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0권 - 18화
“설마 외부 세력을 끌어들일 줄은 몰랐는데.”
“이번엔 정말로 심상치가 않아. 수비 병력을 이끌던 캐서린 파티가 순식간에 로그아웃 당했다.”
“여기까지 금세 밀어닥치겠군...”
현재 야탄교를 이끄는 야탄의 종은 총 셋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들 전원 플레이어였다.
야탄교가 템빨단의 우방이 된 배경이다.
플레이어들은 야탄교인이라는 입장이 아닌 이성적인 판단으로 움직였다.
야탄의 대행자를 자처하는 아모락트에게 휘둘리지 않고 시류를 따랐다.
제멋대로 해석한 신앙을 앞세워 악마와 협력했던 기존의 종들을 쫓아내고 그리드에게 협력하는 식으로.
사실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야탄 신을 숭배하는 종교가 야탄과는 무관한 템빨신을 따르는 꼴이었으니.
오죽하면 지금의 야탄교는 야탄교가 아니라 템빨신교의 분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야탄교는 끝까지 그리드와 협력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반발을 수월하게 진압해왔다.
이미 대부분의 야탄교인들이 플레이어였으니까.
기존의 야탄교인들은 그들에게 도저히 대적하질 못했다.
템빨단의 몇 안 되는 대항마였던 야탄교를 키우기 위해 온갖 보상을 내걸고 사람들을 끌어들인 모르페우스의 전략이 도리어 야탄교를 몰락시킨 셈이다.
한데 이 순간 반전이 생겼다.
파벌 싸움에서 지고 쫓겨났던 교인들이 화려한 귀환에 성공했다.
정체불명의 언데드 대군이 그들을 도왔다.
리치와 데스나이트가 흔하게 보일 정도로 강력한 군단이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무후총’.
너무 거대해서 도리어 찾기 힘들다는 무덤이다.
규모가 산맥을 이루는 까닭에 무덤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다는 소문을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꽈아앙!!
석재를 깎아 만든 두터운 천장이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곧바로 몸을 일으킨 야탄의 종들이 마법을 캐스팅했다.
야탄의 종 출신 플레이어로는 유라와 로제가 있다.
야탄의 종이 된 플레이어는 하나 같이 걸출한 인물이었단 말이다.
당대 야탄의 종들도 마찬가지였다.
천장을 무너뜨리며 난입한 침입자들의 특징을 토대로 어떤 속성을 지녔는지, 어떤 형태의 스킬을 사용할지 순식간에 파악했다. 기습을 예측에 가까운 경지로 피해내고 치명적인 역공을 가했다.
-으그그극!
천장에서 떨어진 데스나이트들이 전류에 감전 된 것처럼 몸을 떨어댔다.
흑마법에 적중당하고 몸에서 영혼이 이격되자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건 처음 보는데...”
다섯 기의 데스나이트를 순식간에 제압하고도 야탄의 종들은 웃지 못했다.
무너진 천장에서 추가로 떨어지는 데스나이트의 숫자가 무려 일백에 달했으니까.
심지어 천장 위에는 기고만장하게 팔짱을 끼고 선 데스나이트도 보였다.
푸른 망토를 두른 놈의 이름은 네임드를 뜻하는 색채를 띠었다.
이름 앞에 붙은 ‘무후총의 검’이라는 수식언이 몹시 거슬렸다.
“무덤이나 지키고 있던 촌놈들이 갑자기 뭐냐? 단체로 우르르 몰려나오면 너희들 무덤은 누가 지켜?”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신화 찬탈자의 무서움을 아직 모른다.
무후총의 괴물들이 인신 사냥을 위해 자주 외출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하여 야탄의 종들은 이 상황이 더욱 당혹스럽고 억울했다.
무후총의 검이 그들의 외침을 무시하고 지껄였다.
-전부 죽여, 라. 이곳을 인신 사냥의 전초기지로, 삼는다.
풍년이다.
대륙 곳곳에서 희미한 신격이 싹트고 있다.
그리고 갓 태어난 인신은 대개 손쉬운 사냥감에 불과했다.
막 개화한 권능을 제대로 다루는 인신은 여태껏 없었으니까.
권능과 관계없이 고강한 인신?
그런 건 존재하기 힘들다.
보통 인신이란 무위가 강하다는 이유로 탄생하는 게 아니라 뛰어난 업적을 세우거나 사람들의 숭배를 받아 탄생하는 것이기에.
애송이들의 격을 모조리 회수하여 망령께 바치리라...
새파란 안광을 빛내는 망자들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
사리엘.
그녀, 혹은 그를 이루는 근간은 ‘정의’다.
신들의 원죄를 밝히고 책임을 추궁했을 정도로 그녀는 올곧은 존재였다.
그 탓에 천상에서 추방당하고 타천사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으며, 오랜 세월 동안 기억을 잃은 채 지옥과 무저갱을 방황하게 됐지만...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자신이 관철하는 정의가 일부 선량한 존재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에서였다.
여전히 확고한 믿음이었다.
사리엘이 템빨신상 앞에서 기도를 올릴 때면 그녀의 신성이 라인하르트 전역을 뒤덮었고 누군가의 악한 의도를 감지했다.
신들의 원죄조차 밝혔던 그녀의 기감을 평범한 인간이 속인다는 건 불가능한 것이다.
덕분에 라인하르트의 치안은 항시 최대치를 유지했다. 범죄율이 제로에 가깝다는 의미로 세상 그 어떤 도시에서도 볼 수 없을 진귀한 풍경이었다.
사악한 존재들이 그녀 몰래 라인하르트에 잠입한다?
단언컨대 불가능했다.
[사리엘의 깃털이 당신을 인도합니다.]
쥬드를 따르는 치안대 소속 플레이어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지난 몇 달 동안 보기 힘들었던 ‘깃털의 인도’를 쫓아서 특정 장소들을 수색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수상한 침입자들과 마주쳤다.
분명히 존재하고 움직이되 숨을 쉬지 않는 존재들.
언데드였다.
쩌어어엉!!
망자의 검기를 상징하는 보라색 오러를 쥬드의 대검이 쳐냈다.
덕분에 기습에 당하는 꼴불견을 면한 플레이어들이 엄지를 추켜세웠다.
“역시 대장이야!”
그리드의 첫 번째 기사.
일곱 사도나 십공신과 비교하면 명성이 많이 떨어졌지만 쥬드는 여전히 템빨국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어지간한 필드 보스 몬스터는 단독으로 박살내는 수준이었는데, 그가 휘두르는 상어 모양의 대검이 그리드가 직접 만들어준 작품으로 유명했다.
“쥬드. 몸이 가볍다.”
쥬드도 당연히 네임드화 됐다.
몇 번의 한계를 돌파하고도 끝내 유리 천장에 가로막혔던 일부 스탯이 끝을 모르고 치솟는 중이다.
지치지도 않고...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지친 것도 모르고 항상 단련에 임하는 쥬드의 성격이 네임드화와 제대로 맞물려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했다.
하지만 그의 성장은 이제 막 시작일 뿐이다.
아직 충분하지 않다.
하물며 침입자들은 세계의 이면에서 압도적인 활약을 펼쳐온 사냥꾼들이다. 무려 신들을 사냥해온.
꽈아아앙!!
“쥬, 쥬드!!”
쥬드가 다짜고짜 떨어진 날벼락에 강타 당하자 경악한 플레이어들이 목청껏 외쳤다.
새카맣게 타들어간 쥬드의 두터운 팔다리가 움찔움찔 떨린다.
지력이 워낙 낮은 까닭에 템빨로도 커버가 힘든 마법저항력.
정신 공격 마법엔 이상할 정도로 강력한 면모를 보였지만 일반적으로 마법사는 쥬드의 상극이었다.
심지어 그 마법사의 정체가 네임드급 리치라면 싸움 자체가 성립이 안 됐다.
-신이 세운 국가답게 군기가 훌륭하구나. 설마 대장군급 인사가 즉시 출동할 줄이야.
대마법에 적중당하고도 살아남은 쥬드의 모습을 목격한 리치가 다소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놈의 이름은 로페로.
‘무후총의 작은 지팡이’라는 수식언을 지녔다.
등장과 동시에 플레이어 전원을 공포, 허망, 마력 제어 불가에 빠뜨리는 광역 디버프를 발산했다.
“끄극...”
쥬드는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눈을 하얗게 까뒤집고 입에는 게거품을 문 채로도 버텼다.
-인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튼튼하군.
로페로의 붉은 안광이 날카롭게 변했다. 눈살을 찌푸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뭐 마침 잘 됐다. 그대쯤 되는 인사라면 곧바로 협상 테이블에 앉혀도 되겠지. 우리가 원하는 건 간단해. 이곳에 머물고 있는 인신들의 신변이다. 그들을 넘겨준다면 순순히 물러나마.
신화 찬탈자는 신격을 사냥하는 존재다.
대부분의 신성을 자연스럽게 부정한다.
무후총의 망령을 주인으로 섬기는 로페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템빨계의 신성 앞에서는 온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이곳 라인하르트를 중심으로 대륙 전체로 뻗어나가고 있는 신성이 그에겐 독극물처럼 더럽고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나마 최근 몇 개의 템빨신상을 ‘뒤집어 놓는 등’ 훼손시킴으로써 어느 정도 저항력을 갖추긴 했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어서 임무를 마치고 무후총으로 돌아가 편해지고 싶었다.
“쥬드... 모른다... 인신... 모른다...”
-뇌가 손상 됐나?
쥬드의 느릿느릿하고 어색한 말투에 거부감을 느낀 로페로가 주변으로 수십 개의 마법진을 그렸다.
그는 템빨신의 일곱 사도를 적으로 상정하고 파견 된 존재다.
일개 인간쯤이야 누구라도 가볍게 압도할 수준이었다.
그나마 귀찮을 수도 있는 템빨신교 교주는 다른 곳으로 유인한 상태였고.
-부득이 궁전까지 방문해야겠군. 너는 그만 꺼져라.
로페로의 마법이 발동하는 그때였다.
쏴아아.
따스한 바람이 불어온다 싶더니 대로에 깔린 타일들이 들썩였다.
급기야 균열을 일으키는 타일 사이사이로 대량의 황금색 밀이 자라났다.
아스모펠.
1인자가 강해질수록 자연히 강해지는 최강의 2인자가 현장에 도착한 것이다.
지금의 아스모펠은 피아로의 기술을 몹시 자연스럽게 구사했다. 피아로가 최근 쌓은 희미한 신격마저 일부 재현할 정도로.
로페로의 안광이 번뜩였다.
-템빨신의 사도. 그중에서도 피아로인가.
최근 인신으로 싹트기 시작한 존재 중 하나가 설마 저놈이었을 줄이야.
일이 너무 잘 풀리는군.
-네 신변부터 확보해야겠다.
히죽 웃은 로페로가 대군을 소환했다. 무려 수백 마리의 고위 언데드가 땅에서 솟아나 황금색 밀밭을 망가뜨렸다. 코끼리보다 커다란 짐승의 뼈에 올라탄 창기사들이 특히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무의미했다.
등장과 동시에 전멸했으니까.
“우주 검.”
-검성...!?
반으로 갈라진 대지의 중심에서, 기껏 소환한 병력이 모조리 베여 죽는 광경을 목격한 로페로가 거의 발작을 일으켰다.
-네가 왜 이곳에...! 뮐러 그 지긋지긋한 놈이 설마 아직도...!
“땅 좀 적당히 괴롭혀요!”
“미안합니다...”
로페로의 외침이 묻혔다.
당대의 검성은 그에게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 대지의 여신에게 사과하기 바빴다.
-가리온까지... 차라리 잘 됐...
덕분에 민망해진 로페로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듯 마법을 재차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저놈은 내꺼다.”
검객이 난입했다.
두 눈에 기다란 상처가 아로새겨진 장님 검객이었다.
뮐러의 제자를 자처하는 자.
정령계를 정화하고 돌아온 크라우젤을 집요하게 추적했던 초월자다.
철컥!
꽈르릉!!
발검 후 다소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번지는 벽력같은 굉음.
이미 주변은 초토화다.
크라우젤과 검을 맞댄 검객이 비릿하게 웃었다.
“다시 만나서 반갑군 그래. 이번에야말로 스승님의 비급을 넘겨받아야겠어.”
“당신께는 이 검이 안 보이겠군요.”
“...?”
맥락에 어긋나는 말.
대화가 미묘하게 어긋난다.
의아함을 느끼던 장님 검객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크라우젤의 <황혼>과 맞물렸던 검이 훼손 된 직후다.
“검에 맺힌 그 예기는 뭐냐? 무슨 검술을 쓴 거지?”
“...템빨입니다.”
역사상 최초였다.
검술이 아니라 템빨을 논하는 검성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