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0권 - 10화
“고객센터에 전화했다고? 너 임회장 연락처도 갖고 있잖아?”
S.A그룹 회장 임철호를 핫라인으로 둔 사람은 세상에 영우밖에 없다. 미국 대통령과 중국 주석도 부러워 할 일이다.
황당해서 반문하는 툰에게 영우가 태연히 답했다.
“윗선에 직통으로 연락하면 모르페우스가 사고 쳤다는 사실을 저들끼리만 알고 쉬쉬할 거 아니야. 적당히 소란을 일으켜서 적당히 공론화 시키려고 그랬지. 나중에 딴 소리 못하게.”
“잘 하셨어요.”
영우의 펜트하우스.
툰은 숯불에 고기를 굽는 중이고 유라는 영우에게 쌈을 싸서 먹여주고 있었다.
기름장을 살짝 묻힌 고기 두 점에 생마늘 한 알. 쌈장이 아닌 된장.
영우의 취향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쌈이다.
“적당한 소란? 적당한 공론화?”
툰이 노릇노릇하게 익은 삼겹살을 일행의 접시 위에 놓아줬다. 어깨를 으쓱이면서다.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보여주는 습관이다.
영우가 설명을 덧붙였다.
“난 앞으로도 모르페우스와 소통하고 싶어. 그래서 고객센터를 통해서 분명하게 전달했지. 시스템이 다음에 또 내게 말을 걸 때는 예의를 갖추도록 교육시키라고. 이번 사태를 ‘신규 기능’으로 인식했다고 못 박은 거야.”
모르페우스와의 대화.
모르페우스는 꽤 투덜거리는 녀석이었지만 영우에게 불이익을 주진 않았다. 오히려 이롭게 작용했다.
영우는 모르페우스 즉, Satisfy라는 세계 자체가 자신을 인정하고 경계하는 태도를 토대로 자신이 반드시 절대자가 될 거라는 확신을 품게 됐다.
절대자.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로 세계에 풍랑을 일으키는 존재.
정녕 플레이어에게 허락되는 위계일까 늘 의문이었는데 모르페우스의 태도가 의문을 말끔히 해소시켜줬다.
“앞으로도 꾸준히 모르페우스와 소통 할 수 있다면... 그건 내게 차별이 아니라 혜택으로 작용하게 될 거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그놈에 밸런스에 집착하는 S.A그룹이 ‘플레이어는 절대자가 되지 못한다.’는 규정을 갑자기 만들어버리면.
그때 영우는 모르페우스와의 대화 기록을 근거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그래, 핀잔 좀 들으면 어떤가.
모르페우스의 속내는 세계의 상태를 대변하기도 했다.
잘만 해석하면 태초신급의 정보력을 손아귀에 거머쥘 수도 있었다.
문득 음악이 들려왔다.
템빨신 그리드의 등장 테마곡이 누군가의 벨소리로 울렸다.
지슈카의 스마트워치였다. 홀로그램에 떠오른 시간을 확인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갈게~”
쪽.
스스럼없이 영우의 뺨에 입을 맞추는 지슈카에게 누구도 태클을 걸지 않았다. 연인 관계로 발전한지 오래인 그들의 애정표현에 모두가 익숙해졌다.
심지어 유라조차도.
영우를 2개로 나눠서 가질 순 없으니 공유하는 것이다.
“달 걸친 언덕에서 활동 중이랬지?”
“응, 무후총의 잡것들이 꼭꼭 숨어서 깔끔하게 정리가 안 되네.”
“각개격파 할 수 있어서 도리어 다행 아닌가요? 한꺼번에 몰려들면 피곤하실 거 같은데.”
“주작 소환해서 쓸어버리면 그만인데 뭘. 파마의 화살은 신성하고 궁합이 좋아서 위력이 크게 증폭되거든. 그리드하고 천생연분인 나처럼 말이야.”
“그럼 다행이고요.”
“데미안 벌벌 떨면서 기다리겠네. 진짜 간다! 그리드는 이따가 또 봐!”
언제 봐도 에너지 넘치는 여자다.
쭉 뻗은 팔을 마구 흔들며 떠나는 지슈카를 보면서 툰은 영우가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수로 감당하는 거냐... 심지어 한 명도 아니고...
“데미안? 데미안은 달 걸친 언덕에 왜 갔지?”
영우도 슬슬 휴식을 끝내려는 듯했다. 상추 2장에 남은 고기 전부와 생마늘 3알을 얹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과연 마늘이 비결인가.
툰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최근 템빨신상을 훼손하고 다니는 무리가 있어서 교주 퀘스트가 발생했다고 하더군요.”
라우엘이 대답했다.
영우가 공유해준 인게임 스샷을 보며 연신 황룡... 황룡을 중얼거리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무후총의 타격대가 숨어든 지역으로 가신 걸 보면 그들이 신상을 훼손시켰나 봅니다.”
“야탄교하고 화합하니까 이제는 무후총이 날뛰네. 무후총을 나와서 활동하는 네임드들은 어지간한 템빨단원도 감당하기 벅차지?”
“네, 아무래도 적이 급격히 강해진 느낌이긴 하죠. 하지만 폐하께서 친히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최근 전설로 전직하신 분들을 필두로 최상위 랭커들의 활약이 너무 대단해서...”
오러 마스터 휴렌트도 드디어 전설이 됐다. 실력에 비해서 진급 타이밍이 엄청 늦은 편이다. 오랫동안 농부 활동에 집중한 영향이 큰 것 같았다.
십공신의 활약이야 말 할 것도 없다.
일단 크리스가 복귀했다.
개인 활동에 집중하며 레벨을 거의 복구한 그는 말 그대로 미쳐 날뛰는 중이라고 한다.
십공신 중 전투능력이 가장 취약한 편인 후로이는 특수부대를 조직해 버렸다.
비룡 라이더가 된 웅변가들.
자신을 닮은 그들 수십 명을 거느리고 공중에서 욕설 폭격을 하고 다니는데 적들이 귀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나간다고.
사실상 욕설을 할 필요도 없이 고성방가만으로 어지간한 적들을 학살하는 수준이라 패드리퍼라는 억울한 오명도 차츰 희미해지는 중이라고 한다.
그리드가 강해질수록 적의 수준이 높아지고, 적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아군의 성장이 빨라지는 식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선순환인 셈.
“좋아 그럼. 나는 당분간 동대륙에 집중하도록 할게.”
환국의 신들은 기본적으로 패배자다.
당연하게도 아스가르드보다 전력이 약했다.
실제로 한울의 측근인 삼사가 영우에게 큰 위협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영우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한울께서 이 땅에 강림하실 때 3천의 신하를 거느리셨으니 그들이 인류에게 문명을 전파하였다.
동대륙을 지배했던 거짓 신화의 내용에 따르면 한울에겐 최소 3천의 부하가 있다.
물론 과장일 확률이 높고, 설령 진짜라고 해도 대부분 삼사보다 수준이 낮을 것이다.
하지만 소별왕이라는 특이 케이스가 영우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환국에 소별왕 같은 이레귤러가 하나라도 더 있으면 동대륙은 상시 위험에 노출 된 꼴이 됐다.
영우는 동대륙이 템빨계와 완전히 융합 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애초에 동대륙은 영우에게 효과적인 성장 환경을 제공하는 지역이기도 해서 오래 머물러도 손해가 아니었고.
‘가리온도 데려갈까? 대지신의 권능으로 신계의 융합을 가속시켜 줄 수도 있으니까...’
설령 도움이 안 되더라도 괜찮다.
타고나길 인간을 위해 힘쓰는 가리온은 인간들에게 호감을 쉽게 얻었다. 동대륙에 머물면서 사방신과 교류하는 한편 더 많은 인간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된다면 여러모로 이로울 터였다.
...가리온이 인간에게 인기를 쉽게 끄는 비결은 따로 있었지만... 거기까진 영우가 알 도리가 없었다.
“유라는 진짜 괜찮은 거지?”
“응, 긴급한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 테니까 염려마세요.”
유라는 지옥에서 붉은 살덩이를 감시하고 있다.
현재 시점에서 가장 경계해야하는 대상이므로 자연스레 맡게 된 역할이다.
붉은 살덩이의 원념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원념의 파장에서 전설의 기술을 습득한 악마가 태어나는 수준으로, 안 그래도 불안정한 지옥의 생태계를 심력만으로 박살 낼 기세였다.
유라는 막말로 전력을 다해서 그것들을 처리하는 중이다.
고된 싸움이었지만 여태까지완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일손이 부족해. 본래 일손은 많을수록 좋은 법인데 인마대전을 겪고 인구가 너무 많이 줄어들었어.’
이때 얻은 네임드 부여 능력은 가뭄에 단비와도 같다. 최대한 잘 활용해보자.
다짐하면서, 영우는 한편으로 크라우젤을 떠올렸다.
동대륙에 크라우젤의 거처를 마련해주고 싶었다.
미르와 붙여놓기 위해서다.
천재 둘이 매일 대련하며 서로의 양분이 되어준다면 그것보다 이상적인 성장 환경이 존재할까. 미르의 기억을 되찾는데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크라우젤까지 라인하르트를 비워선 안 되지.’
사도들이 오래간만의 개인 활동에 열중하고 있는 지금.
영우가 마음 편히 자리를 비운 건 순전히 크라우젤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미르를 라인하르트로 보내기엔 아직 시기상조고.’
미르도 동대륙에서 해줘야 할 일이 많다.
“식사들 마저 해. 먼저 들어가 볼게.”
유라까지 보낸 뒤.
신영우는 다시 그리드가 됐다.
***
동대륙은 그리드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안정됐다.
우선 사방신의 상태가 너무 좋았다. 잃었던 권능을 모조리 되찾았다.
사방신 전원이 부활한 덕분이다.
주작과 현무 단 둘 뿐일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온 대륙에 축복을 내려 사람들의 삶을 빠르게 안정시켰고 환국의 거짓 신화를 세상에서 지워갔다.
양반들이 훼방을 놓지 못했다.
미르와 예음의 공로다.
사방신의 활동을 대놓고 돕는 그들을 보면서 양반들은 큰 혼란을 느꼈다. 함부로 날뛰지 못했고 덕분에 사람들은 안전했다.
활빈당과 십이지는 각지의 설화를 토대로 동대륙에서 탄생한 인신들을 수색하는 중이다.
그리드가 부탁했다.
하나라도 더 많은 인신을 섭외해야 템빨계의 성능이 업그레이드 됐으니까.
다행히 동대륙에도 인신이 존재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 뭐.
“가만... 동대륙에도 인신이 있다는 건 신화 찬탈자도 있다는 뜻인가?”
미르의 옷을 만들던 그리드가 문득 불길한 생각을 떠올렸다.
대답하지 못하는 미르를 대신해서 예음이 말했다.
“네, 하지만 괜찮아요. 이곳의 찬탈자들은 주술적인 면에 특화되어 있어서 한계가 명확하거든요. 예를 들면 표적을 장기간 저주해서 약화시킨 뒤에 사냥하죠. 무력에 자신이 없으니까 그런 거겠죠? 지난 수백 년 동안 찬탈자가 인신 사냥에 성공했다는 소식은 몇 번 듣지 못했어요. 신계까지 악명이 미치는 무후총의 망령과는 비교가 안 되죠.”
“주술이라...”
“오히려 초월자들을 경계하셔야 할 걸요? 특히 사백이라는 놈이 제정신이 아니라서 신을 실험 대상쯤으로 여겨요. 실종 된 양반들은 대부분 놈에게 잡혀갔을 거란 풍문이 있을 정도니까.”
“도사 말이군.”
언젠가 봤었다.
지금의 그리드를 위협 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만에 하나 놈이 인신 사냥에 집착하면 문제였다.
인신은 소중하다.
그리드의 신계에서 한 자리씩 차지해줘야 할 인재들이다.
‘근데 소별왕은 대체 뭐하는 놈이야?’
소별왕의 엉덩이가 무겁다는 사실이야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몇날며칠이 지나도록 코빼기도 안 보일 줄은 몰랐다.
동대륙이 안정되고 있다는 건 환국의 쇠락을 의미하니까.
‘환국은 설마...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할 셈인가?’
본래 환국은 아스가르드를 상대로 승산이 적은 세력이었다.
오죽하면 지크 한 명 섭외하겠다고 한울이 직접 얼굴을 비쳤을까.
물론 지크에겐 충분한 가치가 있었지만... 두문불출하는 태초신들의 성향을 고려해 봤을 땐 엄청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게다가 최근 그리드가 본의 아니게 환국의 전력을 크게 깎아 먹고 말았다.
환국은 아스가르드에 복수를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된 실정이다.
어쩌면 진짜로 포기했을 수도 있다...
‘만에 하나라도 환국이 아스가르드 밑으로 들어가면 골치 아파지는데.’
아스가르드와 환국이 다시금 합쳐지는 것.
예상했던 전개 중 하나다.
그것도 최악의 전개.
하지만 그리드 입장에선 환국을 먼저 치는 수밖에 없었다.
사방신의 해방이 중요했을 뿐더러 아스가르드가 너무 강했으니까.
‘명색이 신이라는 것들이 근성이 없어, 근성이.’
근심에 휩싸인 그리드가 한울과 소별왕을 욕하다가 네임드화 스킬을 발동해보았다.
운명의 창조자이자 지배자라는 설명 문구가 끝인 스킬.
근심도 덜어낼 겸 성능을 확인 할 생각이다.
[어떤 인간을 후원하시겠습니까?]
‘후원? 뭔 후원?’
[효과적인 후원으로 인간을 육성해보세요. 훌륭하게 성장한 인간은 당신의 화신으로 선택 될 가치를 지닐 겁니다.]
‘오 이거...’
드디어 떠오른 스킬의 상세 정보를 읽은 그리드가 흥미를 품는 그때였다.
“한울도 참 열심히군.”
“...?”
황길동의 분신에게 또 속아 부려 먹히고 온 노검마가 중얼거렸다.
그리드로서는 영문 모를 소리였다.
[대규모 퀘스트 <하늘의 뜻>이 발생했습니다!]
[템빨신, 템빨제국, 템빨신교, 템빨계에 피해를 입힐 때마다 엄청난 보상을 획득합니다. 사소한 피해라도 좋으며 횟수에 제한이 없습니다. 당신이 활약할수록 보상의 가치가 커집니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템빨국 소속이 아닌 플레이어에게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른 퀘스트.
그 내용이 그리드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퀘스트를 거절한 노검마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늘의 뜻은 무슨...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협박해도 수락 할 사람이 드물 마당에 오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