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621화 (1,619/1,794)

템빨 80권 - 19화

맹인 검객 카벨론.

그는 때때로 시야의 부재를 망각한다.

무지막지하게 뛰어난 감각이 시야를 대체하는 까닭이다.

실제로 높은 초월의 격을 쌓은 그는 뮐러의 제자를 자처하기에 손색이 없는 실력자였다.

‘제대로 망신을 당했군.’

크라우젤과 검을 부딪친 순간 칼날이 손상 됐다. 끝날에서 5센티미터 아래로 6밀리미터의 흠집이 생겼다. 미세하게 무너진 균형이 카벨론의 감각에는 잡혔다. 불편할 정도로.

꾸욱.

혀를 찬 카벨론이 파지법을 바꿨다. 검지를 위로 살짝 끌어올려 훼손 된 검의 균형을 되찾았다. 동시에 검기의 순환을 가속시켜 칼날을 가일층 강화시켰다.

“추태를 보였구나. 상시 검기를 두르는 탓에 도리어 허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검이 손상되는 사태를 상정하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다.

먼 옛날의 장인이 백일 동안 두드린 흑철로 만든 보검에 검기까지 둘렀다. 트라우카의 둥지에서 끓어오르는 용암에 담금질을 해도 훼손될 일이 없을 거라고 믿어왔다.

“세상은 넓으니 늘 우물 안에 있는 감각으로 지내야 한다던 스승님의 말씀을 귀가 아닌 심상에 새겼어야 하는데.”

“...진실로 뮐러 님의 제자십니까?”

일전에 만났을 때.

크라우젤은 카벨론과 제대로 대화하지 못했다.

시간이 촉박한 타임어택 퀘스트를 진행 중이었던 데다가 다짜고짜 기습부터 날린 상대와 말이 제대로 통할 리 만무했다.

하물며 실력은 또 어찌나 고강하던지.

당시 크라우젤은 더러운 똥을 피하는 느낌으로 카벨론을 따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크라우젤 본인이 성장했을 뿐더러 주변에 아군이 몹시 많다.

대지의 여신 가리온과 전 적기사단원들, 그리고 제국의 젊은 기사들과 병사들...

종전과 달리 혼자가 아닌 것이다.

이젠 크라우젤에게도 낯설지 않은 환경이었다. 결손이 자연히 메워지는 감각. 마음이 든든했다.

카벨론 또한 이전과 달리 대화에 적극적이었다. 문답무용의 태도를 고수하기엔 적들의 수준이 너무 높아 위험하다고 판단한 눈치다.

“어리석은 질문이군. 스승님의 비급을 손에 넣은 너라면 나의 검술이 스승님과 몹시 닮았음을 간파했을 텐데.”

크라우젤도 알고 있다.

카벨론은 필시 무쌍검법을 익혔다.

하지만 뮐러의 제자라고 확신하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카벨론이 구사하는 무쌍검법은 대부분 변형이 가미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한 게 아니라 역으로 퇴보한 형태.

엄청난 천재가 무쌍검법을 어깨 너머로 배웠으면 저렇지 않았을까 싶었다.

“정녕 뮐러 님의 제자라면 왜 그분의 비급에 집착하는 겁니까? 당신이 이미 직접 배웠던 검술들이 기록 된 서적에 지나지 않을 텐데요.”

“재차 우문이다. 스승님의 유품을 챙기는 건 제자의 당연한 도리이건만.”

“비급의 소유권은 제게 있습니다만.”

“뭐라...? 그게 무슨 궤변이지?”

“수백 년 동안 묻혀있던 물건을 제가 찾아냈으니 당연히 제 것이지요.”

“저잣거리에서 주운 돈주머니를 주인에게 돌려줄 생각은 않고 주섬주섬 챙길 듯한 위인이군. 당대의 검성이 걸인이나 진배없다니 통탄할 노릇이다. 스승님과 나를 포함한 모든 검객을 망신시킬 만한 허물이야.”

“도적놈의 혀가 너무 긴 거 아니오?”

대지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싶더니 거센 바람이 불어 닥쳤다.

십공신의 일각이자 선전관인 후로이의 등장이었다.

감찰관 나이트에게 처형당한 지방 호족들의 영지를 돌며 그들의 죄를 알리고 비난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차였다.

비룡의 고삐를 당겨 하강하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카벨론을 위아래로 훑어댔다.

“타인의 물건을 빼앗고자 다짜고짜 칼춤을 추는 그대의 꼬락서니를 보면 지옥에 계신 스승께서 어지간히 통탄하겠소. 내가 검사가 아니라 염치없는 강도새끼를 키웠구나 하고.”

“내 스승께서 지옥에 계신다고?”

“그럼 천국에 계시나? 지옥이나 천국이나 거기서 거기 같긴 한데.”

“연속해서 망언을...”

“어디가 망언이오? 어차피 망자가 갈 곳은 지옥이나 천국 둘 중 하나 아니오?”

“왜 멀쩡히 살아계신 분을 죽은 사람 취급 하느냔 말이다. 네놈이 선을 넘어도 단단히 넘는구나!”

카벨론의 얼굴은 진즉부터 대춧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육두문자를 날리는 수준에 가까운 후로이의 도발 앞에서 멀쩡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별로 없다.

초월적인 존재일수록 원색적인 욕설엔 내성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의 정신계 공격과는 다른 차원의 공격이라고 봐야 옳았다.

“그야 당신이 미치광이처럼 구니까 자연히 죽은 스승을 망신시키... 응?”

연신 떠들던 후로이가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눈을 끔벅이는 꼴이 방금 들은 말을 되짚어 보는 듯했다.

이내 큰 충격을 받고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서 크라우젤이 나섰다.

“뮐러 님께서 살아계시는 겁니까?”

의심할 정황이야 많았다.

검성의 길을 걸어오며 뮐러의 죽음을 의심했던 적이 많다.

조금 전 로페로라는 리치도 뮐러가 살아있다는 듯이 지껄이지 않았는가. ‘뮐러 그 지긋지긋한 놈이 설마 아직도’라며.

하지만 섣불리 뮐러가 살아있다고 추측하기엔 생존 근거를 찾지 못했다.

죽은 정황이 없는 한편 살아있다는 증거도 없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무후총도 혼란을 느끼는 눈치였다.

로페로는 뮐러가 살아있다고 믿는 반면 무후총이라는 집단 자체는 뮐러의 시신을 찾듯이 뮐러의 무덤을 수색했었으니.

“당연히 살아계신다.”

카벨론의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괜한 혼란을 유발하기 위해 뮐러의 생존설을 꺼낸 게 아니라 진짜로 뮐러가 살아있다고 외쳤다.

“그분께서 죽었을 리 없어.”

“...”

갑자기 왜 애매해지냐.

‘살아있다고 믿고 싶을 뿐인가?’

크라우젤과 후로이가 생각할 때였다.

“너희들에겐 너무 충격적인 진실이라 섣불리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 천상의 무신은 가짜다. 진짜 무신은 ‘치우’라고 하는데... 그자가 스승님을 뵙기 위해 지상에 기척을 드리웠던 순간을 나는 똑똑히 목격했다. 진짜 무신의 편린을 강림시킬 정도로 대단하셨던 스승님께서 죽었을 리가 없지... 그분과 비교하면 버러지에 불과한 나조차도 수백 년을 멀쩡히 살아왔는데...”

“...”

그리드도 말했었다.

뮐러는 스스로 죽기를 원했지만 끝내 죽지 못했을 거라고.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진실을 도중에 알게 됐을 테니까.

죽어봤자 바알의 장난감으로 전락하거나 신들의 병정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순순히 죽었을까?

그럴 리 없다. 분명 어딘가에 살아있을 거라는 게 그리드가 근래에 내놓은 해석이었다.

“굳은 표정을 보아 내 최고급 정보에 어지간히 놀란 눈치군. 하긴 치우의 이름을 아는 인간은 세상을 통틀어도 채 10명도 안 될 테니 놀랄 만하다. 나 외에 또 누가 치우의 이름을 알까... 나로서는 만년설을 의복처럼 두르고 지내는 북해의 괴물 정도밖에 안 떠오르는군.”

“치우의 이름을 듣고 놀란 게 아니오. 요즘 세상에 누가 치우를 모른다고.”

“하하하! 치기어린 언행이구나. 뭐 됐다. 무후총의 해골들이 더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기 전에 어서 비급이나 빼앗고 떠나야겠다.”

“뮐러 님과 관련해서 이야기나 나누시죠.”

“딱히 나눌 대화가 없다만. 나 역시 그분을 찾아 헤매는 입장에 불과하니 네게 도움이 될 만한 단서를 제공하지 못한다. 설령 단서가 있었어도 제공하지 않았겠지만.”

“미묘하게 정직하지 않나요?”

후로이가 크라우젤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카벨론이 성격을 당최 종잡기 힘들다는 반응이었다.

머리끈을 꺼낸 크라우젤은 장발을 위로 올려 묶고 있었다.

“선인은 아닙니다.”

사늘한 눈빛과 말투.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대화를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하하 웃은 후로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보조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애송이가 하나에서 둘로 늘어봤자...?”

어깨를 으쓱이며 검을 고쳐 쥐던 카벨론의 표정이 굳었다.

주변에 가득했던 망자의 기운이 불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까닭이다. 로페로가 퇴각해버렸다.

“...스승님에 대해 할 이야기가 아주 많다.”

즉시 검을 내려놓은 카벨론이 양손을 들고 저항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과연 무지막지한 감각의 소유자답게 전황을 읽는 능력도 탁월했다.

***

-신격은 마력과 비슷하다. 술식을 토대로 마법이 되지 못한 마력은 별 효력 없는 기운에 불과하듯 신격 또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그 자체로는 특별할 게 없어. 고작해야 느낌이나 분위기를 살려주는 용도지. 신격을 신성으로 빚는 건 완전히 다른 영역인 셈이다.

시간을 조금 뒤로 돌려서.

크라우젤과 후로이가 카벨론을 상대하고 있을 때였다.

리치 로페로는 아스모펠을 상대로 기고만장하게 지껄이고 있었다.

여전히 아스모펠을 피아로라고 오해한 채다.

그는 안 그래도 희미한 피아로의 신격을 어설프게 재현하고 있는 아스모펠을 무척 하찮게 치부했다.

아스모펠과 함께 출동한 단테를 근거로 삼았다.

-당장 저놈을 봐라. 기껏 신격을 품어놓고도 볼품없는 인간에 불과하지 않느냐. 템빨신의 사도 피아로. 네놈이라고 해서 저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끌끌끌...

“...”

아스모펠 일행은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급기야 로페로를 무시하고 저들끼리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왜 아스모펠한테 피아로라고 하는 거야?”

“마법이 되지 못한 마력을 별것 아닌 기운이라고 치부하기엔... 브라함 공의 매직 미사일은 작은 산을 부숴 버리던데...”

“단테 공, 뭐라고 반박 좀 해봐요! 폐하께서 심어주신 신격이 공의 젊음을 되찾아 줬잖아요! 황후께서도 같은 신격을 지니셨다고요! 그런 귀중한 신격을 별거 아니라고 비하하는데 계속 잠자코 있을 거예요!?”

인피면구를 쓰고 활약했던 그리드 덕분에 젊음을 되찾은 아이린과 단테.

그들은 그 배경에 신격이라는 개념이 숨어있음을 이제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신격이란 그리드가 친히 선물해준 몹시 귀중하고 성스러운 축복인 셈이다.

“잠자코 있어선 안 되지... 아스모펠 공, 제가 나서도 되겠습니까?”

노년의 모습을 벗고 중년인이 된 단테지만 연륜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고즈넉한 말투와 차분한 몸가짐은 적기사들의 검술 교관이던 시절과 비교해도 묵직한 느낌이 있었다.

잠시 생각해본 아스모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수 배우겠습니다.”

“허허,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시는지.”

-설마 지금... 네놈 혼자서 나를 상대하겠다는 거냐?

로페로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은 인신을 추적하고 사냥해온 위계다.

한낱 인간 따위는 떼거리로 덤벼도 전혀 위협이 안 됐다.

한데 사도도 아니고 별 되도 않은 신격을 쌓은 인간 검사 한 놈이 자신을 상대하겠답시고 앞으로 나서는 것이다.

너무 하찮아서 콧방귀도 안 나왔다.

아스모펠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재상께서 말씀하시길 이 시점의 무후총 침략은 보너스 게임으로 취급하라고...”

몇 분 전.

오래간만에 발동한 ‘깃털의 인도’는 아스모펠을 크게 긴장시켰었다.

황제폐하와 사도들이 자리를 비운 상황에 발생한 적습.

철저한 노림수로 느껴졌다. 무시무시한 놈들이 확실한 준비를 갖추고 침략해온 거라고 판단했다.

그때 라우엘이 넌지시 말한 것이다.

긴장할 것 없이 놀다 오시라고.

당시에는 당최 무슨 이야긴가 싶었는데...

-크윽...! 네놈도 일곱 사도 중 하나였나...! 의외로 꽤 강하군!!

“...”

침략자들의 상태가 영 나빴다.

그들 스스로 주장한 것처럼 ‘나약한 인신’을 사냥해온 실력으로는 템빨국의 정예를 감당하는 게 불가능했다.

덕분에 라인하르트는 대량의 전리품을 확보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