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1권 - 2화
아스가르드와 템빨계의 대결.
혹자는 이런 자극적인 표현을 쓰는 가운데 무수히 많은 인파가 라인하르트로 몰렸다.
“그리드와 사도들이 아스가르드를 상대로 잘 싸울 수 있을까?”
“상대는 아스가르드가 아니야. 어디까지나 무신 파벌과의 대결이지. 뭐 그렇다고 해서 승산이 높진 않겠지만...”
각계각층의 인사가 모였다.
단순히 흥미본위로 찾아온 구경꾼들, 템빨국의 정세에 예민하게 영향을 받는 상인들, 아스가르드가 은연중에 내린 신탁을 애써 외면하고 템빨단을 따라온 각 세력의 수장들, 절대자들의 대결에서 어떤 영감을 얻길 바라는 랭커들, 이번 대결에 운명이 걸렸다고 믿는 평범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무대가 광장을 가득 채운 상황과 별개로 그들이 자리 잡을 공간은 많았다.
무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층 빌딩의 내부나 옥상, 성벽과 첨탑 위, 무대의 영상을 송출하는 마법구가 설치 된 시설물 등등.
라인하르트는 워낙 거대하고 발달 된 도시다.
“아...”
긴장하고 있던 사람들이 탄식했다.
“오오!”
흥분해 있던 사람들은 환호했다.
“미친...”
절대자들의 수준을 가늠하려던 랭커들은 경악했다.
무신의 출현이 만든 여파다.
찰나이므로 강렬한 전광.
그것을 계단 삼아 밟고 내려오는 제라툴의 운신은 상식을 초월하고 있었다.
번개라는 현상에 물리적으로 개입하는 것으로 모자라 한 번 번쩍였다가 흩어지는 번개의 속도를 느릿해 보이는 발걸음으로 따라잡는 것이다.
“그리드가 이곳이 제 무덤이 될 거란 사실을 눈치 챘구나.”
까마득히 높은 곳에 출현했던 제라툴이 어느새 지상과 가까워졌다.
스르륵, 스르륵.
전광을 밟고 미끄러지듯 내려온다 싶더니 순식간이었다.
[무신 ‘제라툴’이 강림하였습니다.]
꽈르릉!
마지막 천둥소리와 함께 어두운 하늘이 환하게 밝혀졌다.
물결을 이루고 몰려온 황금색 구름이 빛을 사방팔방으로 굴절시키고 있었다. 라인하르트 곳곳에 형성 된 빛의 기둥이 성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템빨계의 발원지라곤 하나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도시인 라인하르트가 진정 초월적인 공간으로 변모한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막연히 상상해온 아스가르드의 모습과 어렴풋이 닮았다.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단지 제라툴이 강림했다는 이유로 세상이 바뀌어버렸으므로.
“신...”
그리드라는 플레이어가 차근차근 도달한 경지가 아닌 진정한 신.
무신과 그를 따르는 여덟 신을 목도한 랭커들은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염없이 높은 벽을 마주한 감각.
“내가 그리드였다면 대양을 홀로 표류하는 심정이었을 것 같은데.”
테디베어와 나란히 앉아 무대를 지켜보던 아스카가 중얼거렸다.
막대한 자본과 노력을 들여 매입해온 그리드제 아이템들.
그중 일부 전설 등급 무기에 말도 안 되는 옵션이 개화 된 것을 보고 자신감이 충만해졌던 게 불과 몇 주 전이다.
한데 이 순간 거짓말처럼 위축됐다.
‘신에게 고정 데미지를 입히는’ 능력이 생겼다고 해봤자 큰 의미가 없다는 판단이 선 까닭이다.
그리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같은 입장일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즉, 저 아홉 신을 상대로 그나마 싸움이 성립되는 플레이어는 그리드가 유일할 거란 이야기다.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다는 현실이 얼마나 끔찍하고 두려울까.
자칫 원망할 법도 하다.
‘그나마 사도들을 의지하기에도 숫자가 부족해.’
결사들을 부른 것 같은 눈치는 아니고.
총 아홉의 신을 무슨 수로 감당하려는 걸까.
아스카가 상황을 살피는 그때였다.
“그리드는... 이곳에 없군.”
무대에 선 제라툴이 얼굴을 구겼다.
안 그래도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생긴 그가 험악한 표정을 짓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각됐다.
각자 다른 위치에서 다른 입장으로 떠들던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한 순간 입을 다물어버릴 정도였다.
“만인 앞에서 싸우기엔 겁이 났나? 하여 추악하게 도망쳤더냐?”
혀를 찬 제라툴이 커다란 손을 허공에 뻗었다. 그러자 3미터 길이의 창대에 달린 언월도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무대 위로 떨어졌다.
쿠우웅...
축구장 몇 개를 붙여놓은 것처럼 거대한 무대가 통째로 흔들린다.
단순히 창대가 무대에 깃발처럼 꽂혔을 뿐인데.
“하찮은 놈, 만인 앞에서 도망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는 걸 모르는가. 뭐 됐다... 다시 돌아오게 만들면 그만이니까.”
제라툴의 시선이 무대 아래로 향했다.
막 현장에 도착한 사리엘에게 꽂히는 눈빛이었다.
“사도들을 하나씩 도륙하다보면 언젠간 돌아오겠지.”
흠칫 놀란 사리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옛 기억을 떠올린 까닭이다.
자신을 천상에서 쫓아냈던 신들.
그중엔 제라툴도 있었다.
마치 더러운 오물을 쳐다보듯 눈살을 찌푸린 채 상황을 방관했었다.
한없이 무력했던 순간의 기억들이 사리엘을 위축시켰다.
도망치고 싶다는 비겁한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웠다.
간신히 억눌러온 악마의 감정이 샘솟으려했다.
“하찮은 타천사가 하찮은 신을 섬기는 꼴이 우습다.”
사리엘의 기색을 읽은 제라툴이 콧방귀 뀌는 순간이었다.
“다짜고짜 나타나서는 왜 자꾸 망발이오?”
무대 가까이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템빨제국의 선전관 후로이였다.
“시간 약속도 정하지 않고 찾아와놓고 집주인이 없다고 행패를 부리는 게 아스가르드식 법도입니까? 아스가르드에 사는 자들은 대부분 집 없는 부랑자들이라 타인의 집을 방문할 때 어떤 절차를 밟아야하는지 학습하지 못한 건지?”
“...”
제라툴은 대꾸하지 않았다.
위계에 맞지 않았기에.
그를 섬기는 여덟 신 중 가장 낮은 자가 대신 입을 열었다.
“우리가 오늘 찾아올 거란 사실은 추종자들의 입을 통해서 충분히 전달했느니라. 저 많은 관객들이 곳곳에 미리 자리를 잡았음이 증거인데 너는 어찌 억지를 부리느냐?”
“단순히 이쯤 오겠다고 했을 뿐이지 정확한 시간을 통보하진 않았잖소? 내 주군께선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쁘신 분이오. 그분께는 1분, 1초가 황금보다 귀하므로 정확한 시간을 지키며 활동하셔야하는데 헤아리지 못하는 거요? 시간이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를 보아 한량이 따로 없군.”
“네놈은... 순전히 미치광이로구나.”
가장 낮은 신의 후광이 훅하고 일렁였다.
어느새 무대 아래로 내려온 그가 후로이의 목덜미를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하지만 금세 다시 놓쳤다.
여명처럼 피어오른 검에 위협을 느끼고 손을 뒤로 물린 것이다.
“언쟁에서 조금 밀렸다고 바로 폭력을 행사하는 겁니까? 하물며 당신들이 보살펴왔다고 주장하는 인간을 상대로.”
흑단 같은 장발이 흩날린다.
검성 크라우젤.
만인이 동경하는 존재가 후로이의 곁에 있었다.
“당대의 검성...”
무대 위 제라툴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네놈도 이번 성전의 참가자더냐?”
“그렇습니다.”
놀라운 대답에 술렁이는 사람들.
내심 그리드를 걱정하던 아스카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가운데 제라툴이 고개를 저었다.
“불허한다.”
제라툴은 불쾌하다는 기색이었다.
“네 윗대의 윗대조차도 내 일격을 감당하지 못했는데 네깟 놈이 감히 무슨 자격으로 무대에 선다는 거냐. 격이 맞지 않다.”
“그건 당신이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순간.
크라우젤은 절대자의 세계를 체험했다.
아니, 정확히는 휩쓸렸다.
불쑥 눈앞에 다가와 서있는 제라툴을 보고 몹시 크게 놀랐다.
검성의 초감각이 궁극에 도달하면 초월자의 감각을 상회한다지만 아직은 한참 부족한 것이다. 제라툴의 움직임을 전혀 쫓지 못했다.
“내가 정하지 못하면 누가 정한다는 거지? 설마 그리드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꾸우욱...
황혼의 날카로운 검날을 제라툴의 거대한 손이 붙잡고 짓눌렀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서서히 밑으로 떨어뜨렸다.
제라툴이 호신강기로 두른 무색의 신성이 황혼의 구조를 순식간에 분석하고 예기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무신은 모든 무예에 통달한 바.
당연히 병장기에 대해서도 해박했다.
호신강기의 구조를 실시간으로 다시 짜서 상대방의 무예와 병장기를 카운터치는 게 가능하단 의미다.
“명심해라. 여신께서 안 계신 곳에선 나의 뜻이 곧 너희가 따라야할 법도다.”
꽈직! 꽈지직...!
제라툴이 모든 인간에게 들으라는 듯이 선언하고, 제라툴의 손아귀에 쥐어진 황혼의 형태는 차츰 뭉개지는 그때였다.
“그 손 놓고 무대 위로 올라가지 그래.”
황금색 구름으로 물들어 있던 하늘에 주황색 신성이 번졌다.
찬란한 태양이 순식간에 저물고 황혼에 잠식 된 듯한 광경이었다.
플레이어들의 귓가엔 아름다운 선율이 흘렀다.
[템빨신 ‘그리드’가 등장하였습니다.]
“아...”
아스카가 깨달았다.
그리드의 존재감이 천상의 신들과 비교해도 결코 작지 않다는 사실을.
이렇게 대놓고 비교하니 비로소 실감 됐다.
“네놈이 감히 나를 기다리게 했구나.”
제라툴의 안광이 번뜩였다. 그의 만면에 번져가는 일그러진 미소가 어지럽게 솟구친 백발과 맞물려 도시의 모든 인간을 위압감으로 짓눌렀다.
그를 지켜보는 그리드의 눈빛이 사늘했다.
사람들을 겁박하는 제라툴의 기세가 몹시 거슬린다는 듯이.
크라우젤과 함께 만든 검을 무참하게 짓뭉개고 있는 제라툴의 손을 당장에라도 베어버리고 싶다는 듯이.
“이 정도 결계면 무대가 필요 없을 것 같긴 해.”
“무례를 범하고도 사죄조차 없는가. 곧 모든 것을 잃을 놈에게 이성적인 판단을 기대하긴 그른 것이겠지. 선봉이나 정해라. 누구를 먼저 무대로 올릴 것이냐.”
“내 말은 귓등으로 흘렸나.”
피차 마찬가지다.
그리드와 제라툴의 대화는 누가 봐도 어긋나 있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심지어 대화 자체가 짧았다.
그리드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검을 뽑은 탓이다.
제라툴의 손에 붙잡혀 있는 크라우젤의 황혼과 꼭 닮은 검이었다.
제라툴에겐 저절로 굴러 들어온 먹잇감으로 비췄다.
마침 막 분석을 끝낸 무기와 똑같은 구조의 검이라니.
무색의 신성을 재차 운용해서 호신강기를 바꿀 필요가 사라졌다.
찰나가 중요한 대결에서 이는 엄청난 이점이었다.
일그러진 미소를 유지한 제라툴이 손을 뻗었다.
다가오는 그리드의 황혼을 그대로 움켜쥐고 부숴버릴 의도로.
한데.
푸화하하하학!!
“...!?”
제라툴의 손에서 선혈이 솟구쳤다.
검을 쥐려다가 역으로 베여서 검지와 중지의 각도가 기이하게 뒤틀렸다.
같은 황혼이라도 차원이 다른 것이다.
고룡의 송곳니로 만든 검과 하위룡의 비늘로 만든 검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봐야 옳았다.
[비겁한 놈이 함정을 깔아놓다니...!]
절대자만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
찰나를 수차례로 분절시킨 시간의 틈새에서 제라툴의 의념이 울려 퍼졌다. 경악성에 가까웠다.
콰작!!
그리드 또한 어깨부터 허리까지 이르는 긴 흉터를 몸에 새겼다.
제라툴이 손을 뻗는 한편 휘두른 언월도의 궤적을 인공 감각으로 읽기 전에 베인 것이다.
미리 심상을 켜고 발할라의 보호를 받지 않았다면 몸이 반으로 갈라졌을 것만 같은 충격이 그리드의 의식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고통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원을 그리며 방향을 바꿈과 동시에 그리드의 가슴을 한 차례 더 휩쓸고 지나간 언월도가 이번엔 그리드의 안면으로 꽂혀들었다.
이제야 막 어깨의 상처를 자각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리드의 모습을 토대로 제라툴은 승리를 점쳤다.
아주 당연한 결과였다.
마침 그리드의 발밑에 네펠리나가 도착하지 않았다면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폐관수련을 끝내고 삼위일체까지 이룬 제라툴의 무위는 그리드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대단했으니까.
“기다리지 그랬어!”
네펠리나의 원망 섞인 외침이 매우 느릿느릿하게 공간을 맴도는 반면,
“빨리 치워버리고 싶어서.”
그리드의 목소리는 정상적인 속도로 공간을 채웠다.
언어를 구사하는 속도가 절대자의 세계와 맞물린다는 의미였다.
[과연, 네놈...]
절대자의 위계에 도달해 가는가.
피핏!!
그리드의 코를 찌르고 들어가던 언월도가 안면을 관통하지 못하고 뺨으로 스친다.
광신광룡 효과를 활성화시키고 흐름을 쫓기 시작한 그리드가 고개를 비틀어 피한 여파였다.
비록 코가 흉물스럽게 찢겨나갔지만 괜찮다.
제라툴의 심장을 찌른 대가치고 무척 싸게 치른 값이기에.
꽈아아아아앙!!
“...?”
“...?”
사람들이 상황을 의심했다.
번쩍하고 사라졌던 그리드와 제라툴의 모습이 다시 보였을 때.
무대 정중앙에 떨어져 박힌 제라툴은 가슴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고 그리드는 고고히 하늘 위에 떠올라있었으니까.
예상과 다른 결과였다.
“무덤이 잘 어울린다.”
<목단룡 크란벨의 머리>가 보이도록 진즉에 설정을 바꾼 그리드가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억누르고 말했다.
투구 밖으로 뚝뚝 떨어지는 핏물은 다행히 신성에 가려졌다.
제라툴의 무색 신성은 갖지 못하는 이점이다.
“...우와아아아아아!!”
여덟 신의 비명이 사람들의 함성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