이 환호했다.
하지만 아직 제라툴의 격은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견고한 신격이 흔적으로 남은 까닭에 여덟 신의 삼위일체도 유지되고 있었다.
“위축되지 말고 마음 편히 싸워라. 네가 내 손에 죽어 명예를 잃더라도 남은 사도들이 내 무맥을 상대로 선전한다면 신격을 잃는 사태는 없을 테니.”
제라툴이 그리드를 조롱하며 했던 말이 보험으로 작용한 까닭이다.
그리드가 네펠리나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도 한 몫 했다.
광신광룡의 비화가 알려진 대신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무신을 섬기는 여덟 신.
무신의 무맥을 이은 그들에겐 아직 제라툴을 구원할 기회가 남았다는 말이다.
가장 낮은 신이 선봉을 자처했다.
“무신께서 비겁한 템빨신에게 겪은 수치와 모욕을 내가 그분의 무예로 갚으리라.”
당당하게 무대 위로 올라서는 가장 낮은 신의 이름은 바래로였다.
천사처럼 성스럽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
하지만 이 순간 표출되는 그의 기세는 악귀처럼 무시무시했다.
마음 같아선 자신이 직접 그리드를 해치워버리고 싶다는 듯이 그리드를 노려보는 눈빛이 표독스러웠다.
“어느 사도가 나를 상대하겠느냐. 누구라도 좋다.”
바래로가 재촉했고,
“제가 상대하죠.”
무대에 오를 사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검성 크라우젤.
가장 낮은 신을 상대하기에 가장 적합한 전력 중 하나였다.
크라우젤은 다른 사도들과 유페미나를 상대로 겸손의 미덕을 보인 것이다.
바래로가 무섭게 일그러뜨리고 있던 얼굴을 한층 더 구겼다.
“사도조차 아닌 네놈이 나의 상대라고? 하물며 네놈은 검조차 잃지 않았느냐.”
바래로는 무시를 당한 기분이라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볼품없이 휘어진 크라우젤의 검을 가리키며 내키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크라우젤은 묵묵히 하늘을 올려봤다.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올라있는 그리드의 모습이 그에겐 정확히 보였다.
상처투성이다.
저 상태론 지상에 내려올 수 없겠지.
안타까운 마음을 애써 억누른 크라우젤이 이기어검의 수법으로 황혼을 높이 날렸다.
곧 그리드의 손에 쥐어진 그것은 그리드가 망치를 한 번 두드리자 완전히 수리됐다.
-잘 부탁해.
그리드의 귓속말과 함께 멀쩡한 모습의 황혼이 크라우젤의 손아귀로 되돌아왔다.
한 순간 크라우젤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드가 던져준 황혼은 자신의 검이 아닌 그리드의 검이었으니까.
즉, 고룡의 송곳니로 만든 황혼이란 말이다...
당혹감을 애써 억누른 그가 바래로에게 검을 겨눴다.
“이걸로 당신이 댈 핑계는 없어 보입니다만.”
“정말이지... 하나 같이 불쾌한 족속들이다.”
쯧, 혀를 찬 바래로가 크라우젤과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초감각에 아슬아슬하게나마 잡히는 속도였다.
일단 수세를 취하며 기회를 엿볼 심산으로 황혼을 세운 크라우젤이 조금 전 현장에 도착했던 미르를 떠올렸다.
전성기의 미르와 비교해서 눈앞의 신은 어느 정도일까 문득 궁금해진 것이다.
환국의 첨병을 맡을 운명이었던 미르와 가짜 무신을 따르는 하위 신.
둘 중 누가 우위에 있을까.
생각하면서,
“...!?”
황혼의 무지막지한 예기에 당황하는 바래로의 빈틈을 정확히 노린 크라우젤이 우주 검을 전개했다.
템빨신과 검성의 합작.
그 위력은 크라우젤의 예측과 그리드의 기대를 가볍게 초월했다.
정확히 표현하면 그리드의 신성이 세계를 양단하는 셈이었으니까.
“무맥이라는 표현을 쓰기엔 너무 거창했던 거 아닙니까.”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크라우젤이 바래로에게 일침을 날렸다.
“...”
바래로는 대꾸하지 못했다.
반으로 갈라진 그의 몸으로 언어를 구사한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실시간으로 회복을 시도하곤 있었지만 크라우젤이 시간을 주지 않았다.
검성의 자격으로 그리드의 황혼을 완벽하게 다루며 검술로 몰아붙였다.
끝내.
“크윽... 졌다...”
검성의 검술과 결합 된 템빨에 속수무책으로 밀린 바래로가 무대에서 퇴장했다.
도중에 제라툴에게 배운 무예가 아닌 권능을 써서 위기를 넘기는가 싶더니 곧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고 항복한 것이다.
하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그리드는 저놈이 제라툴보다 낫다고 중얼거렸다.
“...우와아아아아!!”
함성이 메아리쳤다.
플레이어의 신분으로 무신을 패퇴시킨 그리드.
안 그래도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섣불리 믿지 못하고 꿈결 같은 기분에 취해있던 사람들이 자지러질 기세로 환호했다.
정신적 쾌락에 취해 절정을 맛본 사람만 수천 명이었다.
템빨계.
그리드와 인류가 함께 만든 새로운 세계는, 사람들의 기대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견고한 것이다.
그리드가 기둥으로 버텼고 사람들이 지탱했다.
“...희극의 배우가 된 심정이군.”
곧 새로운 신이 무대에 올랐다.
제라툴 다음으로 높은 곳에 위치했던 신이다.
풍기는 기운 자체가 바래로와는 차원이 달랐다.
제라툴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선 무신을 자처해도 될 만큼 엄청난 위압감을 발산했다. 제대로 숨 쉴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제라툴이 질 줄이야... 이게 가짜 신의 한계라는 건가. 알면서도 그를 섬긴 내가 감수해야할 부분일 테지.”
누가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자신의 심정을 중얼중얼 표출한 백발의 신은 정확한 안목을 지녔다.
저 높은 첨탑에 올라 오만한 표정으로 무대를 내려 보고 있는 브라함을 지목한 것이다.
“그대가 사도 중 으뜸이렸다. 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