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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17화 (1,615/1,794)

템빨 80권 - 15화

지옥이 기록하길.

태초의 3악 중 하나인 베리아체는 만마의 힘을 다룬다고 했다.

흡혈 대상의 능력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권능을 지닌 까닭이다.

역사에 과장이 없음을 마리로즈가 증명했다.

하야테의 피를 섭취하고 용살의 힘을 휘둘러대지 않았나.

그 절대적인 권능이 바알과 아모락트의 협력을 이끌어냈던 것이고 끝내 베리아체를 지옥에서 추방시킨 것이다.

모든 망자의 힘을 상시 다루는 바알.

평소 베리아체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던 그가 특정 조건에선 허무하리마치 쉽게 패배할 때가 있었으니까.

소별왕도 베리아체의 명성은 익히 들었다.

단순히 세간에 퍼진 소문을 넘어서, 마치 직접 만나 사귀었던 벗처럼 친숙하게 느꼈을 정도다.

대별왕의 영향이다.

순진하게 지옥에 떨어졌던 그가 한동안 베리아체와 교분을 나누며 수시로 연통을 보내왔으니.

‘...굳이 경계할 필요는 없군.’

브라함의 모습을 통해 베리아체를 떠올리던 소별왕이 이내 편하게 생각했다.

템빨신의 일곱 사도 중 두 번째.

소별왕은 브라함을 높이 평가하는 한편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베리아체의 정당한 후계자인 마리로즈와 비교해서 브라함에겐 분명한 하자가 있었으니까.

가장 중요한 만마의 힘이 결여됐다.

‘괴물이군.’

반면 브라함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직계의 후각은 어지간한 초월자의 감각을 웃돈다.

특히 처음 맡는 피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하여 현장까지 한달음에 날아온 브라함이지만, 정작 소별왕을 마주하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소별왕은 그가 여태껏 대적해온 수많은 존재들 중에서도 으뜸에 속하는 위계를 지녔기에.

자연히 도미니언이 떠올랐다.

높디높은 구름 위에서 던진 창으로 그리드에게 죽음을 상상시켰던 괴물.

당시 브라함은 전혀 알 도리가 없었지만, 훗날 그리드가 고백하길 도미니언의 기세, 혹은 살기에 압도당했다지 않았나.

정작 도미니언에게 크게 한 방 먹여놓고 웬 엄살인가 싶었으나 빌어먹을, 이 순간 당시 그리드의 심정이 공감되고 이해 됐다.

“심지어 상극이오.”

특유의 오만한 표정을 유지한 채 소별왕을 물끄러미 관찰하는 브라함.

그가 사실은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지크가 조언했다.

브라함의 붉은 눈동자 한편에 지크의 모습이 투영됐다.

평소 그를 상징해온 룬어를 잃은 모습.

어울리지 않게 초라하다.

“식별하기 힘든 무색의 신성이...”

“흡수, 증폭, 발산인가.”

브라함에게 설명 따위 필요 없었다.

그를 상징하는 수많은 이름 중 하나인 지공.

지공의 힘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지크가 희생해서 만든 상황을 토대로 소별왕의 권능을 빠르게 분석해냈다.

‘만능이군.’

소별왕의 주변을 맴도는 기운의 잔재들.

그것은 브라함에게도 익숙한 지크의 검기와 룬어의 잔재였다.

검기나 마력을 흡수하거나 무효화시키는 놈들이야 여태껏 수두룩하게 만나왔지만 룬어까지 무용하게 만든 건 충격이다.

룬어는 말 그대로 문자니까.

단어나 문장을 조합해서 현실화시키는 고대의 언령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드래곤의 용언과 닮았다.

마법처럼 어떤 ‘기운’을 매개로 쓰는 게 아니라 지혜와 의념의 산물인 것인데 소별왕의 신성은 룬어를 검기와 함께 흡수해버렸다.

마치 똑같은 개념으로 치부하듯이.

‘똑같은 개념...인가...’

곱씹어본 브라함이 순식간에 어떤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곧장 자색의 마력을 방출했다.

세계에 유일한 마력이다.

대마법사의 경험과 지혜, 그리고 직계의 혈통을 활용한 깨달음의 극의.

단순히 마력을 날리는 행위에 불과한 <매직 미사일> 한 발로 동산을 초토화시키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것이.

스르륵.

호수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마냥 소별왕의 신성에 흡수되었다.

아니, 빗방울보단 염료에 가깝다.

소별왕의 무색 신성이 자색을 띄었으니까.

“이것 참... 훌륭하군.”

브라함을 시험하듯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던 소별왕이 감탄했다.

지금 막 흡수한 자색의 마력이 무한한 잠재력을 품었음을 인지한 까닭이다.

“뛰어난 혈통과 인맥으로 승승장구하다가 히드라의 신화를 통째로 찬탈했다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다. 템빨신의 사도들 중에서도 그대들 둘은 유독 특별한 존재겠지.”

브라함은 소별왕의 칭찬을 귓등으로 흘렸다.

승승장구라는 대목부터다.

어머니의 혈통과 그리드라는 인맥이 대단하다는 거야 순순히 인정하겠지만 승승장구라니?

파그마에게 뒤통수를 맞고 고생한 세월이 수백 년이건만.

그리고 파그마는 환국에서 뿌린 똥이다.

떠올리자 울컥한 브라함이 마법을 연사하기 시작했다.

불, 물, 바람, 땅으로 표현되는 4대 원소부터 무(無)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속성을 자색 마력에 담아 다양한 형태로 구현했다.

그리고 확인했다.

소별왕의 무색 신성에 모조리 흡수되는 광경을.

정말로 어떤 형태의 마법이든 흡수되어버렸다.

심지어 블레싱 계열의 버프 마법까지도.

지크가 침음했다.

마법사인 브라함에게 소별왕이 생각보다 더 큰 상극으로 작용한 까닭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브라함의 마법이 워낙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는 점.

섬 외곽을 순찰 중인 병사들이 이미 소란을 감지했을 터였다.

곧 템빨단원들에게도 소식이 전달되고 원군이 몰려올 테지.

그때까지 버티면 된다.

판단한 지크가 검을 고쳐 쥘 때였다.

“...개변.”

브라함이 중얼거렸다.

실험삼아 날린 마법이 모조리 파훼당하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번엔 연기가 아니었다.

태연한척 연기할 때 나오는 특유의 습관이 나타나질 않았다.

“흡수 전에 흡착과 개변이군.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는 과정이라 눈치 채기 힘들만 해.”

그리드의 권능 중 하나를 떠올린 브라함이 소별왕의 핵심을 간파했다.

정답이었다.

“템빨신이 부러울 지경이군.”

순식간에 거기까지 간파해 내다니.

소별왕이 재차 감탄하는 그때 브라함은 마력으로 수십 개의 거울을 생성했다.

폭 2미터, 높이 5미터의 거대한 거울 수백 개가 돔을 이뤘다.

지크와 소별왕, 그리고 브라함을 중심에 가둔 채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사각(死角)을 금한다.

“어떤 형태의 성질이라도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해서 다룬다... 가히 무적이다만... 그러므로 용량에 한도가 있을 듯한데. 특히 지금처럼 격이 떨어진 상태에선.”

스파아아아앗!!

브라함의 주변으로 수백 개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메모라이즈에 오브까지 활용한 다중 영창의 극의였다.

심지어 그 수백 개의 마법진은 금세 수천 개, 거기서 또 수만 개로 불어났다.

거대한 거울들에 연쇄적으로 투영 된 여파다.

브라함은 이 수법을 <무한 영창>이라고 명명했다.

“감당할 수 있나?”

수백 종류의 마법이 무량대수로 증식하는 상황.

모래가, 하늘이, 바다가, 내리쬐는 햇빛이 색을 잃어간다.

무량대수의 마법에 포함 된 <마나 드레인>에 기운을 빼앗기면서.

브라함의 마나가 무한하다고 평가 받는 이유는 그의 마나가 정말로 무한해서가 아니라 소모하는 즉시 ‘회복’하기 때문인데, 회복에서 차지하는 지분 중 상당수가 ‘자연에 존재하는 마나’였기 때문에 세계가 기운을 잃고 죽어가는 것이다.

브라함도 마땅한 대가를 치렀다.

마나가 고갈되고, 회복되고, 다시 고갈되길 반복하는 과정에서 뇌와 심장이 타들어갔다.

주문의 근원이 되는 뇌와 마나의 근원이 되는 심장이 고작 ‘몇 초’ 동안 수천수만 번 반복되는 마법의 탄생과 마나의 고갈을 감당하지 못했다.

만약 그가 베리아체의 혈통이 아닌 평범한 전설, 혹은 초월자였다면 채 6초를 버티지 못하고 절명했으리라.

“네 피와 신화를 먹어주마.”

눈과 코, 귀와 입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미소 지은 브라함이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힘겹게 퉁겼다.

동시에.

━━!

세계의 일부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거대한 거울들에 갇힌 범위가 삭제됐다.

라그나로크.

세계에 종말을 안겼다는 신들의 전쟁을 이름으로 삼은 마법.

브라함의 새로운 궁극기이며, 처음부터 신살과 용살을 목적으로 둔 대단위 마법이었다.

문제는.

소별왕이 절대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의 움직임은 브라함의 인지를 가볍게 초월했다.

브라함이 모르는 틈에 거울의 영역을 탈출하는 게 가능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의 위치는 어느새 거울 속이 아닌 밖이었다.

라그나로크의 발동과 동시에 위치가 옮겨진 브라함, 지크와 마찬가지로 마법의 영향 범위에서 벗어났다.

[템빨신의 사도 브라함.]

소별왕의 의념이 브라함과 지크의 뇌리에 직접적으로 스며들었다.

[그대를 단순히 베리아체의 혈통으로 규정하는 건 실례였군.]

절대자의 영역.

일반인은커녕 초월자도 인지할 수 없는 시간의 틈새를 발원지로 둔 소별왕의 의념은 몹시 빠르되 분명하게 브라함에게 전달됐다.

[그대는 정녕 위대한 마법사다. 위험할 정도로.]

통제할 자신이 없다.

아쉽지만 살려두어선 안 될 듯하다...

의념의 끝맺음과 동시에.

푸우욱!!

브라함의 등 뒤에서 나타난 소별왕이 휘두른 손날이 브라함의 뒷목을 후려쳤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분쇄되는 끔찍한 소리가 고요한 종말을 맞이한 세계 옆에서 쓸쓸히 울려 퍼졌다.

목소리가 이어진다.

“트롤...이라고 하더군.”

브라함의 목소리였다.

분쇄 된 척수와 성대를 마력으로 빚은 기관으로 대체하였지만 곧장 적응이 안 되는지 덜덜 떨린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연신 뒤따랐다.

“그리드가... 나를 그런 저능한 생물로 종종 비유하곤 했는데... 부정하질 못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브라함은 엄청난 무력감에 짓눌려왔다.

셀 수 없이 많은 공적을 쌓고 직계의 힘마저 되찾아놓고도.

그의 지난 몇 년은 후회로 점철됐다.

중요한 순간에 실수했던 장면들이 뇌리에서 잊히질 않아서 자다가 관짝을 몇 번 부쉈을 정도다.

앞으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늘 다짐했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완전을 추구하게 됐다.

바로 라그나로크에 그 의지가 담겼다.

태초신 한울의 아들이자 환국의 주신.

가장 높은 위계를 지닌 신답게 절대자의 영역을 노니는 그의 움직임을, 비록 브라함은 놓쳤을지언정 라그나로크는 놓치지 않았다.

그가 탈출하는 장면을, 경로를, 종착지를, 수많은 거울에 포착하고 영원으로 묶어두었다.

“뭣...”

상황을 눈치 챈 소별왕의 두 눈이 부릅떠졌고,

━━!

소리 없는 종말이 연쇄됐다.

브라함과 소별왕이 나란히 선 지점에서.

거울이 반사한 경로를 따라 소별왕을 뒤쫓은 마법들이 그들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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