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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24화 (80권 끝) (1,622/1,794)

템빨 80권 - 22화

검성의 성장 비결.

이건 귀했다.

“이보게 크라우젤. 이 전답의 주인장이 누구인 줄 아나?”

농업에 커다란 흥미를 느낀 양반들이 나름 정중히 물었다.

한 마디 뱉을 때마다 선민의식이 표출됐던 고유의 말투를 돌이켜 보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양반들이 템빨계의 백성이 될 가능성이 생겼다고 했지...’

그리드가 새로이 쓴 황룡 신화.

그 세부적인 내용은 크라우젤 또한 전달 받았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 이곳까지 도착한 양반들을 굳이 경계하지 않고 중립적으로 대했다.

“주인이야 당연히 그리드다.”

“헉... 아, 음... 그렇군... 우리가 어리석은 질문을...”

“책임자를 만나고 싶은 거면 무지개색 감자를 먹고 있는 사내를 찾아가라.”

“...?”

...무지개색 감자라니?

과거의 은원을 잊지 못하고 우리를 촌놈 취급하는 건가?

안 그래도 라인하르트의 높은 성벽에 감탄했던 몇몇 양반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가운데 그들의 대표로 보이는 여성이 목례했다.

“고마워. 오늘부터 우리가 이곳에서 좋은 경험들을 쌓게 된다면 네게 도움을 받은 덕분일 거야.”

“너희를 받아주기로 결정한 그리드 덕분이겠지.”

크라우젤은 멀쩡한 양반들이 농부가 되게 생기자 짐짓 당황스러웠다.

물론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라우엘이 어련히 잘 해결할 거라고 믿는 것이다.

애초에 농부 경험이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건 과학적으로 입증 된 사실이기도 했고.

크라우젤, 데미안, 휴렌트 등의 걸출한 인물들이 증거다.

“하하... 출발할까요?”

끝으로 카벨론과 묘한 신경전을 벌인 양반들이 자리를 떠난 후.

비현실적인 광경을 넋 놓고 지켜보던 스컹크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모험가답게 온 대륙을 누벼온 그는 양반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신이 되길 꿈꿨던 반신들.

그들이 템빨국의 농부가 되려는 모습에 큰 감회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무후총으로 떠난 크리스 일행은 어느새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워낙 뛰어난 에이스들만 모인 탓에 적응이 빨랐다. 반신 사냥을 위해 출진한 무후총의 병력을 몇 차례나 손쉽게 궤멸시켰다.

이 정도 전력이면 무후총 내부로 진입해도 되는 거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을 정도다.

크리스의 의견이었다.

붉은 현자 하스터가 기대 이상의 버퍼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일행의 전투 능력이 예상보다 증폭 된 상태였다.

무후총 내부로 진입해도 충분한 지속력을 갖고 학살과 정찰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휴렌트가 너무 신중했다.

“카벨론이라는 자가 말했다고 하지 않았나? ‘큰’이나 ‘긴’이라는 수식언을 지닌 검과 지팡이들은 최소 자신과 동격의 실력을 지녔다고. 카벨론이 크라우젤과 잠시나마 호각을 이뤘다는 소문을 고려하면 우리가 감당 못할 듯한데...”

“확실히. 한둘이면 몰라도 여럿을 감당하긴 힘들 거다.”

“내 생각은 달라. 우리 넷이 힘을 합치면 크라우젤을 웃도는 전력인데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러운 것 같군. 애초에 뮐러의 제자만큼이나 강력한 초네임드 NPC가 흔할까? 그것도 언데드 중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몇 마리 안 될 거라고 보는데.”

“크리스 네가 실력에 대단한 자부심을 지녔다는 건 안다. 충분히 납득해. 하지만 그 ‘영혼’이 세상은 몹시 넓다는 사실까진 알려주지 않았나 보지? 불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활동했다간 일을 그르치는 수가 있어. 우리의 본래 임무는 어디까지나 무후총의 동향을 파악하는 한편 성장에 박차를 가하는 것인데 괜한 위험을 자처할 필요는 없다고.”

“지발의 말이 옳다. 무후총에 진입했다가 자칫 죽어서 손실을 입거나 무후총의 경계심만 높여버리면 본래의 임무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거야..”

“아니 무슨... 너희들 왜 그렇게 조심스러운 거냐...?”

크리스는 지발과 휴렌트의 신중한 태도를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납득이 안 될 뿐이다.

최고의 플레이어들.

심지어 예전부터 콧대 높기로 소문났던 두 사람의 소극적인 모습이 낯설었다.

그중 휴렌트야 한동안 힘든 시기를 보냈다는 사실을 안다.

어째선지 자존감이 바닥을 기었던 시절이 있다.

하지만 지발은 달랐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인물이다.

통합랭킹 2위 출신으로, 7대 길드의 수장이었고, 히든 클래스를 얻었으며, 사하란 제국의 황자를 바로 곁에서 섬겼고, 지크를 지켜낸 끝에 칠악의 힘까지 얻었다.

무지막지한 활약을 해온 덕분에 미국의 영웅이라는 별명까지 있을 정도였다.

늘 건강한 치아를 반짝이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짓던 그의 이런 소극적인 태도는 쉽사리 납득하기 힘든 것이다.

“그야...”

말끝을 흐린 지발과 휴렌트가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이내 한숨을 푹 쉬더니 고백하듯 말했다.

“그리드한테 몇 번을 당하다 보니 신중해질 수밖에 없더군.”

“지금의 내가 강하다고 해서 기고만장하게 구는 건 하수다. 활동은 즉흥적이어선 안 되고 무조건 계획적인 게 옳아.”

“...”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하스터의 모습까지 보면서, 크리스는 그들의 마음에 십분 공감했다.

자신 역시 그리드에게 당한 과거가 있으니까.

하지만 이건 무슨 피해자 모임도 아니고 너무 우중충하다...

-...라우엘, 지슈카 퀘스트 끝나면 이쪽으로 보내줘.

***

“과연.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는군요.”

뮐러의 무덤.

당연하다는 듯이 텅 빈 능을 둘러싼 낮은 석벽에 태양과 구름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정중앙에 선 석벽만 태양이다.

그것을 중심으로 원형을 그리는 석벽은 죄다 구름이었다.

“구름은 뮐러가 봉인한 대악마들, 혹은 난세를 뜻하고 태양은 난세를 종결시킨 빛 즉, 뮐러라고 해석했었는데...”

이 무덤에는 대놓고 커다란 묘비가 세워져 있다.

검성 뮐러의 묘.

믿지 않을 이유가 적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뮐러의 사망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고 수준 높은 검기가 무덤을 지키는 결계를 이뤘던 까닭이다.

당연히 뮐러의 묘가 맞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보니 태양은 뮐러이되 구름은 뮐러를 가리는 의미에 더 가깝군요. 석벽의 문양과 석벽을 바라보는 석상들의 방향, 그리고 석상이 형상화한 동물들의 종류와 발톱의 숫자가 갖는 의미까지 고려하면 이곳은 뮐러를 죽은 자로 ‘취급’하기 위한 의식의 공간일 확률이 높습니다.”

과거의 스컹크는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다.

스컹크도 성장했단 뜻이다. 이미 최고의 모험자이면서도 쉬지 않고 노력한 보람을 느꼈다.

“죽은 자로 취급한다...”

크라우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라우엘의 가설에 힘이 실리고 말았으니까.

이곳은 정녕 파그마가 뮐러를 언데드로 만들어 부리기 위해 만든 시설이란 말인가.

‘얼마나 더 후회할 셈이었습니까.’

파그마의 최후는 고독하고 비참했다. 후회로 점철 된 삶이었다.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너무 많은 걸 희생시킨 그에게 정녕 행복한 순간이 있었을까.

뮐러 관련 퀘스트를 수행하던 도중 간접적으로 엿봤던 파그마의 삶을 떠올린 크라우젤이 커다란 안타까움을 느꼈다.

검성.

대대로 세상을 구원해왔던 영웅의 직업.

크라우젤은, 파그마의 후예로 시작한 그리드만큼이나 세계에 대해서 깊이 고찰할 의무가 있는 인물이다.

비록 그리드보단 많이 늦었지만 착실하게 평화를 위해 힘써왔고 앞으로도 그럴 셈이었다.

뮐러와도, 파그마와도 다르게.

크라우젤이 생각하는 이상은 당연히 그리드의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늘 은연중에 그리드에게 동조하며 따라온 것이다.

“...”

잠시 생각에 잠겼던 크라우젤이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하늘이 당신을 인도합니다.]

템빨신교, 혹은 템빨제국에 피해를 입히라는 신탁.

벌써 몇 주 째 반복해서 발생 중인 퀘스트였다.

사람들이 워낙 템빨단을 좋아하거나 두려워하는 까닭에 호응하는 사람이 적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거절해도 다시 뜨는 퀘스트는 끝내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말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며, 궁금해서라도 퀘스트에 참여하는 사람이 차츰 늘어나는 추세다.

물론 그들이 템빨제국이나 템빨신교에 입히는 피해는 미미했고 대부분 장난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처음만 어려운 법이다.

퀘스트에 한 번 참가한 사람이 두 번, 세 번씩 참가하게 되는 사태를 경계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장난이었던 일이 장난이 아니게 되는 것도 흔한 일이고.

“...?”

스컹크와 카벨론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카벨론이 석벽을 바라보는 석상들 중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있다는 사실을 듣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때.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크라우젤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라우엘에게서 날아온 귓속말 때문이다.

-무신의 추종자들이 난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무신의 추종자는 대륙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한동안 대부분의 추종자가 뮐러의 비급에 현혹되어 동대륙으로 넘어간 실정이었고, 아레스 군단에게 가로막혀 쉽사리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고 있었다.

한데 서대륙 내부에서 대량의 추종자가 난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새로이 생겨난 것처럼.

그리고 각지에서 거대한 행렬을 이룬 그들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한다.

곧 무신과 그를 따르는 신들께서 강림하실 거라는 구호를 외치며...

-무신을 따르는 신들?

무신이 강림할 거란 사실이야 그리드를 통해서 들었다.

한데 무신 혼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삼위일체를 노릴 겸 사도들을 경계할 의도로 보입니다. 천상에 복귀하고 나서야 그리드 님과 사도들의 활약상을 접한 게 아닐까 싶네요.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일방적인 해석이고, 실상은 모르죠. 이참에 템빨계를 진심으로 박살낼 생각일 수도.

제라툴이 템빨계를 멸망시킨다?

가능과 불가능을 논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곧 닥칠 현실이고 결과는 그때 가서 나온다.

어쨌든 크라우젤의 마음은 몹시 불편했다.

-또 커다란 전쟁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게 될까.

인마대전의 아픔을 떠올린 크라우젤이 탄식하는 반면 라우엘의 목소리는 비교적 밝았다.

-대규모 전쟁이 발발하진 않을 겁니다. 제라툴이 바라는 건 인간을 해치는 게 아니라 목격자를 만드는 거니까요. 추종자들이 ‘제전에서 성전을 목도하라’고 외치는 것만 봐도 한정 된 구역에서의 대결을 계획하는 듯합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여기서 폐하의 전언입니다. 만약 제라툴이 대동하는 신의 숫자가 여덟을 초과할 경우 크라우젤 님께서도 대결에 참전해 달라는.

-제가...?

-공교롭게도 네펠리나 님은 아직 전투능력이 약하니까요. 폐하께선 크라우젤 님께서 그녀의 자리를 채워주길 바라고 계십니다. 오늘 오전에 따로 연락을 드렸는데 받지 않으셨다고....

-아, 어머니께서 친히 식사를 준비하시기에 말리느라... 근데 저보단 결사들께 부탁드리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저보다야 그분들이 전력에 보탬이 될 텐데요.

-신이 대규모로 강림하는 사태가 자칫 드래곤을 자극할 수도 있는지라 탑의 손을 빌리기 난처합니다. 제라툴이 졌을 때 어떤 핑계로 써먹을 수도 있는 법이고... 무엇보다도.

잠시 말을 멈춘 라우엘이 그리드의 뜻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폐하께서 크라우젤 님을 원하십니다. 설마 현재에 만족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늘 염두에 둬야하는 사실이 있다.

결사들의 역할은 평범한 사람들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

그들에게 의존하는 습관은 버려야 한다.

애초에 ‘죽어도 괜찮은’ 플레이어들의 성장이 더 중요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가장 강력한 플레이어 중 하나가 크라우젤이다.

신과 싸워서 이기긴 힘들겠지만 잠시나마 호각을 이루고 숭배의 원천을 쌓을 만한 자격을 지녔다.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신을 베어주십시오.

그리드와 같은 황혼을 다루는 자.

자격을 증명해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이번 기회에 유페미나 역시 자신의 무위를 선보일 터였다.

강림하는 신의 숫자가 만약 여덟 이상일 경우, 그건 최소 아홉이라는 사실을 의미했으니까. 삼위일체를 고려한 숫자다.

(80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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