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616화 (1,614/1,794)

템빨 80권 - 14화

‘성검’으로 뿌릴 아이템을 대량 생산하는 한편 라우엘이 친히 들고 온 <비행정 도안>의 3차 시안을 살펴보던 도중이었다.

도안에 담긴 라드볼프의 고심을 발견할 때마다 감동하고 감탄하던 그리드의 시야에 불쑥 알림창이 떠올랐다.

[일부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당신을 상징하는 절대자의 편린 중 하나가 <신살>의 잠재력을 개화합니다.]

‘일부...? 보상이 하나로 끝이 아닌 건가?’

절대자의 편린.

굳이 해석하자면 절대자 초입 단계로 진입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은 개념이다.

남다른 의미를 지녔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두 번째로 탄생하는 절대자를 예고하는 일이었으니.

정산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시스템의 입장을 십분 이해했을 정도다.

이해해준 보람이 있었다.

[‘신’을 공격할 때마다 높은 확률로 고정 데미지가 추가됩니다. 고정 데미지의 수치는 당신의 현재 공격력의 9퍼센트로 적용됩니다.]

[‘신’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경우 매우 희박한 확률로 ‘신’의 탈출 경로를 차단합니다.]

[퇴로를 잃은 신은 일정 시간 동안 퇴각하지 못합니다. 최소 10초에서 최대 3분.]

[단, 다른 신의 퇴로를 차단한 시점부터 당신의 <긴급 탈출> 스킬 또한 사용이 금지됩니다.]

본래 신은 신살이 불가능하다.

<긴급 탈출> 시스템의 설정 때문이다.

긴급 탈출이란 신들이 ‘자신의 신전, 혹은 신계로 통하는 문’을 열고 이용하는 것.

신살의 파동에 막혀버리기 때문에 신이 신살의 기운을 품는 건 자칫 자멸할 수도 있음을 뜻했다.

그리고 신은 영원하므로 어떤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신은 신을 죽일 수 없다는 세계관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한데 시스템이 그리드를 예외로 뒀다.

그리드의 수많은 업적들을 토대로, 기존의 법칙을 무시하고 신살의 자격을 부여해야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좋아. 이건 무조건 좋다.’

나야 죽어도 부활하면 된다.

신격이 훼손되는 막대한 페널티를 입긴 하지만 격이야 복구하면 그만이기에.

반면 다른 신들은 부활하지 못한다. 그들은 플레이어가 아니니까.

설령 동귀어진해도 그리드만 이득인 것이다.

보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당신이 제작한 무기 역시 ‘템빨신의 신물’로 판정되어 희미한 신살의 효과를 얻습니다. 단, 레전드리 등급 이상의 무기에만 적용됩니다.]

[템빨신의 신물로 ‘신’을 공격할 때 보통 확률로 고정 데미지가 추가됩니다. 고정 데미지의 수치는 착용자의 현재 공격력의 3퍼센트입니다. 동종 효과와 중첩 됩니다.]

[과거에 제작한 무기에도 같은 효과가 적용됩니다.]

...점차 전력이 갖춰지는 기분이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 숨죽여 환호한 그리드가 생각했다.

모르페우스는 인공지능답게 양심이 있다고.

밸런스를 핑계 삼아 수작질이나 부리는 S.A그룹보다 백배 천배 나았다.

***

같은 시각, 코크로 섬.

“합의... 동맹을 논하시는 겁니까?”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지크가 물었다.

태양광을 극대화시킨 소별왕의 신성이 어떤 원리를 품었는지 추측해보면서다.

‘성질을 증폭시키는 신성인가?’

아니면 단순히 ‘가두는’ 것인데 빛이 무한히 반사하며 자연히 커진 걸까.

‘혹은 둘 다 일수도... 뭐가 됐든 내가 감당할 상대는 아니다.’

과거 그리드와 환국을 방문했을 당시.

지크는 단 셋의 신에게만 예의를 표했었다.

유일신 치우, 태초신 한울,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소별왕이다.

그들의 위계는 아스가르드에 머물던 시절에도 가장 높았다.

치우는 규격 외, 한울이 레베카와 동격으로 정점이었고, 그 바로 다음이 소별왕, 도미니언, 쥬다르였으니.

이는 모두 칠악성 시절 얻었던 정보다.

비교적 정확할 것이라, 지크는 소별왕을 자연스럽게 공경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태양광을 증폭시킨 소별왕이 자신의 두 눈을 멀게 만들었지만 지크는 감히 불쾌감을 느끼지 못했다.

신이라는 존재 자체에게 품어온 적개심마저 억눌렀다.

“동맹이 아니면 무엇을 합의하겠소. 마침 시기가 아주 좋소. 최근 한울께서 ‘주기’에 임하셨거든. 간혹 하늘의 뜻을 드러내고 계시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의식에 가깝소. 사방신이 해방되는 꼴을 방관하신 걸 보아 제정신은 아니야.”

주기.

레베카가 두문불출할 때나 야탄이 실종됐을 때 쓰이던 표현이다.

“그 주기라는 게 정확히 무엇입니까? 태초신들은 어째서 그런 현상을 겪는 거지요?”

“알 필요 없소. 말해봤자 그대는 이해 못하니까. 아, 템빨신은 이해할 수도 있겠군.”

그럼 알려줘도 되는 게 아닐까.

문득 싹트는 의구심을 지크는 억눌렀다.

명경지수.

지크를 지탱하는 심상이다.

지혜를 무기로 삼는 그에게 평정심이란 결코 잃어선 안 될 비기이자 보루였다.

스륵.

지크의 눈이 서서히 뜨였다.

소별왕을 감싸듯 떠올랐던 작은 태양이 사라지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붉게 충혈 된 눈으로 보는 시야가 여전히 희끄무레하게 흔들려댔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칠악성.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레베카의 축복, 혹은 저주를 받고 반신이 된 존재들.

그들 중에서도 정점이었던 지크는 자신의 회복력이 보통을 넘는단 사실을 소별왕에게 보여줄 필요성을 느꼈다.

경계하는 것이다.

다짜고짜 눈을 멀게 만든 소별왕의 태도는 부드러운 말투와 달리 비상식적이었기에.

허점을 보이는 순간 어떤 꼴을 당할지 쉽게 추측이 안 됐다.

‘애초에 괴력난신이다. 불가해를 마주했다고 봐야 옳아.’

점차로 긴장하는 지크의 곁으로 소별왕이 내려앉았다. 새하얀 모래사장에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는 채로.

만약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았다면 허상이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로 소별왕의 운신은 비범했다.

“어차피 템빨신도 환국과의 협력을 바라고 있을 테지. 그의 행보를 보면 아스가르드를 명백히 적대하고 있으니까. 근래에 벌어진 사건들 탓에 눈치를 보고 있겠지만 내가 용서하면 그만이오.”

템빨신은 환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빼앗아갔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양반을 여럿 시해한 것은 시시한 문제일 정도다.

사방신을 해방시켜 동대륙에서 환국의 영향력을 약화시켰고 미르를 빼앗아가지 않았나.

사실 환국은 그리드를 용서해선 안 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소별왕은 굳이 그리드를 적대한 적이 없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별왕의 위치가 너무 애매했다.

한울처럼 무언가를 책임져야하는 입장도 아니었고, 처음부터 환국의 계획에 불만을 품어왔으니까.

그리드가 활개 치는 모습을 오히려 즐겁게 지켜보는 입장이었단 말이다.

“한울께선 양반들을 신으로 육성해서 아스가르드에 맞서겠노라 천명하셨으나 글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거짓 신화의 힘을 빌린 양반들이 설령 신이 된다 한들 도미니언 하나 감당하지 못하고 쓸려나갈 게 훤하지 않소. 천사들의 발이나 묶어놓으면 다행일 것들이 여럿 죽었다고 한들 딱히 아깝지도 않아.”

환국의 전력은 몹시 약하다.

일단 치우가 환국 소속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한울 일행이 아스가르드에서 탈출할 때 도와줬던 인연으로 환국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즉, 환국은 주신의 숫자부터가 아스가르드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었다.

고작 양반을 육성해서 아스가르드에 복수한다고?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다 많은 존재를 ‘길’로 인도해야 비로소 온전한 능력을 발휘하는 한울의 특성을 고려하면 더욱 더.

그러므로 환국은 반쪽 신에 불과한 지크라도 섭외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지크에게 집착할 이유가 사라졌다.

템빨신과 협력하면 지크는 자연히 뒤따르는 전력 중 하나가 된다.

“환국은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었는데 아주 잘 됐소. 나를 은연중에 경계해온 삼사도 템빨신 덕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으니 이참에 내가 템빨신을 용서하고 협력한다면 아스가르드와 대적할 전력이 어느 정도 마련되는 셈이오. 그대는 나의 뜻을 템빨신에게 잘 전달하여...”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풀어나가던 소별왕이 문득 입을 닫았다.

여태껏 공손히 시립해 있던 지크가 똑바로 눈을 마주쳐 왔기에.

똑바로 뜬 눈에 희미한 적개심이 서려있었다.

소별왕으로선 겪어보지 못한 태도라 꽤 낯설고 의아했다.

지크가 입을 열었다.

“두 번이나 사용하신 용서라는 표현이 거슬립니다.”

“...”

“당신께는 저의 신을 용서할 자격이 없으니까요.”

지크는 오랫동안 신을 증오해왔다.

이전 세계의 인류를 기만하고 멸망시킨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겪고 신이라는 족속 자체를 혐오했다.

그러다가 그리드를 만났다.

이상적인 신으로 거듭난 인물.

지크에게 그리드란 사실상 유일하게 섬기는 신이었고 가장 높은 존재였다.

그에게 감히 누가 죄를 묻고 용서를 논한단 말인가.

지크는 차가운 분노를 품었다.

명경지수를 유지한 채 눈앞의 역적을 어찌 쫓아내야 할까 궁리했다.

해답은 간단했다.

‘소란을 일으키면 그만이다.’

이곳은 지상이다.

제아무리 소별왕이라도 크게 약화 된 상태였다.

훼방꾼이 몰려오는 상황을 원치 않을 거란 뜻.

판단한 지크가 즉시 발검하고 검기와 룬어를 둘러쳤다.

대단위 광역 검술을 전개해 해안가를 초토화시키고 사람들을 불러 모을 의도였다.

템빨단원들의 소통은 거리를 무시하고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세울 수 있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

<사하란의 검>에서 검기가 사라졌다. 룬어도 흩어졌다.

정확히는 소별왕의 무색 신성에 흡수됐다.

덕분에 지크의 검기와 룬어를 호신강기로 두른 소별왕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템빨신의 광신도가 되어버렸군. 뭐, 그만한 기적들을 목격해왔으니 이해 못하는 건 아닐세.”

“...!”

지크가 주저앉았다.

소별왕이 흡수했다가 출수한 검기에 목을 베인 까닭에 신음조차 흘리지 못했다. 손에서 놓친 검이 떨어지는 소음 또한 백사장에 잡아먹혔다.

“명색이 반신이니 그 정도론 안 죽겠지.”

무색 신성에 붙잡힌 지크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진정한 신은 생명이 아닌 개념이다.

소별왕에게 신성이란 육신과 똑같은 것으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함께 동대륙으로 돌아갈까. 사도 중 으뜸인 그대가 공증하면 템빨신도 나를 믿고 순순히 용서를 받아들이겠지.”

소별왕은 처음부터 지크의 신변을 노렸다.

설마 그 과정에서 이런 치욕을 겪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지만...

‘내게 템빨신을 용서할 자격이 없다? 놀라운 궤변이군.’

지크 정도 되는 인물도 태초쯤부터 존재해온 주신의 절대적인 권한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템빨신이 가장 위대하다는 어리석은 믿음을 품을 만큼.

‘쥬다르와 도미니언이 어떤 모습을 보여 왔는지 알겠다.’

레베카의 명령 없이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병정들.

마치 대별왕처럼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놈들이 나의 위계마저 엉망으로 망쳤구나.

한탄하면서, 소별왕은 세계를 갈랐다.

신성을 물리적인 힘으로 치환시켜 지상이라는 차원 자체에 상처를 새겼다.

그러자 환국으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큭...”

실시간으로 회복한 지크가 저항했다.

어느새 새로운 검을 뽑아 휘둘렀다.

소별왕은 무시했다.

검기와 룬어를 잃은 검 따위 전혀 위협적이지 않기에.

단순한 날붙이 아닌가.

서걱!

“...!”

“...?”

지크와 소별왕의 눈이 동시에 부릅떠졌다.

지크는 설마 자신의 발악이 통할 줄 몰랐기 때문에 놀랐고, 소별왕은 검에 베인 부위가 아릿하게 아파서 놀랐다.

‘...뭐지?’

신성을 꿰뚫고 희미하게나마 충격을 전달하다니?

목덜미에서 스며나온 피를 닦아낸 소별왕이 잠시 넋을 잃었다.

고작 한 방울에 불과한 피.

인간으로 치면 모기에 물린 수준으로 무해했다.

하지만 소별왕의 위계를 생각하면 있어선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곳이 환국이 아니라 신격이 크게 약화 된 상태임을 고려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대, 설마 신살의 자격을...?”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지은 소별왕이 지크의 사지를 구속하며 묻는 그때였다.

번쩍!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떨어졌다.

“냄새가 묘하다 싶더니.”

신들에게 영원한 고통을 안겼던 대괴수 히드라의 신화를 찬탈한 자이자 태초의 3악 베리아체의 직계이며, 템빨신의 일곱 사도 중 하나인 전설의 대마법사.

낯선 혈향에 이끌린 브라함이 현장에 난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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