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0권 - 21화
무신 제라툴.
그는 치우를 모티브로 삼아 만든 신이다. 엄밀히 말해서 기생충에 가까웠다. 무를 숭상하고 염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치우뿐만 아니라 자연히 그에게도 향하게 됐으니까.
치우가 누려온 권리를 언젠가부터 양분하게 됐단 말이다.
실제로 제라툴은 무지막지한 위압감을 발산했다.
단전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과 벼락을 맞은 것처럼 어지럽게 솟구친 백발이 거대한 풍채와 맞물려 생김새부터가 괴력난신이다.
신화에 등장하는 절대자, 혹은 역사가 묘사하는 여느 무신들이 당연하게 연상됐다.
“못 본 새 많이 달라졌구나.”
제라툴이 입을 열 때마다 대기가 진동했다. 보이지 않는 무색의 신성이 그의 의지에 일일이 호응하는 느낌. 작은 손짓 한 번으로 태산을 부수는 건 그에게 몹시 쉬운 일이리라.
“전혀 위축되지 않고 있어.”
제라툴은 그리드의 눈빛이 무척 거슬렸다. 자신을 대면하고도 흔들림 없이 차분한 눈빛. 일말의 두려움과 공경을 느낄 수가 없다. 무지와 오만의 증거였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또 많은 일을 겪고 성장한 모양이지.”
시간을 압축시켜 성장해버리는 놈.
그리드의 발전 속도가 기형적인 수준이라는 건 제라툴도 이제 인정하고 있었다.
폐관 수련에 임했던 이유다.
무신인 자신에게 있어서 ‘수련’이란 그 자체로 각별한 의미를 갖는 바.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성장을 이뤘다.
저 기고만장하고 하찮은 인간 출신의 신은 상상도 못할 수준으로.
“후우...”
제라툴이 심호흡했다.
그리드를 찢어 죽이고 싶다는 심상을 간신히 억눌렀다. 어렵지 않았다. 한도를 모르고 치솟았던 살의와 투기는 베니스를 해침으로써 어느 정도 해소 됐으니까.
“네 자신감의 원천이 무엇인지 대충 알겠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한편 황룡의 형상을 이루는 그리드의 신성이 모든 풍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땅이 그리드라는 존재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단 의미다.
그리드의 신화가 동대륙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쫓겨난 신들의 기척이 희미한 것을 보아 그리드에게 양분이라도 되어준 듯싶었다.
“하찮은 인신 출신으로 급기야 신계까지 세우게 됐으니 기고만장 하겠지. 하지만 아직은 그 수준이 몹시 미약하다는 사실을 모르는군. 심지어 나는 무신이다.”
무신은 싸우기 위해 존재한다. 천상의 첨병이었다.
아스가르드를 벗어날 때 발생하는 페널티는 아스가르드라는 ‘출신’을 지닌 탓에 극복하지 못하는 반면 특정 구역을 진입할 때 추가로 발생하는 페널티는 면역했다.
그 어떤 경계선도 감히 무신의 전진을 봉쇄할 자격을 지니진 못했으니까.
그리드가 막 만들기 시작한 템빨계도, 쫓겨난 신들이 세운 환국도, 악마들이 지배하는 지옥도.
제라툴에겐 아무런 지장을 주지 못한단 말이다.
무신이 고작 차원의 억압에 짓눌린다면 나아가고, 싸운다는 무신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기에.
물론 차원의 주인이 얻는 이점을 무력화시킬 수 있단 뜻은 아니었다.
“신전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혀를 연마했나?”
제라툴의 동태를 잠자코 살피던 그리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는 제라툴에게 명확한 적의를 지녔다.
다른 신들은 역사와 정황을 근거로, 다소 추상적인 이유로 적대하는 반면 제라툴, 도미니언, 쥬다르 세 신에게 품은 감정은 구체적이었다.
그들은 직간접적으로 당대의 인류에게 피해를 입혔으니까.
특히 제라툴과 도미니언은 라인하르트를 침공했었다.
그중에서도 제라툴은 동료들과 로드를 위협했다...
그때 만약 하야테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아이린과 백성들마저 위험에 빠지고 말았을 거다.
“큭큭...! 크하하하핫!!”
태연히 지껄이는 그리드를 다소 커진 눈으로 바라보던 제라툴이 급기야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도무지 견디기 힘들다는 듯, 정말로 한참을 턱을 치켜세운 채 웃었다.
이내 다시 정색했을 때.
그는 어떤 결단을 내린 상태였다.
“여기서 널 해치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정도론 내 분이 풀리질 않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어차피 저놈은 신이다.
조금 전 목을 찢어놨던 베니스처럼 죽여도 죽질 않는다.
패배라는 결과 자체가 손해를 발생시키도록 유도해야한다는 거다.
이곳에서 놈을 해친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별 의미가 없다.
나는 무신이며 나의 승리는 당연하다.
내가 저놈과 단 둘이 있는 이곳에서 저놈을 해쳐봤자 세계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단 말이다.
그러므로 목격자를 만들어야 했다.
저놈을 숭배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잔뜩 모아놓고, 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놈을 철저하게 유린하고 농락한 끝에 해쳐야 비로소 놈의 격을 크게 훼손시킬 수 있다.
“시기상으로 보면... 한울이 주기에 임한지 채 1년이 안 됐겠군. 아직은 무의식으로나마 사람들을 인도할 테니 무대는 자연히 마련 될 거다.”
촤르르륵...
수백수천 만 가닥으로 풀린 무색의 신성이 근육처럼 조여졌다가 풀리길 반복한다. 조여지는 순간 응축되는 기운이 당장에라도 그리드의 머리를 박살낼 것처럼 위협하다가 풀리길 반복하는 식이다.
풀릴 때의 위협이 더 컸다.
비단처럼 펄럭이는 호신강기로 작동했으니까.
도검의 침범을 유유히 흘려버릴 듯한 형태였다.
“기대해라, 그리드. 제법 고절한 검술로 내게 굴욕을 안겼던 네게 조만간 똑같은 검술로 망신을 주마. 누구의 기술이 진정으로 뛰어난지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겨루는 거다.”
검의 신이라도 될 기세로 네 검술이 뛰어났다만, 나는 모든 종류의 무술에 통달했다.
세상에 둘도 없을 상승의 기술을 구사하는 건 바로 나, 무신 제라툴의 특권이다...
그렇게 중얼거린 제라툴이 결계를 풀고 자리를 떠났다.
머잖아 재회하게 될 거라는 호언장담을 남기고서다.
짐짓 당황한 그리드는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저놈을 순순히 놔줘도 되는 건지.
물론 짧은 고민이었다.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겨루자고?’
제라툴의 제안은 그리드에게 엄청난 이득이었으니까.
물론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있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그리드는 자신의 승산을 높이 점쳤다.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싸우자는 말인 즉, 제라툴이 다시 지상에 내려오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지상에선 당연히 그리드가 유리했다.
실시간으로 템빨계의 규모가 커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라우엘 너는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본 거냐.’
상황이 좋게 풀리자 희미한 미소를 짓던 그리드가 문득 전율했다.
제라툴은 가짜 무신에 불과하며 진정한 무신은 머나먼 동쪽에 따로 있다...
제라툴에게 악의를 품은 그리드가 이와 같은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고 했을 때 라우엘이 만류했던 일이 떠오른 까닭이다.
“자꾸 못 참고 지상에 강림하는 제라툴의 성미를 보면 조만간 크게 미끄러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폐하께서 제라툴을 잡아먹고 온전한 영양분을 섭취하려면 제라툴의 가치를 미리 훼손시킬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대충 이런 식의 조언이었다.
그래서 치우에 대해서 공표하진 않았다.
어차피 수천 명의 템빨단원들을 비롯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때의 인내가 천금의 가치를 품고 되돌아올 줄이야.’
이래서 사람은 똑똑한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도 참 잘 만났지.’
하나 같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여성들이었으니.
새삼 큰 감사를 느낀 그리드가 슬그머니 턱짓했다.
그러자 제라툴이 돌아간 즉시 다시 아이템을 제작하기 시작하던 갓 핸드 공장이 가동을 멈췄다.
거짓말처럼 찾아온 적막.
시간이 멈춘 듯한 세계에서 그리드는 제라툴의 신성을 떠올렸다.
‘그건 보통의 방법으로 못 뚫어.’
호신강기로 작동하는 순간의 인상이 너무 강하다. 갑주보다 단단한 동시에 비단처럼 펄럭이는 신성. 어지간한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권능으로 작동하리라.
‘자칫 스킬 면역 기능이라도 있다간 낭패다.’
신이 신계에서 얻는 이점은 스킬을 무한에 가깝게 남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드가 아스가르드 침공을 계획할 때마다 ‘스킬 면역’ 아이템을 창조하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게 되는 이유였다.
그건 제라툴도 같았을 것이다.
무신의 권능으로 체현해냈을 가능성이 몹시 높았다.
‘스킬 없이 싸우는 상황을 상정해야 돼.’
마냥 낙월검에 의존할 수도 없다.
낙월검으로 입히는 피해량엔 제한이 있으니까.
그리드는 평타의 위력을 극대화하는 신검의 설계를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종류의 무기는 여러 개 보유하고 있었지만 제라툴에게 통용되는 수준의 신검이 필요했다.
황혼을 만들 때 크라우젤과 나눴던 대화들을 참조했다.
‘검뿐만 아니라 보조 도구를 활용하는 방안도 계획하자...’
아이템은 많으면 많을수록 이롭다. 결국 언젠간 쓰게 돼 있다.
그리드는 제라툴 전을 대비해서 되도록 다양한 종류의 아이템을 생산할 계획이다.
***
“이 논밭... 어제부터 느낌이 싸하긴 했었다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전날 밤.
무후총의 작은 지팡이와 협력해서 라인하르트를 습격했을 당시.
카벨론은 초장부터 일이 꼬이는 걸 느꼈다.
불쑥 날아온 깃털들이 졸졸 따라붙어서?
아니다.
작은 지팡이 로페로는 깃털에 깃든 신성을 꽤 거슬려하는 눈치였지만 카벨론에겐 전혀 해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를 난감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농부들의 땀과 흙이 묻은 바리케이드였다.
흙이 잔뜩 실린 수레와 바위 위로 덮어놓은 밀짚 따위들.
구조와 위치가 아주 절묘해서 쾌속한 데스나이트들의 발걸음을 몇 번이나 멈칫하게 만들었다.
하물며 특정 어떤 흙벽들은 카벨론의 검에도 잘 베이질 않았다. 성수로 뭉쳐놓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질적인 기운이 깃든 흙더미들이었다.
“이제 보니 농부들의 수준 자체가 차원이 달랐던 거야... 논밭을 이루는 흙과 물, 그 위를 스치는 바람과 햇살 따위에 의지를 부여할 수 있는 강력한 심상을 지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템빨신의 권능과 관련 된 건가?”
카벨론이 양반들을 농부로 오해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성문을 빠져나오자마자 마주친 농부들의 면면이 하나 같이 예사롭지 않았으니까.
대부분 피아로에게 교육 받고 그리드로 인해 네임드화 된 농부들이었다.
게다가 농부들의 대장이 무려 블란드다.
이들이 정녕 농부가 맞나 싶을 정도로 훌륭해서 감탄하던 도중에 주변을 서성이던 양반들까지 농부로 오해한 건 당연한 수순과도 같았다.
“저도 한때는 농부였습니다.”
크라우젤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문득 떠오른 추억을 되새기는 행위에 가까웠다.
“뭣이...!”
한데 카벨론의 반응이 예상보다 훨씬 더 격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선 머리털을 쭈뼛 곤두세우는 게 아닌가?
머릿속에 천재지변이라도 맞은 듯한 반응이었다.
‘말을 좀 조심해야겠다.’
가끔 농담을 하면 안 되는 상대들이 있다.
카벨론의 경우가 그랬다.
생각 없이 던진 말에 자칫 상식이 개변되는 유형의 인물일 듯했다.
물론 카벨론은 바보가 아니다.
단지 크라우젤은 검성이 아닌가.
검성이 괜한 헛소리를 지껄일 리 없다는 믿음이 그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까닭에 크라우젤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양반들도 마찬가지라는 점이었다.
“저 지긋지긋한 놈도 농부 출신이었다고?”
“농업이 일종의 비결로 작용하는 듯하군. 피아로라는 자의 풍문을 떠올려 보면 말이지.”
“확실히...”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양반들.
그들에게 크라우젤은 그리드 다음으로 충격적인 인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자신들의 상대도 안 됐던 놈이 급기야 미르와 겨룰 정도로 성장해나갔으니까.
그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던 양반들에게 있어서 크라우젤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고 내심 본받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
크라우젤의 성장 비결을 알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