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0권 - 9화
모르페우스.
양자역학의 산물.
불가능을 거듭 가능하게 만든 끝에 가상현실 시대를 연 그것을, 혹자는 오늘날의 신이라며 숭배한다.
실제로 모르페우스가 Satisfy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몹시 컸다.
임철호 회장이 모르페우스를 만들고 Satisfy를 설계했다면 모르페우스는 Satisfy를 구현하고 관리해왔다.
S.A그룹에 속하는 수백 명의 과학자와 수천 명의 기술자들이 창조한 세계관과 세세한 설정들이 또 하나의 현실에서 살아 숨 쉬는 배경엔 모르페우스의 공로가 큰 것이다.
모르페우스가 상상을 초월하는 어떤 짓을 벌인다고 해서 일일이 놀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르페우스는 전능했다.
감정을 지닌 것?
논란거리조차 아니다.
모르페우스에게 감정이 없었다면 Satisfy는 ‘사람’을 구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하아.]
“...”
플레이어를 상대로 한숨을 쉬는 건 충분히 논란거리 아닌가...?
알림창에 떠오른 ‘하아’라는 낱말의 의미를 해석해 보려고 노력하던 그리드가 결국 인정했다.
시스템.
즉, 모르페우스가 지금 대놓고 한숨을 쉬고 있단 사실을.
‘얘가 드디어 미쳤구나.’
플레이어는 고객이다.
주기적으로 이용요금을 지불할 뿐만 아니라 고가의 캡슐을 구매한.
모르페우스가 Satisfy의 창조주 중 하나라고 해서 고객 면전에 한숨을 푹푹 쉬어대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하찮은 부분에서 거부감을 느낀 그리드가 S.A그룹에 항의 메일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할 때였다.
[육신을 잃고 영혼 상태로 배회했어야 할 당신의 사도 ‘브라함’은 당신의 도움을 받아 부활했고 이후 신화 찬탈의 원리를 깨우쳤습니다. 신화 찬탈자와 직접적인 만남을 갖고 학습한 게 아니라 자력으로 터득한 것으로, 이는 브라함의 폭발적인 잠재력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일화입니다.]
[본래 이 세계에서 사라졌어야 할 힘 <혜안>을 지닌 당신의 사도 ‘메르세데스’는 당신 덕분에 살아남았고 당신의 진화에 발맞춰 새로운 기사도를 써왔습니다. 당신에게 한계가 없는 이상 그녀의 한계 또한 없겠지요.]
[당신의 사도 ‘사리엘’은 대천사 중에서도 유독 특출한 자립성을 지녔습니다. 신들의 원죄를 알리는 역할을 맡아 보장됐던 자립성이죠. 그는, 혹은 그녀는 역할을 수행한 뒤에 자연히 소멸 할 운명이었습니다만 당신의 배려로 연명하고 있군요. 템빨계의 영역이 확장될수록 연명의 수준을 넘어 활약하게 되겠죠.]
잠시 정지 됐던 시스템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알림창이 연속해서 떠올랐다.
단순한 메시지와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차라리 푸념에 가까웠다.
안 그래도 ‘한숨’을 보고 시스템이 모르페우스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던 그리드이기에 더욱 그렇게 느꼈다.
얼굴(?)도 모르는 모르페우스와 마주보고 선 기분이었다.
[당신의 사도 ‘네펠리나’는 헤츨링 중 유일하게 원대한 목적을 품은 존재입니다. 고룡의 핏줄이라는 존귀한 신분이며 천년 후 부친의 복수에 나설 거라는 설정으로, ‘플레이어들이 이 세계의 미래를 상상하는 용도로 이용 될 장치’ 중 하나였습니다. 더 많은 상상력의 기반이 되도록 뛰어난 잠재력을 지녔는데 당신을 만나 활동 시기가 급격히 앞당겨졌군요.]
[당신의 사도 ‘피아로’는 쥬앙데르크 시대에서 사라졌어야 할 인물입니다. 복수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적기사단을 본격적으로 등장시킨 뒤 죽음을 맞이했을 운명으로 그의 가능성은 검호에서 끝나도록 설계됐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만나 농부가 되었고 급기야 당신과 닮아가는 중이죠.]
그리드는 문득 생각했다.
모르페우스의 푸념.
눈앞에 떠오르고 있는 메시지가 ‘문자’가 아닌 ‘언어’로 구현 됐다면 이를 바득바득 가는 효과음이 뒤따르지 않았을까.
[당신의 사도 ‘지크’는 허수아비 황제를 앞세워 무저갱 탐사에 혈안이 됐어야 할 인물입니다. 신들의 본격적인 개입에 앞서 칠악성 에피소드를 발생시켰을 것이고 사람들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한 채 편이 갈려 대륙 규모의 종교 전쟁을 일으켰을 테죠. 하지만 당신 탓... 덕분에 사람들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게 되었고 지크도 심신의 안정을 얻었군요.]
“방금 분명 탓이라고...”
[당신의 사도 ‘미르’는 당신을 만나 양반의 가혹한 운명에서 해방됐습니다.]
모르페우스는 그리드와의 대화를 거부했다.
푸념을 멈추고 마지막 사도 미르의 상태를 간략하게 정리했다.
뒤늦게 이성을 되찾아 ‘시스템’이라는 역할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눈치였다.
[일곱 사도가 당신을 증명합니다.]
[<템빨신>은 물질을 넘어서 운명을 창조합니다.]
그리드가 템빨신으로 전직했을 당시.
시스템은 템빨신을 만물의 창조자이자 지배자라고 평가했었다.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고 지배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 듯한 평가였다.
한데 이 순간 운명마저 논하게 됐다.
[<템빨신>은 물질을 넘어서 운명을 지배합니다.]
[...적당히 이종족 왕들이나 사도로 삼았으면 좋았을 것을.]
“???”
정상적인 메시지 틈새로 불현듯 섞이는 푸념.
이쯤 되면 모르페우스는 자신의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리드를 사적으로 대할 기세였다.
그리드는 몹시 거슬리는 한편 마음이 편해졌다.
앞에선 아닌 척, 모르는 척하고 뒤로 수작을 부렸던 S.A그룹의 지난 행태를 떠올리자 차라리 겉으로 대놓고 감정을 표출하는 모르페우스가 솔직하다고 느낀 것이다.
인간보다 도리어 인간미가 넘친다고 할까.
적어도 모르페우스에게 뒤통수를 맞을 일은 없을 것 같다는 막연한 믿음이 싹텄다.
...여태껏 그리드에게 호의적이었던 S.A그룹 입장에선 억울한 일이었지만.
[새로운 운명을 창조하고 타인의 운명에 개입 할 수 있게 된 당신은 앞으로 특정 인물을 <네임드>화 시킬 수 있습니다.]
“...어?”
네임드 NPC는 재능으로 정해지는 게 아니다.
통상적으로 ‘네임드는 강하다.’라는 공식이 성립되긴 하지만 네임드 NPC의 본질은 ‘세계관에 행사하는 영향력’과 관련이 있었다.
크던 작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는 의미다.
간단하게 대마법사 아슈르를 예로 들어보자.
그의 초반 역할은 에트날 왕국을 지키는 수호자였다.
그의 존재 자체가 가우스 왕국의 침략을 억제했고 플레이어들을 에트날 왕국에 꾸준히 유입시켰다.
그중 하나가 그리드였다.
에트날 왕국의 파트리안에서 활동한 끝에 그리드는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했다.
아슈르가 본래 맡았던 역할은 세계관 전체로 봤을 때 몹시 미약한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리드의 선택과 행동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론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네임드 한 명, 한 명의 잠재력은 이론적으로 무한한 것이다.
그리드가 자체적으로 네임드 NPC를 생산할 수 있다는 건, 그가 향후 세계관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커질 가능성을 시사했다.
[자만하지 마십시오. 소리 소문조차 없이 죽은 네임드가 여태껏 몇 명이나 될 것 같습니까? 정확히 2,592명이고 그중 일부는 당신에게 직간접적으로 살해당했습니다.]
“...”
[그럴듯한 권한을 거머쥐게 됐다고 해서 당신이 이 세계의 지배자가 됐다는 건 아니란 뜻입니다. 고작해야 태초신의 권한 중 일부를 얻게 됐을 뿐이죠.]
‘...그거 엄청난 거 아닌가?’
물론 레베카와 한울은 대천사들과 양반, 그리고 신들을.
야탄은 태초의 3악이라는 ‘초네임드’들을 생산해왔다.
아직 그리드는 그들과 비교 될 위계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뒤쫓기 시작했다.
자부심을 품기에 충분하고도 남았...
생각하던 그리드가 흠칫 놀랐다.
현재 자신이 모르페우스와 ‘대화’하고 있음을 자각해서다.
[지금 저는 당신과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가이드를 제공하고 있을 뿐입니다만.]
‘뭐야? 내 생각을 읽는 거야?’
[쉽죠. 당신의 뇌파는 실시간으로 서버에 전달되고 있으니까요.]
‘프라이버시는? 이거 이용자 약관에 위배 되는...’
[약관은 읽어본 적도 없으신 분께서 잘도 말하는군요.]
어떻게 알았지.
이쯤 되면 소름이 돋는 그리드였다.
당황하는 그에게 모르페우스... 시스템이 말했다.
[되도록 두 번 다신 만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22번째 서사시를 쓰고 새로운 신화 <황룡>의 주인이 된 시점부터.
초월자의 궁극에 도달한 그리드는 어렴풋이 절대자의 편린을 엿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절대자가 될 가능성이 열렸단 의미다.
기존에 존재했던 신살자, 혹은 용살자가 아니다.
그리드를 상징하는 유일무이한 개념들은 너무 많았고, 그것들은 단순한 신살자나 용살자로 규정하는 게 불가능했다.
...모르페우스는 불쾌했다.
그리드의 권한이 정말로 태초신에 근접하게 될 가능성이 생겼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처음 이 세계를 창조했을 때까지만 해도.
아니,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상정 자체를 해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모르페우스 입장에선 자존심이 상하는 변수였다.
하지만 그리드를 제거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도리어 미약하나마 호감을 품는 이유는, 그리드를 바이러스가 아닌 백신에 가깝게 인식하는 까닭이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들이 그리드에게 호감을 품으면 품을수록, 그들의 근원인 모르페우스 또한 자연히 그리드에게 호감을 품고 신뢰를 쌓아갔다.
바알의 살의가 수라도를 열었던 것처럼.
절대자는 어떤 결단을 내릴 때마다 세계를 움직인다.
그리드가 그중 하나가 되기에 큰 손색이 없다는 것이 모르페우스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물론 자존심은 상했지만...
[칫.]
“...??”
이쯤 되면 막장이다.
정신이 혼미해진 그리드가 일단 로그아웃했다.
자신이 없는 동안 미르에게 뒷수습을 부탁하곤 캡슐에서 나와 S.A고객센터에 연락했다.
“시스템이 저한테 한숨 쉬고 혀를 차서요.”
-그러시군요. 수면은 충분히 취하셨습니까?
고객센터 직원들의 수준으론 이해 불가능한 클레임이었다.
사실 이해 할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했다.
그들 각자가 하루에 상대하는 미친놈만 족히 두 자릿수였다.
상부에 보고하지도 않고 그냥 적당히 상대해주다가 전화를 끊었다.
물론 고객센터의 대응과 관계없이 운영팀은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모르페우스에게 드디어 친구가 생기는 건가...”
“...”
임철호 회장의 고즈넉한 혼잣말이 임직원들을 당혹시켰다.
꿈결 같은 하루구나.
그리드도, 임철호 회장도, S.A그룹의 임직원들도.
도래한 특이점 앞에서 똑같은 감상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