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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14화 (1,612/1,794)

템빨 80권 - 12화

자식에게 속내 좀 읽히는 게 어때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비슷했다.

베인츠 가문의 당주 엑자일은 짜증을 느꼈다.

네놈들은 뭐가 그리도 깨끗하고 당당하기에 비밀의 가치를 무시하는 거지?

나만 더럽다는 건가?

위선적인 놈들...

살인을 업으로 삼는 가문의 주인답게.

엑자일은 쉽사리 살심을 품었다.

사소한 갈등조차 살인면구로 해소하려는 욕망에 휩싸였다.

엑자일은 그런 자신을 숨기려고 애썼다.

누군가에게 속내를 들키는 순간 본인 역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할 거란 사실을 자각해서다.

사회에 섞이는 법.

평범함을 이해하는 법.

올바른 정신을 유지하는 법 등.

전대 가주에게 유년기부터 교육 받은 공부들이 안전장치로 작용하는 것이었다.

하여 더욱 더 제 혈육을 멀리하던 도중.

그는 문득 의문을 느꼈다.

어째서 부인은 내게 공감하는가.

그녀는 왜 나처럼 딸의 혜안을 두려워하지?

나만큼이나 더럽다는 의미인가...

***

“이렇게 보니 가문의 핏줄이 맞으시군요.”

대대로 모셔온 플루토 신상의 머리가 날아갔다.

범인은 오래 전 가문을 떠났던 여식.

공교롭게도 현존하는 유일한 혈육이다.

그래서 가주 시험을 보겠다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어찌 감히 황비전하의 뜻을 거스르겠냐는 핑계로, 오래 전 버린 거나 다름없던 여식을 다시 품고자 했다.

설마 이런 전개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모른 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부숴 버릴 줄이야.”

“우선 그것부터 버리세요.”

메르세데스가 서늘히 말했다.

살육의 신이라고?

지옥에서 보았던 붉은 살덩어리만큼이나 불길한 존재다.

같은 하늘 아래서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소름이 돋을 정도.

제 부친이 저런 오염 된 신격을 희미하게나마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그녀는 용납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부친의 신변을 걱정하는 게 아니다.

당연히 해선 안 될 일을 못하도록 막을 뿐.

그녀의 기사도였다.

“가주가 되고 싶다고 요청하신 건 황비전하 아니셨습니까? 본가의 주인이라면 응당 보고 배워야 할 일을 어찌 외면하십니까. 하물며 이건 물건이 아니라 신의 ‘격’입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우리 가문이 섬겨온 힘이고 상징이죠. 버리라는 표현을 쓸 만한 대상이 아닐뿐더러 예의에 어긋납니다.”

“잔말 말고 명령에 따르세요.”

메르세데스의 음성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푸른 머리카락이 설원에 피어오른 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차갑게 다가왔다.

메르세데스가 일상적으로 심상을 표출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의미인 동시에 엑자일도 최소 같은 경지라는 사실을 뜻했다.

“흐음...”

쥬앙데르크 대부터 쓰이는 일이 적어졌던 베인츠 가문.

쇠락해가는 가문을 홀로 지켜온 당주 엑자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엑자일 본인도 놀랄 만한 일이다.

수십 년 만에 되찾은 미소이기에.

인간의 이지를 초월한 혜안과 푸른 머리카락을 타고난 여식.

도대체 누구의 아이란 말인가.

늘 의문이었는데 이 순간 깨달은 것이다.

저 아이는 내 친자식이 맞다.

말보다 행동이 먼저 나가는 성격.

명색이 부친에게 닥치라고 지껄이는 말본새.

베인츠 가문의 핏줄을 짙게 이었다는 증거다.

‘부인에게 미안하군.’

괜히 의심해서 그 꼴로 만들어놨으니.

시답잖은 죄책감을 가볍게 털어낸 엑자일이 양팔을 크게 벌렸다.

길게 늘어지는 소매 사이로 드러나는 살결이 밤하늘을 오려내 갖다 붙인 듯했다.

군청색 피부에 무수히 많은 별빛이 떠다녔다.

노을, 혹은 황혼으로 비유되는 그리드의 신성과 비교하면 몹시 불길한 신성이었다.

차라리 심연처럼 새카만 바알의 마기와 닮은 느낌.

‘악한 신’의 격이 아직은 낯선 메르세데스의 눈동자가 백열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혜안의 노력이었다.

그리고 엑자일은 그녀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정했습니다.”

스르륵.

엑자일의 육신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베인츠 가문 역대 가주 중 최강.

엑자일은 선조들과 달랐다.

유일하게 플루토와 깊이 교감했다.

만약 베인츠 가문의 가주 중 단 한 명이라도.

정말 단 한 명이라도 엑자일의 절반만 되는 실력을 지닌 자가 있었다면.

전 황제 쥬앙데르크도 엑자일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을 것이다.

역사에 서술 된 베인츠 가문의 저력을 믿고 무한한 신뢰를 보냈으리라.

자식을 버린 허물마저 덮어주었겠지.

“결례를 무릅쓰고 전하의 눈을 뽑아버리도록 하지요. 적당한 고삐를 채워야 가주로 훈육할 수 있을 듯하니.”

신을 받아들인 이후부터 엑자일의 언행엔 거침이 없었다.

제국의 황비를 조심스레 대하던 노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전능감이 현실감을 무디게 만드는 여파다.

츠카카카칵!!

안개로 흩어졌던 엑자일의 육신이 어느새 인간의 형태로 돌아왔다.

메르세데스의 코앞에서다.

군청색의 신성이 전류처럼 빠르게 번졌다. 파장 하나하나가 강철보다 단단하고 칼날보다 날카로웠다.

모든 걸 파멸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한 신성.

인류를 외면해온 아스가르드의 신들조차 기본적으로 따스한 신성을 지녔던 점을 감안하면 기형적이다.

까아아아앙...!!

메르세데스가 전면으로 세운 검이 비명을 토했다.

백호검을 전류처럼 관통한 군청색 신성이 칼날을 마모시켜갔다.

정확히는 내부에서부터 분해하는 원리에 가까웠다.

살육의 신 플루토의 권능이다.

생명과 물질, 심지어 운명마저도 죽여 없애는.

“매일 이곳에 앉아 기도를 올렸습니다.”

메르세데스가 피아로의 종자가 됐을 무렵부터.

엑자일은 쥬앙데르크의 부름을 받지 못하게 됐다.

그때부터 무려 수십 년이다.

홀로 이곳에 틀어박힌 채 신과 교감해온 세월이.

엑자일의 <강신>이 역대 어떤 가주보다 강력해진 이유다.

천고의 재능이 고독과 세월에 맞물리고 말았다.

“의도치 않게 속세를 떠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콰드드득!

메르세데스가 떨쳐낸 군청색 신성이 엑자일의 손목과 손가락 사이사이를 휘감는다. 순식간에 검의 형상을 갖춰갔다. 엑자일의 양팔과 일체화 된 검.

이도류의 형상이다.

베인츠식 검술의 전조였다.

“세상은 물론 저 자신마저 잊어갔습니다만, 전하께서 저를 일깨워주시는군요. 덕분에 새로운 열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악마들이 인계를 침략한 이후 제국이 새롭게 세워졌다고 했나.

그때까지 엑자일은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문득 들려온 메르세데스의 소식이 그를 흥미롭게 만들었다.

새로운 제국의 황비가 되었다지 않나.

기형의 눈을 지닌 그녀를 반려로 맞이했다는 황제의 변태적인 취향이 재밌었고, 베인츠 가문에게 다시금 기회가 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됐다.

가문의 부흥 따위를 바랐던 건 아니다.

수십 년 세월 동안 연마해온 자신의 실력을 세상에 뽐내고 싶었을 뿐.

어쩌면 그건 엑자일 본인이 아닌 플루토 신의 바람일 수도 있었다.

살육의 신.

잊힌 신명을 널리 알리라는 플루토의 의지가 강제로 열망을 불어넣었다던가 하는 식으로.

아무래도 좋았다.

엑자일은 메르세데스와의 해후가 점차 반가워지고 있었다.

황제의 반려이기에 앞서 신의 반려인 그녀가 플루토 신을 어떻게 평가할지.

끝내 받아들일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궁금해졌다.

“눈을 버리고.”

나를 수십 년 동안 괴롭혔던 저주를 버리고,

“신을 받아들이시길.”

수십 년 동안 나를 지탱했던 축복을 받아들여라.

의지를 표명한 엑자일이 검을 휘둘렀다.

채챙!

파차차차차차창!!

말 그대로 파상공격.

두 자루의 검을 온갖 궤도로 꺾어 휘두르는 엑자일은 특별했다.

신성의 도움을 받아 단 한 번의 호흡으로 공세를 이어갔다.

칼잡이를 쥔 손의 위치가 매 순간 실시간으로 바뀌어댔다. 칼코등이가 회전하는 것 같은 착시가 생길 지경이다.

플루토의 신성이 그를 한층 더 위대하게 만들고 있었다.

검의 형상을 유지한 한편으로 안개를, 벽을, 가시를, 전류를 이루며 엑자일의 검술에 간극이라는 개념이 없도록 보조했다.

연속해서 생겨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신성의 지형지물이 메르세데스에게 커다란 압박감을 줬다.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제약을 받았으니.

개의치 않는다.

방패를 들지 않은 시점부터 그녀는 결의를 다졌다.

꽈아아아아앙!!

“...!”

엑자일의 공세가 처음으로 그쳤다.

플루토의 신성에 잠식당하고도 여전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투명한 검.

해일 같은 검로를 힘으로 돌파하며 접근해온 그것에 깃든 파괴력을 좌시하지 못한 거다. 다급히 검을 교차시켜서 방어했다.

터텅! 터터텅텅!!

베인츠 가문 저택의 깊디깊은 지하.

드넓은 동공이 마구잡이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벽에 부딪치고 튕겨져 나오길 반복하는 엑자일에 의해서다.

수백 년 동안 신과 교감하는 장소로 쓰이며 성역을 이룬 공간이기에 망정이었다.

만약 이곳이 성역이라는 판정을 받지 못했다면.

지하는 통째로 무너지고 베인츠 가문의 저택도 가라앉았으리라.

메르세데스의 일격이 그만큼 큰 파괴력을 품고 있었다.

촤르르륵...

기사도를 거듭 쓰며 창안해낸 극적제승의 검기가 겨울바람에 흩어지는 얼음조각처럼 산란한다.

그 중심에 선 메르세데스는 엑자일이 오래 전 과거에 보았던 북쪽의 괴물을 연상시켰다. 만년설을 제 힘으로 다루는 괴력난신.

“파악은 끝났습니다.”

메르세데스가 흩어진 검기를 결집시켰다.

그러면서 드러난 그녀의 몸은 상처투성이다.

무장한 갑옷 곳곳이 수백 년의 세월을 직격으로 맞은 것처럼 녹슬어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기능했다.

세월을 무색하게 만드는 템빨신의 작품이기에.

“더 이상의 잔기술은 소용없어요.”

“잔기술...? 가문의 비전을 필요 이상으로 폄하하시는 거 아닙니까? 전하께서도 죄업을 짊어가면서까지 배우고 싶어 하셨던 기술입니다만.”

강신.

그리고 강신을 활용한 무결점의 검술.

메르세데스는 엑자일이 아직 본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간파하고 있었다.

플루토의 군청색 신성 사이사이에서 별처럼 빛나는 백색의 기운.

혜안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힘은 저것이었기에.

하지만 메르세데스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까까진 잔기술이라는 걸 몰랐으니까요.”

메르세데스가 가문에게 원했던 비전은 검술이다.

어쩌면 부친에게 검술을 배우는 과정을 바랐던 걸 수도 있다.

신성?

그딴 건 필요 없다.

그녀에겐 이미 진정하고 유일한 신의 신성이 깃들어 있었으니까.

지금 막 깨우쳤다.

“강신.”

콰아아앙!!

야광석에 의지하던 어두운 지하에 빛이 떨어졌다.

기습적인 번쩍임이었으나 눈부시지 않고 편안했다.

“노을...?”

엑자일의 살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상황을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메르세데스가 어째서 강신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이곳은 살육의 신 플루토의 성역이다.

다른 신의 기운이 함부로 개입하지 못하는 장소였다.

“...혜안...?”

혜안으로 강신의 원리를 깨우치고 성역의 구조마저 분석, 파훼했다고?

얼마나 더 괴물이 된 거냐...

“버리지 않으신다니 제가 빼앗아 버리도록 하죠. 죽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길.”

단호히 말하는 메르세데스의 주위로 주황색 검기가 소용돌이쳤다.

***

[당신의 사도 ‘메르세데스’가 <강신>의 사용을 요청합니다.]

<강신>

대상에게 당신의 신성을 사용할 권한을 줍니다.

상황에 따라서 대상의 몸에 직접 강림할 수 있습니다.

단, 직접 강림은 대상의 정신과 육체에 심각한 타격을 줄 우려가 있습니다.

신성의 사용 권한을 준다고 해서 당신의 신성이 소모되는 건 아닙니다.

스킬 사용에 소모되는 모든 자원은 강신을 요청한 대상이 지불합니다.

“...굿판이라도 벌이는 거니?”

같은 시각.

메르세데스 덕분에 새로운 시스템이 개방 된 그리드는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색동저고리를 입고 춤추는 메르세데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다.

청룡과 백호의 부활 의식에서 활약(?)했던 무당이 기억에 강렬하게 남은 여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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