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618화 (1,616/1,794)

템빨 80권 - 16화

브라함의 분석이 옳았다.

소별왕의 권능은 개변이다.

심지어 어떤 ‘기운’의 성질을 바꾸는 수준에 그치는 게 아니라 세상 대부분의 개념에 개입하는 개변.

소별왕이 다른 신들의 눈을 피해 대별왕을 지옥에 떨어뜨린 사건의 전말에도, 미르의 기억 소거 책임을 순전히 삼사가 떠맡은 사건의 배경에도 개변의 권능이 있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쉽다.

소별왕은 태초신의 혈육이다.

도미니언과 쥬다르가 그렇듯 당연하게 절대적인 권능을 행사했다.

브라함의 평가 그대로 가히 무적의 존재인 것이다.

한데 이 순간 무적이 아니게 됐다.

소별왕은 저절로 옛 기억을 떠올렸다.

신들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아스가르드에서 쫓겨날 당시의 기억이다.

실패.

탄생 이후 최초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겪었던 당혹감과 똑같은 수준의 감정을 지금의 그는 느끼고 있었다.

쩌적! 쩌저저적!!

투명한 신성이 시시각각 다른 색을 띄며 점차 균열을 일으킨다.

소별왕의 감각에나 점차적으로 느껴졌지 실제론 찰나지간에 벌어진 일이다.

세상에 종말을 안긴 무량대수의 마법을 ‘유리한 성질’로 개변시키고 흡수하길 반복하는 과정에서 허용 용량을 초과한 여파였다.

그리고 신성이란 신의 근간이다.

편리하게 온오프 할 수 있는 기능이 아니란 말이다.

소별왕은 제멋대로 작동하며 제멋대로 소멸해가는 신성을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무식한 마법이 실존할 수 있다니.’

무식하다는 감상은 합당했다.

<라그나로크>의 원리는 ‘온갖 종류의 마법을 한꺼번에 쏟아 붓는 것’으로 단순했으니까.

단지 그 단순한 원리를 실제 구현 가능한 존재는 세상에서 브라함이 유일했다.

직계의 삶과 인간의 삶을 통틀어서 일생토록 마법을 공부해온 대마법사.

오직 그만이 라그나로크의 발동 조건을 충족하는 수백 종류의 마법을 습득했고 동시 전개가 가능했기에.

애초에 브라함의 마법이 모여야 라그나로크의 술식을 이룬다.

마법을 반사시켜 무량대수로 증식시키는 ‘거울’ 또한 브라함의 심상세계에서 꺼내온 개념이었다.

브라함 외의 마법사는 죽었다 깨어나도 라그나로크를 쓰지 못한다는 뜻이다.

설령 가능하더라도 의미 없다.

발동 직전 단계에서 절명할 테니까.

라그나로크 전개와 동시에 타들어가는 뇌와 심장을 실시간으로 수복하려면 무조건 직계의 체질이 필요했다.

‘으음.’

고요한 종말을 맞이한 세계.

무량대수의 마법이 난무하는 세계 속에 갇힌 소별왕은 당연히 절대자의 위용을 선보이고 있었다. 누구도 인지하지 못할 속도로 움직이며 종말의 영역을 연신 피해댔다.

묘기의 향연이다.

사소한 움직임마다 의도가 담겨 회피 기동의 발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만약 미르나 크라우젤이 지금의 소별왕을 봤다면 매 순간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움직임을 눈으로 쫓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이건... 위기군.’

찰나를 영겁으로 늘린 채 발악하던 소별왕이 급기야 현실을 받아들였다.

발광하는 신성에 커다란 균열이 몇 개나 발생한 직후였다.

라그나로크의 최초 발원지에서 여전히 돔을 이루고 있는 거울들.

그 안에 갇혔던 시점부터 운명은 정해지고 말았다...

종말은 표적이 소멸할 때까지 계속 되리라.

‘이렇게 된 이상 동귀어진을 노리는 수밖에.’

소별왕은 템빨신에게 전언을 남기고 싶었을 뿐이다.

한데 패퇴하게 생겼다.

예상치 못했던 격의 손실을 감수해야하는 것인데, 이대로 물러나기엔 손해가 너무 컸다.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선 브라함의 목숨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부활조차 못할 완전한 죽음을 선고해야 수지가 맞다.

브라함을 살려뒀다간 훗날 큰 위협이 될 거란 사실을 직감했기에, 소별왕은 저항을 멈추고 기감을 널리 펼쳤다.

순순히 제 목숨을 바치는 대가로 브라함의 위치를 찾아내고 즉시 죽여 없앨 의도였다.

바로 그때였다.

파작!

파차차차차차차차차창!!

굉음과 함께 무량대수의 마법을 비추는 거울들이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 된 게 틀림없었다.

저 거울들은 라그나로크의 매개다.

한데 정작 라그나로크의 마력 파장을 견디지 못하고 부수어진 것이다.

소멸해가는 세계의 일부와 함께.

소별왕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주는 광경이었다.

‘불완전한 마법이었나.’

상식적으로 당연하긴 했다.

진정한 신조차 위협하는 마법이라니.

그런 게 진짜로 존재한다면 섭리에 맞지 않다.

곧 마법의 연쇄가 멈출 거라고 판단한 소별왕이 재차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상의 일부에 종말을 선고한 마법들.

노도처럼 밀려드는 그것들의 아주 미세한 틈새를 찾아내고 회피하며 연명에 집중했다.

브라함을 없애는 건 라그나로크가 끝난 뒤에 해도 충분하다는 판단이었다.

오판이다.

깨진 거울은 아직 소멸하지 않았다.

수백수천 개로 나뉘어져 흩날리는 거울의 파편들은 도리어 더 많은 마법을, 한층 더 다양한 각도로 반사시켰다.

“...허.”

비로소 완성 된 것이었나.

퇴로를 잃고서야 깨달은 소별왕이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미련을 완전히 털어낸 모습.

상황이 이 지경까지 치닫자 패배를 깔끔하게 인정한 것이다.

[그대가 템빨신의 보배였고 사도 중 으뜸이었구나.]

의념이 마구잡이로 흘러나온다.

[정녕 템빨신이 부럽다.]

마법에 휩쓸려 소멸하기 시작한 소별왕의 심정이 라그나로크 내부에서 메아리쳤다.

“지랄하는군.”

브라함의 음성이 뒤따랐다.

라그나로크의 발동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브라함과 소별왕을 흔적조차 없이 집어삼켰던 대단위 마법이 차츰 흩어져갔다.

마법의 발동부터 종결까지.

말 그대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현장을 피하려고 고개를 비튼 갈매기들이 한 번의 날갯짓을 채 끝내기도 전에 소별왕은 환국으로 퇴각했다.

용살자 하야테가 무신 제라툴을 단 한 번 휘두른 검으로 격퇴시켰듯이, 브라함은 소별왕을 단 하나의 마법으로 격퇴시킨 셈이다.

템빨계가 세워지기 이전과 이후라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적어도 화력 면에선 브라함도 하야테 못지않았다.

물론 지크의 도움이 컸다.

“...고... 고ㅁ...”

마법을 발동하고 유지하는 매개가 마법의 파장을 견디지 못하고 깨진다?

그건 마법의 미완을 뜻했다.

그리고 브라함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다.

그는 절대로 미완성의 마법 따위에 의지하지 않는다.

본인이 예측 못하는 마법은 없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말인 즉, 라그나로크는 완성 된 마법이었다.

본래 거울은 깨지면 안 됐다.

한데 깨진 이유는 지크의 개입에 있었다.

라그나로크의 위력을 증폭시키는 방법을 순식간에 헤아린 그가 룬어를 써서 라그나로크의 술식에 개입했다.

브라함이 수락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브라함이 수락한 이유는 당연히 지크를 신뢰해서다.

지크라면 그 짧은 시간 내에 술식 일부를 간파할 만하다고 생각했고, 늘 그랬듯 지크의 룬어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결론적으로 지크는 믿음에 보답했다.

만약 그가 거울을 깨뜨리지 않았다면.

라그나로크가 소별왕을 패주시켰을 무렵 브라함의 목이 잘렸을 수도 있다.

‘죽어도 부활할 수 있다지만 당연히 안 죽는 게 낫다.’

소별왕에게 분쇄됐던 목덜미.

어느새 재생한 뒷목을 어루만지는 브라함의 표정이 새침했다.

지크에게 고맙기도 하고, 자신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협력을 맞추는 동료가 있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했지만, 내색하기엔 영 거북했다.

굳이 따지자면 지크에게 도움을 받기 전에 내가 먼저 도와주지 않았나?

그런 반발심이 드는 한편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게 민망하기도 했다.

여전히 브라함은 그리드가 아닌 상대에겐 솔직하기 힘들었다...

슬며시 미소 지은 지크가 목례했다.

“고맙소. 공이 아니었다면 난 인질로 잡혀서 템빨신께 민폐를 끼쳤을 것이오.”

“...흥, 알았다면 됐다.”

지크는 브라함이 공경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지크의 솔직한 감사 인사가 브라함을 기쁘게 만들었다. 언뜻 웃음이 새어나오려고 해서 표정을 구겨야 할 정도였다.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문득 어떤 이질감을 느꼈다.

“한데 그건 어찌 된 거지...?”

지크의 주변을 맴도는 룬어.

그건 본래 글자에 담긴 뜻에 따라 다른 색채를 띄어왔다.

색이 없는 경우를 못 봤다.

한데 조금 전 브라함의 거울을 부쉈던 한 글자의 룬어만큼은 유독 투명하고 색이 없었다.

“리오.”

“...?”

“관찰한다, 배운다, 혹은 빼앗는다는 뜻을 지닌 고대의 문자요.”

소별왕의 신성에 검기와 룬어를 흡수당할 때 섞어 보낸 문자이기도 하다. 중간에 브라함이 개입한 까닭에 사태가 다소 빨리 끝난 감은 있지만, 충분했다.

문자에 소별왕의 신성이 어렴풋하게나마 담겼다.

소별왕의 신성을 뜻하는 단어나 문장을 쓰면 발현되리라.

“...”

브라함의 붉은 눈동자가 다소 커진 채 흔들렸다.

엄청난 짓을 벌여놓고 태연하게 지껄이는 지크가 그의 눈엔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

코크로 섬의 병사들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끝나버린 승부.

그 탓에 브라함과 소별왕의 싸움은 대중에게 목격되지 않았고 아래와 같은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어떤 위대한 신을 패퇴시켰습니다.]

익명의 누군가가 활약했다는 내용.

옛날에야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사실상 독점했지만 최근엔 비교적 많은 사람이 익명의 주인공이곤 했다.

특정하기 힘들어졌단 의미다.

한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상대가 ‘위대한 신’이라지 않나.

‘그리드네.’

‘그리드다.’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이건 또 뭐야?”

진실은 달랐다.

[당신의 사도 ‘브라함’이 하늘신의 아들 ‘소별왕’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사도 ‘브라함’이 하늘신의 아들 ‘소별왕’을 패퇴시켰습니다.]

[히드라가 등장하는 모든 신화에 ‘브라함’의 위대한 업적이 추가됩니다.]

[당신의 사도 ‘브라함’이 높은 신격을 이뤘습니다. 특정 조건을 달성하면 신화 등급으로 발전합니다.]

“이게... 이게 무슨...”

놀라서 할 말을 잃고 있는 그리드의 시야에서 알림창이 갱신됐다.

[당신의 사도 ‘지크’가 하늘신의 아들 ‘소별왕’의 권능을 일부 학습했습니다.]

[소별왕의 신화에 지크의 이름이 기록 될 가능성이 생깁니다.]

“...뭔데?”

그리드는 여전히 동대륙에 머무는 중이었다.

사방신과 미르, 황길동 등이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며 동대륙에 활력을 불어넣는 이때 유유자적 성검을 생산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휴가를 보내고 있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한데 그 틈에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 중이다.

뭔가... 뭔가 조금 소외감마저 느껴졌다...

‘내가 없으니까 오히려 잘들 노는 느낌이잖아?’

...착각이겠지?

아니, 공교롭게도 착각이 아닐 수도 있다.

사도들과 단체로 등산이라도 가서 단합심을 기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리드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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