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1권 - 3화
“이건 무효다.”
여덟 신 중 가장 낮은 신이 으름장을 놓았다.
조금 전 내지른 비명이 인간들의 함성에 묻힌 점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네 출신성분에 문제가 있음을 안다. 하지만 수치심조차 모르진 않을 터인데? 어찌 비겁한 협공을 가한단 말이냐?”
흐름이 나쁘다.
이어질 결과야 어찌됐든, 지금 당장의 상황은 무신께 불리했다.
수많은 목격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상처를 입고 추락하신 것이다.
곧장 다시 일어서긴 했지만 하늘 위에 고고히 떠있는 템빨신과 너무 대비됐다.
“...”
그리드는 대꾸하지 않았다.
제라툴이 후로이를 무시했던 태도를 떠올리며 고스란히 되갚아주는 것이다.
그의 의도를 눈치 챈 가장 낮은 신이 얼굴을 붉히는 순간이었다.
“어딜 봐서 비겁한 협공이오?”
후로이가 그리드를 대신해서 반문했다.
가장 낮은 신이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리드가 제 사도의 몸에 올라탄 모습을 만인이 목격했고 이 순간에도 지켜보고 있다. 한데 짐짓 모르는 체 하겠다고?”
“내 주군께서 드래곤에 올라타신 웅장한 모습이 어찌하여 비겁한 협공이냐 이거요. 사람들이 우러러보기 쉽도록 말의 등 대신 드래곤의 목덜미를 빌리셨을 뿐이거늘.”
“...광신광룡의 비화를 우리가 모를 줄 아느냐! 그리드에게 여태껏 없던 드래곤 나이트의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
태연하게도 지껄이는 후로이의 모습에 너무 흥분하고 말았다.
가장 낮은 신이 아차 싶어 입을 닫았지만 늦었다.
[<광신광룡>의 비화가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집니다.]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스가르드가 공증하였습니다.]
이미 바알과의 전투에서.
그리드는 <드래곤 나이트>의 힘을 선보였었다.
하물며 고룡의 목덜미에 올라탄 채로.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정확히 어떤 개념인지, 무슨 경위로 탄생한 능력인지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근거가 부족한 힘이었다는 말이다.
어떤 사물이나 개념이 강력한 의미를 지니기 위해선 본래 역사적인 배경이 필요했으니까.
“아...”
사람들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광경에 매혹됐다.
그리드가 이프리트를 만나 광신광룡의 비화를 쓰는 과정이 짧고 강렬하게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졌다.
유일 신화.
천지창조 이래 최초로 신과 드래곤이 협력한 신화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동이 있었다.
당시 그리드와 이프리트에게 힘든 사연이 있었다는 점이 대중과 공감대를 형성했다.
[<광신광룡>의 비화가 당신의 신화에 온전히 흡수됩니다.]
[세계에 유일한 칭호 <드래곤 나이트>의 효과가 강화됩니다.]
[이제부턴 조금 더 쉽고 안전하게 드래곤에 탑승할 수 있습니다.]
드래곤 나이트의 약점은 명확했다.
일단 탑승할 드래곤을 구해야한다는 것.
그리고 그 드래곤에 무사히 탑승해야한다는 점이다.
조금 전.
만약 네펠리나에게 ‘한계를 돌파하는’ <초월룡>의 권능이 없었다면 그녀는 무사히 그리드 곁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드는 드래곤 나이트의 효과를 누리지 못한 채 제라툴과 싸웠을 테고 한동안 수세에 몰렸을 공산이 컸다.
앞으론 그런 위험이 사라졌다고 해석해야 옳았다.
가장 낮은 신의 실언이 그리드에게 엄청난 이점을 안겨준 것이다.
순전히 후로이의 공로였다.
“죄, 죄송합니다...”
가장 낮은 신이 어느새 몸을 일으킨 제라툴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제라툴은 무시했다.
그의 부리부리한 두 눈은 그리드에게 꽂혀있었다.
좌중을 압도하는 거구를 꼿꼿이 세운 채 흐르는 핏물을 증발시킨 그의 무색 신성이 한 가닥, 한 가닥 신경처럼 작용했다.
호신강기를 처음부터 다시 짠다.
조금 전 체험한 그리드의 힘과 기술을 복기하며, 철저히 무력화시킬 얼개를 이뤄갔다.
‘해츨링의 성장을 무슨 수로 가속시킨 거지.’
제라툴은 큰 의문을 느꼈다.
시간을 압축시켜서 성장한다고 해도 한도가 있는 법이다.
해츨링에게 성체의 역할을 맡기는 건 자연적으로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한데 그리드는 가능하게 만들었다.
권능과 관련이 있으리라.
템빨신의 권능이 무구나 아티팩트를 창조하는 것임을 떠올린 제라툴이 결국 인정하고 말았다.
‘템빨신...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나와 닮았구나.’
제라툴은 특정 대상에게 비급을 하사하거나 무예를 전수하는 방식으로 대상을 발전시키는 게 가능하다. 송충이를 호랑이로 만들어버리는 수준이다.
아이템을 하사하는 식으로 대상을 발전시키는 그리드와 비슷한 것이다.
“선봉은 누구라도 상관없는 거였군.”
순식간에 새로운 호신강기를 갖춘 제라툴이 입을 열었다.
“이번 성전의 승패는 너와 나의 대결로 결정 지어지는 게 아니었어.”
무신의 무예를 계승한 무리와 템빨신의 무구를 계승한 무리의 대결로 봐야 옳다.
“나의 무맥과 네가 만든 장난감 중 무엇이 더 우위일까.”
신은 인간의 염원에 일일이 호응하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한도 끝도 없기 때문이다.
제라툴도, 그리드도.
자신을 숭배하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고군분투해야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더 강한 무예를, 더 나은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제라툴은 단순히 자신의 무(武)가 위대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서였고 그리드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라서라는 차이점이 존재하긴 했지만, 의도야 어쨌든 같은 목표를 지닌 셈이다.
“위축되지 말고 마음 편히 싸워라. 네가 내 손에 죽어 명예를 잃더라도 남은 사도들이 내 무맥을 상대로 선전한다면 신격을 잃는 불상사는 없을 테니.”
내 무맥을 상대로 선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겠지만.
뒷말은 삼키며 미소 짓는 제라툴의 두 눈에서 동공이 사라졌다.
흰자위만 남아서는 안 그래도 위압적인 외모를 한층 더 무섭게 가꿨다.
큰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다.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읽히지 않는다는 건.
찰나의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한 절대자간의 싸움에서 몹시 이롭게 작용했기에.
“스스로를 위로하는 건가.”
코가 완전히 잘려나간 듯하다.
지혈제를 복용해도 출혈이 멈추질 않아 입을 열 때마다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비릿한 핏물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리드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질 걸 뻔히 알지만 싸우겠다는 각오로 들리는데.”
어차피 네펠리나를 탑승할 수 있는 시간은 1분이 한계다.
이제 39초밖에 남지 않았다.
출혈 상태에 연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드는 되도록 빠르게 전투를 끝내고 싶었고, 과연 도발은 먹혀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한 방 크게 먹고 망신을 당한 제라툴 아닌가.
두꺼운 눈썹의 양끝이 위로 솟구친다 싶더니 벼락처럼 움직였다.
언월도를 버리고 양손에 두 자루 검을 쥔 채다.
오른 손에 쥔 검은 짧은 소검이었다.
근접 단타로 그리드의 검로를 사전에 끊어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
재차 소리가 사라진 세계에서.
그리드는 무지막지한 제약을 느꼈다.
고작 단 한 번의 보폭을 내딛으면 완성되는 검무를 함부로 시도하지 못했다.
네펠리나의 머리를 짓밟으며 다가온 제라툴이 검로의 반경을 미리 점한 까닭이다.
어느 지점을 검무의 시작점으로 삼든 무조건 차단되고 역공을 허용할 것만 같았다.
괜찮다.
지금 시점에서 검무를 쓸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으니까.
━━!
제라툴이 접근해오는 사이.
황혼을 쥔 손을 등 뒤로 뻗었던 그리드가 전심전력으로 팔을 내리쳤다.
제라툴은 종으로 꽂혀올 황혼의 검로를 당연하게 예측했다.
황혼을 무력화시킬 호신강기를 위시하며 소검을 찔러 넣었다.
그리드의 공격을 손도 안 대고 차단하는 한편 그리드의 심장을 취할 의도였다.
물론 신은 심장을 꿰뚫려도 죽지 않는다.
그럼에도 굳이 심장을 노린 이유는 앞서 겪은 굴욕을 되갚아주기 위해서였다.
다소 깊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제라툴의 기감에 빈틈은 없었다.
그리드의 등 뒤에 숨었다가 재차 나타난 검이 황혼에서 다른 것으로 교체됐음을 보지 않고도 간파했다.
━━!
제라툴의 허리가 기이하게 꺾였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른 그 한 번의 동작으로 소검은 가일층 가속했고 반대편 왼 손에 쥐어졌던 장검은 그리드의 검로를 차단했다.
...쩌엉!!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한 발 늦게 폭음처럼 울린 그때.
제라툴의 오른팔은 무색의 신성과 함께 통째로 잘려나가 있었다.
산산조각 난 채 산란하는 장검의 파편들이 그리드의 <낙월검>을 다양한 각도로 비추는 중이다.
[...놈!]
호신강기가 깨진 여파로 주춤하던 제라툴이 급격히 상승했다.
그리드의 심장을 찌른 소검이 덩달아 솟구치며 그리드의 쇄골을 내부에서부터 분쇄했다.
심상으로 덧씌운 발할라와 드래곤 아머가 어느 정도 데미지를 상쇄시켜주긴 했지만 제라툴의 공격력이 워낙 막강했다.
‘크윽.’
제라툴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신성을 베어버린 저 정체불명의 마검을 막아낼 수단을 쉽게 찾지 못한 까닭이다.
거인족의 멸망은 과연 필연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불길한 근본을 지닌 검.
그것을 경계하느라 혼선을 겪는 제라툴에게 그리드가 새로운 검을 꽂아 넣었다.
황혼과 마찬가지로 그리드의 신성을 머금었지만 발출하진 않는 검.
내포한 신성을 최대한 응축시킨 채 품고 있는 그것은 마치 태양을 가둬놓은 강철의 파편 같았다.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상징하는 느낌인 탓에 낙월검만큼이나 불길했다.
결국 제라툴이 뒤로 물러섰다.
그리드의 쇄골을 분쇄하고 이어서 목젖까지 꿰뚫고 나왔어야 할 소검 역시 그의 손에 붙들린 채 뽑혀나왔다.
푸화하하하학!!
그리드의 가슴에서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졌다.
주황색 신성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대량의 출혈이었다.
하지만 아직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했다.
템빨신과 무신의 전투를 실시간으로 쫓는 건 오직 당사자들밖에 없었다.
그리드가 새로운 신검 <봉쇄>를 연속해서 휘둘렀다.
표본처럼 단조로운 구조로 기본에 충실한 검.
평타의 위력을 증폭시키는 신검이다.
굳이 봉쇄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적을 때려서 막으니까.’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특수한 옵션이 이런 이름을 강제했다.
쩌정! 쩌저저저정!!
궁극에 이른 제라툴의 검술은 어렵지 않게 그리드의 검로를 차단하는 중이다.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발생하는 굉음이 연신 한 발 늦게 이어지며 공간을 채워나갔다.
하지만 제라툴은 의외의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드래곤 나이트와 증폭공의 효과를 등에 업은 그리드의 평타 한 방, 한 방이 워낙 묵직해서였다.
당연히 제라툴도 힘이라면 밀리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위협은 느꼈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만드는 점은 현재 그의 호신강기가 유지하고 있는 형태다.
기본적으로 그리드의 ‘검무’를 견제하는 용도로 짜인 호신강기가 이점이 아닌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그에게 괜한 손해를 보는 느낌을 줬다.
스스로에게 제약을 주고 싸우는 감각.
그리드가 점차 더 기고만장해지는 가운데 목격자들이 제멋대로 어떤 착각을 할까봐 거슬렸다.
‘잠깐만이다.’
스륵.
결국 제라툴의 무색 신성이 재차 미세하게 변했다.
호신강기를 현재의 상황에 맞게끔 다시 짰다.
그리드의 새로운 검이 갖는 강점을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가속력을 얻는 구조로.
불시에 치명상을 입혀서 전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버릴 의도였다.
스칵!
그리드의 오른팔이 떨어져나갔다.
제라툴과 마찬가지로 외팔이 되어선 쌍수검을 다루지 못하게 됐다.
호신강기의 구조를 본래 상태로 되돌리려던 제라툴이 순간 욕심을 품었다.
새로운 호신강기를 유지한 채 그리드의 왼팔마저 노리고 베었다.
노림수는 성공했다.
그리드가 양팔을 잃었다.
여태까지의 치열한 구도가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허무한 결과였다.
본래 절대자간의 대결이 그랬다. 워낙 순식간에 상황이 바뀐다.
꽈드드득!
그리드의 주변을 맴돌던 수백 개의 갓 핸드 중 일부가 그리드의 잘려나간 양팔을 고스란히 대체한 것도 순식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