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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15화 (1,613/1,794)

템빨 80권 - 13화

‘진작부터 개인 시간 좀 줄 걸.’

사도들의 급격한 성장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개인 활동.

각자의 일을 해결하러 떠난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그리드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상황이다.

하지만 담담히 받아들이진 못했다.

신위를 개방한 피아로와 강신이라는 사기적인 스킬을 습득한 메르세데스.

둘의 발전 수준이 그리드의 기대를 아득히 초월했으니까.

이쯤 되면 평소에 이런저런 명령을 내렸던 게 미안할 지경이다.

그냥 알아서 활동하도록 놔두는 편이 훨씬 나았을 텐데...

‘그보다 강신은 공용 스킬이겠지?’

강신은 이론적으로 완벽한 스킬이었다.

그리드를 여럿으로 만드는 셈이었기에.

만약 사도들 전부가 습득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리드는 일곱 사도가 어디에 있든 늘 힘을 나눠줄 수 있었다.

심지어 아무런 소모값 없이.

‘메르세데스에게 어떻게 배운 건지 물어봐야겠어.’

어떤 경위로 얻었을지 대강 예상되긴 했다.

진짜 굿판을 벌였을 리는 없고...

몹시 성스러운 장소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내게 기도를 올리던 도중 자연히 깨우쳤겠지.

강신이란 신과 사도를 연결하는 운명의 끈 같은 것이니 탄생 배경 자체가 고결할 것이다.

‘어쩌면 나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만든 기적일 수도.’

흐뭇해진 그리드가 미소 짓는 그때.

메르세데스 부녀는 서로에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재앙급 가정 폭력.

하나부터 열까지 그리드의 예상과는 달랐다.

***

“흡.”

메르세데스가 헛숨을 삼켰다.

인식이 육신을 따라가지 못한다.

단 한 걸음을 내딛은 순간 몸이 수십 미터 앞까지 이동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식이다.

엑자일을 베지 못하고 지나치길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리드의 신성을 빌려와 그리드의 스탯과 ‘격’을 일부 구현한 여파였다.

혜안으로 관찰하고 해석하는 과정 없이.

몸에 곧바로 받아들인 힘이라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자신의 몸에 자신이 끌려 다니는 격.

“혜안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당신도 일개 인간에 불과하군요.”

강신의 원리를 해석해낸 메르세데스.

수십 년 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으로 혜안을 활용하는 그녀에게 경악했던 엑자일이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메르세데스의 궤적을 알려주는 흔적들을 보면서다.

플루토의 신성으로 단련 된 성역 곳곳이 파괴되어 있었다.

연신 돌진하고 도약해댄 메르세데스가 발생시킨 충격파를 감당 못하고.

그녀가 빌려온 템빨신의 신성이 무척 강력하다는 뜻이 됐다.

엑자일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자신은 플루토의 사도에 불과한 반면 메르세데스는 사도이자 반려이기도 했으니.

메르세데스가 훨씬 더 많은 신성을 빌려올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럼 뭐하나.

다루지 못하는 힘은 도리어 독인 것을.

“혜안이라는 게 얼마나 불합리한 힘인지 이제 좀 아시겠습니까? 그런 것에 의존해봤자 좋을 게 없습니다. 언젠간 혜안 없인 아무 것도 못하는 얼간이가 되어버리겠죠.”

“신의 힘에 의존하는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강신은 의존하는 게 아닙니다. 신과 교감하는 건 타고나는 능력이 아니라 재능을 단련하듯 노력이 필요한 일이니까요.”

“혜안도 마찬가지에요. 설령 의존하는 것이라도 상관없지만.”

다른 무언가에 의존한다는 것.

템빨신을 섬기는 사람들에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이템에 의존하는 걸 자랑스레 여기는 이들이기에.

엑자일이 아무리 떠들어봤자 메르세데스를 동요시키진 못한단 말이다.

“...언쟁은 제게 손해로군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저라면 당신께 강신의 올바른 활용법을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신성이란 종의 한계를 초월하게 만드는 축복이며 모든 원소를 상대로 이기는 법칙이다. 제대로 활용할수록 빛나는 가치를 발휘했다.

“쓸데없는 적의는 거두시고 요청하셨던 대로 가주 시험을 치르십시오. 플루토 신의 권능을 받아들이고 이해하여 최강의 존재로 거듭...”

“필요 없어요. 오늘부로 베인츠 가문은 세상에서 사라질 겁니다.”

“가주도 아니신 분께 그런 권한은 없습니다.”

제압하는 수밖에 없다.

어깨를 으쓱인 엑자일이 전력을 해방했다.

지금의 메르세데스는 죽지 않고 버틸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스아아아아!

엑자일의 몸을 감싸고 있는 신성이 진정으로 밤하늘이 되었다.

군청색 신성 속에 담긴 무수한 빛들이 별처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하나가 강력한 예기를 품었다.

찌릿!

메르세데스의 두 눈이 충혈 됐다.

별빛의 원리를 이해하려고 시도하다가 과부하가 걸리고 말았다.

급기야 실핏줄이 터지고 그녀가 보는 세상이 붉게 물든 순간.

스윽.

엑자일이 검을 휘둘렀다.

소리 없이 뻗어나가는 군청색 검기 뒤로 백색 유성들이 행렬을 이룬다.

메르세데스의 두 눈에선 급기야 피눈물이 쏟아졌다.

‘피해야...’

판단한 메르세데스가 하체에 힘을 싣는 즉시 그녀의 신형이 공동 높은 곳까지 치솟았고,

쿠콰콰콰콰콰쾅!!

조금 전까지 그녀가 서있던 지점이 초토화됐다.

융단폭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엑자일의 검로는 하나였지만 타격점은 수백수천 개였다는 증거다.

검로에 뒤따른 유성이 그렇게 만들었다.

“플루토는 전장에서 태어난 신입니다.”

스카칵!

엑자일의 두 자루 검이 상공과 지상을 동시에 벤다. 반월로 펼쳐지는 검기를 쫓은 유성들이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키며 메르세데스의 퇴로를 차단했다.

콰쾅! 쿠콰콰쾅!!

엑자일이 검을 휘두르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메르세데스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났다.

전 방위를 점령하는 초고속 광역 검술은 혜안으로 이해하고 말고의 영역이 아니다. 피하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도미니언의 하위 신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던 이유죠. 그래요, 오명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플루토는 살육의 신이고 살육은 전쟁을 초월합니다.”

죽여 없앤다는 건 고작 전쟁에 묶이는 개념이 아니다.

상시 진행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뱀에게 잡아먹히는 개구리가 있을 터였고 개구리 또한 곤충에겐 포식자였으리라.

살육은 마치 빛과 어둠과 같은 것이다.

무한하고 영원하다.

엑자일은 숭배했다.

플루토의 격은 절대적.

태초신과 맞먹는다고.

설령 사람들에게 잊힐지언정 영원불멸하리라.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나 능력을 발휘하는 도미니언 따위는 플루토 신의 상대가 아닌 거지요.”

플루토 신화에서 이르길.

그가 천상에 오르지 못했던 이유는 신들이 두려워해서라고 했다.

“베인츠식 검술.”

양팔을 교차시키는 엑자일의 쌍수검이 역수로 쥐어졌다.

동시에 기울어진 상체.

무릎과 발목의 각도까지 보면 누가 봐도 명백히 돌진 태세였다.

혜안도 똑같이 판단했다.

메르세데스는 기회로 여겼다.

초고속 돌진에 카운터를 꽂아 넣는 순간 부친을 반송장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번엔 기필코.’

그리드 님의 신성을 다루는데 성공해야 한다.

이 아름답고 따스한 신성에 담긴 힘과 격은, 그분의 지극히 일부이지 않나.

이조차도 다루지 못하면 내겐 사도의 자격이 없다.

“극의. 소닉 레이지.”

“...!!”

엑자일의 돌진 경로를 예측하며 대비하던 메르세데스가 앞으로 검을 뻗었다.

자세가 몹시 기묘했다.

검은 앞으로 내지른 반면 상체는 뒤로 젖혔기에.

혜안과 그녀의 판단이 충돌하며 육체가 혼란에 빠진 것이다.

서걱!

코앞까지 다가온 엑자일의 몸이 메르세데스의 검에 베였다.

허무하리마치 쉽사리 반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나뉜 엑자일의 육체 너머로.

다가오는 ‘진짜’ 엑자일의 모습이 보였다.

“...아.”

신성의 극단적인 활용.

신성이 엑자일의 ‘살기’를 구현했다.

방금 메르세데스가 벤 엑자일은 신성으로 만들어진 가짜였다. 음속으로 내달려와 메르세데스의 감각을 속인 가짜.

허초의 극의인 것이다.

쿠와아앙!!

진짜 엑자일이 지척에 이르렀다.

두 자루 검을 휘두르면서.

동격의 고수를 상대로는 두 번 이상 통하지 않을 기술이되 두 번 이상 쓸 기회가 없을 기술.

강신 상태에서 발동하는 베인츠식 검술의 극의 <소닉 레이지>는 일격필살의 묘리를 품었다.

서걱!

메르세데스가 베였다.

정확히는 두 눈을.

“오늘부터 당신이 익히게 될 기술입니다.”

일반인은 인지하지 못할 시간의 간극에서 엑자일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닌 의념으로 구현되는 언어.

몹시 빠르게 메르세데스의 뇌리에 전달 됐다.

다만, 이어지는 침음은 귓가에 스며든다.

“뭣...”

엑자일의 경직 된 눈동자에 투영되는 메르세데스.

그녀의 눈가에 맺힌 핏물이 메말라 있었다. 방금 흘린 피가 아니라는 증거다.

순식간에 반투명해지는 그녀의 육신 너머로 멀쩡한 메르세데스의 모습이 보였다.

한 손에는 백호검을, 다른 한 손에는 신성을 빚어 만든 검을 역수로 쥔 모습.

조금 전 엑자일과 닮았다.

“소닉 레이지.”

“...크아아아악!!”

갑주로 두른 군청색의 신성.

엑자일이 평생을 연마해온 신성이 처참하게 부수어진다.

운명을 죽이는 신성은 무언가를 지키는 개념으로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반면 그리드의 신성은 운명을 바꾼다.

무언가를 지킬 때도, 부술 때도.

항상 제한 없이 강력했다.

“쿨럭...! 커흑!!”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쓰러진 엑자일이 몇 번이나 피를 토했다. 새카만 핏물에 섞여 나온 신성의 잔재가 허무하게 흩어져갔다.

단절의 흔적이었다.

플루토가 엑자일과의 연결을 끊었다.

살육의 신의 사도답게 순순히 이치에 수긍하고 살해당하라는 듯이.

“이런... 괴물이...”

“칭찬으로 듣죠.”

메르세데스의 음성은 여전히 사늘했다.

두 번 다신 검을 쥘 수 없게 된 부친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품지 않았다.

자신을 버렸던 사람이라서.

또한 해치려했던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모친의 상태를 떠올려서도 아니었다.

단지 유일한 신을 모독한 죄인이기에 곱게 보지 않는 것이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베인츠 가문은 당신의 대에서 끝이에요.”

비전은 챙겼다.

메르세데스에게 베인츠라는 성(姓)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너무... 기고만장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다른 플루토의 사도들이 전하를... 좌시하지 않을 것... 입니다...”

“박멸해야 할 벌레들이 알아서 찾아와 준다고요. 좋네요.”

뚜벅뚜벅.

부친을 일별한 메르세데스가 기나긴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감정이 복잡했다. 안 그래도 어두운 공간에서 시야가 차츰 흐릿해졌다.

그녀를 인도하는 건 그리드의 신성이다.

“...”

정상에 도착한 메르세데스가 걸음을 멈췄다.

양쪽 귀에는 오래 된 상처의 흔적이 남아있고 목에는 붕대를 감은 여인.

다름 아닌 모친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없이 목례하는 모습에 울컥, 메르세데스는 목구멍까지 치솟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적어도 슬픔은 아니었다.

“저는, 당신들 같은 부모가 되지 않을 거예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모친에게.

앞으로 두 번 다신 볼 일 없는 사람에게 굳이 모진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없다.

즉, 지금 그녀가 한 말은 저주와 달랐다.

단순히 올바른 부모가 되겠다는 선언이자 결심이었다.

부모와 자식의 개념이 뒤틀려서.

그리고 두려워서 무의식중에 어머니가 되기를 거부해온 그녀가 드디어 상처를 극복해낸 것이다.

어서 그리드가 보고 싶어졌다.

‘아이를 갖고 싶어.’

***

같은 시각, 코크로 섬.

해안가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던 지크가 어떤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오래간만이오.”

소별왕이 강림했다.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긴 황금 귀걸이가 찰랑이며 햇빛을 난반사시킨다. 반사 된 빛은 퍼지지 않고 소별왕의 주위를 무한히 맴돌았다. 무지막지한 속도로 커지고 밝아졌다.

“템빨신이 지상에 신계를 세운 덕분에 대륙을 오가는 일이 비교적 수월해졌구려. 내가 그를 어여삐 여기는 이유요.”

“경솔한 언행은 삼가십시오.”

“경솔하다? 그건 그대가 판단할 영역이 아닐 텐데.”

소별왕이 빙그레 웃는 그때.

지크의 시야는 명멸하고 있었다.

소별왕의 무색 신성에 갇혀 비대해진 빛에 의해서다.

작은 태양을 코앞에 둔 격이었다.

“템빨신의 칠사도 중 으뜸인 지크. 템빨신과의 원만한 합의를 위해 그대를 소통의 창구로 삼겠소.”

태초신 한울의 아들.

아버지를 기만하여 대별왕을 지옥에 떨어뜨린 그는 세상에 드문 절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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