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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09화 (1,607/1,794)

템빨 80권 - 7화

‘하필 천사라니... 골치 아프게 됐군.’

언제나 불만으로 가득 찬 카일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독 일그러졌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젖어드는 잿빛 머리카락 사이로 파지직, 파지직 피어오르는 전광이 그의 흐릿한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도록 만드는 중이다.

이내 술기운이 날아가고 또렷하게 뜨인 동공에 나부끼는 깃털들이 투영됐다.

새하얀 깃털들.

은은한 빛을 머금은 모양새가 쓸데없이 신성했다.

과거엔 레베카교 신전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나 볼 수 있던 광경.

천사의 상징이었다.

투사체와 마력에 높은 저항력을 지닌 존재들.

천사는 대부분의 마법을 면역했다. 카일에게도 몹시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가 내뿜는 전광은 ‘체질’이 기원이되 마력을 출력으로 삼으니까.

애초에 카일은 뇌신이라는 자신의 별명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해왔다.

이 순간 자신을 발견하고 환호하는 마법사들의 기대어린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뇌왕이나 뇌공 정도였으면 이렇게까지 기대 받진 않았을 텐데.’

일단 뇌제는 안 된다.

그리드라는 황제를 섬기는 제국신민의 별명에 황제를 뜻하는 말이 붙으면 당장 붙잡혀 사형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대역죄였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은 내게 뇌제가 아닌 뇌신이라는 별명을 갖다 붙인 듯했다.

...희대의 병신 짓이었다.

그리드가 실제로 신이 된 마당에 뇌신이라는 별명은 진짜로 최악이다.

자칫 그리드의 위계에 도전하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단 염려에 카일은 늘 노심초사했다. 소문의 페이커가 그림자에서 나타나 단도를 휘둘러오는 악몽을 나흘 연속으로 꾼 적도 있었다.

페이커 또한 살신이라고 불리지 않나.

자신과 비슷한 심정으로 템빨신의 앞잡이 노릇을 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카일은 노력해왔다.

뇌신이라는 되도 않는 별명을 잃기 위해 최대한 두문불출하며 술독에 빠져 살았다.

하지만 한 번 얻은 명성은 대체로 저절로 커지는 법이다.

애초에 인마대전에서 활약한 카일의 명성이 너무 대단했다.

카일을 뇌신이라고 찬양하며 의지하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지금 저기서 환호 중인 얼간이 마법사들처럼.

‘그냥... 도망치고 싶다...’

카일은 되도록 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천사들이 대놓고 타이탄을 침공한 마당에 사태를 외면했다간 후환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드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하고 말 것이다...

‘...곧 바사라 황비가 군대를 이끌고 도착할 테니 그때까지 죽지 않을 정도로만 싸우면서 버티자.’

그래, 적당히 싸우는 거다.

카일이 계획하고 있을 때였다.

“으읏!”

천사들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시선을 돌려보니 거의 송장 같았던 피아로가 어느새 부활해서 날뛰고 있었다.

그 콧대 높은 천사들이 미친 황소라도 마주한 것처럼 질색하며 피해 다니기 바빴다.

‘...뭐지.’

새로운 전성기라도 맞이한 건가?

인마대전 때보다 훨씬 더 강해진 피아로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카일이 기함했다.

주변의 풍경이 어둠으로 물들고 이어서 떠오른 은하수에 넋을 잃은 것이다.

흑마력과 신성력이 혼재되어 있는 마법.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여태껏 없던 형태의 마법이 눈앞에서 실현되고 있었다.

우주를 그리는 마법이었다.

우주란 무한이므로 우주를 그리는 마법의 잠재력 또한 측정이 불가능했다.

“신...”

떨리는 시선으로 유페미나를 바라보는 카일.

세상에서 누구보다 신-템빨신-을 두려워해온 그가 감히 신을 입에 담았다.

즉시 실수를 깨닫고 놀라 황급히 입을 닫았지만 늦었다.

카일은 분명히 그리드를 제외한 다른 인간을 신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카일은 세상에 드문 초월자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바람과는 달리 무지막지한 파급력을 발휘했다.

“신...?”

천사들의 얼굴이 굳었고,

“오오...! 우오옷...!”

영원의 탑 소속 마법사들은 환희했다.

현장의 모두가 똑똑히 들은 것이다.

위대한 뇌신 카일이 유페미나라는 대마법사를 무엇으로 규정했는지를.

“어, 어라?”

이런 저런 마법을 조합해보며 신나게 날뛰던 유페미나가 잠시 굳었다. 그녀의 크고 맑은 눈동자가 희미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놀랄 수밖에 없다.

[희미한 신격이 피어납니다.]

여태껏 정체되어 있던 클래스가 처음으로 변화 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기에.

아직은 미약하지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변화였다.

레벨이나 스탯이 오르는 등의 물리적인 변화는 없었으나 유페미나는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조금 더 단단해진 것을 느꼈다. 감히 고귀해졌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았다.

“고, 고마워요?”

카일과 눈이 마주친 유페미나가 얼떨결에 인사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을 만들어준 카일에게 감사하는 건 당연했다.

“...”

카일의 얼굴은 시체처럼 하얗게 질려있었다.

감히.

감히 템빨신 외의 존재를 신이라고 부른 것이다.

신성모독이다...

이건 희망이 없다. 반드시 템빨신에게 살해당하고 말 것이다...

확신하고 덜덜 떠는 카일의 몸이 밝게 백열했다. 그리고 쏟아지는 빗물 사이로 흩어져 뻗어나갔다.

전광화.

육신을 번개로 바꾸는 술법이었다.

본래 카일을 꿰뚫기 위해 날아들던 삼지창이 전광에 닿아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삼지창을 휘두른 천사의 몸이 감전 되서 파닥거리다가 축 늘어지고 말았다.

전광화를 푼 카일의 손이 타들어간 천사의 목덜미를 붙잡아 꺾어버렸다.

“네놈들... 네놈들 탓이다...”

으르렁 울리는 목소리가 상처 입은 맹수를 연상시킨다.

짙은 원한과 살의가 깃든 음성이었다.

천사들은 다소 의아했다.

동료의 기습에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고, 가뿐히 피한 걸로 모자라 역으로 죽여 버린 주제에 뭐가 억울하다고 화를 낸단 말인가?

순수한 까닭에 이기적인 논리를 세우는 천사들.

그들에게 카일이 선언했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어차피 살아남아봤자 그리드에게 죽을 테니까.

악마보다 더 두려운 그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하느니 여기서 싸우다 죽는 편이 훨씬 덜 고통스러우리라.

“한 놈이라도 더 길동무로 삼아주마...”

날 죽음으로 내몬 네놈들을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이를 바득바득 가는 카일의 패기 넘치는 모습에 사람들이 감탄했다.

영원의 탑의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유페미나와 라엘라, 그리고 피아로까지.

심지어 피아로는 잠시 농기구를 내려놓고 박수까지 쳤다.

“내가 떠난 뒤로 사하란을 지탱했던 기둥답게 패기가 넘치는구나. 참으로 멋지게 성장했다, 카일. 폐하께서 자네를 주시해 오신 이유를 확실히 알겠어.”

“...”

역시 감시하고 있었구나.

정신이 아찔해진 카일이 전광을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반쯤 이성을 잃고 날뛰어댔다.

천사들의 눈에는 미치광이로 보이는 반면 피아로 일행의 눈에는 죽음을 각오한 영웅으로 보였다.

결의에 찬 카일의 모습에 피아로가 재차 감탄하는 가운데 유페미나는 자신이 얼마나 급격히 강해진 건지 실감하고 있었다.

카일을 통해서다.

전설이자 초월자.

카일은 그리드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고 있는 인물이다.

네임드 NPC 중에서도 특별했다.

그 특별한 위계를 믿고 오만하게 굴지 않고 겸손하게 활동하는 모습이 특히 인상 깊은.

능력적으로나 성격적으로나 본받아 마땅한 위인이었다.

한데 그런 사람이 천사들을 상대론 크게 활약하지 못했다.

궁극기로 추정되는 전광화를 제외하면 천사들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고 전투가 지지부진해졌다.

반면 유페미나는 천사들을 빠르게 처치해갔다.

그녀가 카일보다 월등히 강해서가 아니다.

마나와 흑마력, 그리고 신성력을 동시에 활용할 수 있다는 게 불합리할 정도로 뛰어난 이점인 것이다.

적의 강점을 실시간으로 무력화시키고 카운터 치는 게 가능한 수준.

그리드의 말투를 빌리자면 개사기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방금 미약하게나마 신격을 얻었다.

언젠간 고유의 신성을 개화하게 될 텐데, 그때의 유페미나는 얼마나 강해져 있을지 그녀 본인도 함부로 추측하지 못했다.

‘고마워요.’

유페미나가 선두에 있는 피아로의 등을 바라보며 감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곁에서 함께 마법을 영창 중인 라엘라에게도 감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지금 이 순간 동대륙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듯한 그리드에게도 감사를 건넸다.

동료, 친구...

그리드를 만난 덕분에 얻게 된 소중한 존재들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줬음을 절실하게 실감하는 것이다.

“피아로 공!!”

마침 원군이 도착했다.

예상보다 빨랐다.

선두에 있는 황비 바사라의 옷매무새가 드물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아 어지간히도 서두른 눈치였다. 실제로 그녀를 태운 명마가 거친 콧숨을 토하고 있었다.

“비둘기 새끼들이 단체로 새장에서 탈출했네.”

창성 레이첼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곁에는 그렌할 공작과 모르이즈 공작이 함께였다.

게다가 그리드제 아이템을 무장한 수천 정예군까지.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유페미나도 안도감을 느꼈다.

천사들의 뒤편에 묵묵히 서서 힘을 비축하고 있는 3명의 대천사가 몹시 거슬리던 참이었는데 이제야 그들을 노려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피아로 님, 카일 공, 우리가 협력해서 대천사들을...”

“우오오오오!!”

“카일 공?”

“우오오오오!!”

“...”

카일이 겸손하다고 소문난 이유는 순전히 과묵하기 때문이다. 그의 오만하고 사나운 화법을 아는 사람들은 이미 대부분 죽었다.

템빨 황가가 아직 왕가이던 시절.

사하란 황가와 합병하려는 걸 훼방 놓던 사람들 말이다.

아무튼 유페미나는 카일이 몹시 과묵한 줄 알았는데 전장에서만큼은 아닌 듯했다...

‘피를 보면 흥분하는 타입이네.’

소통이 안 되자 난감함을 느끼던 유페미나가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귀공께서 허락하신다면 내 미약한 힘이라도 보태고 싶소만.”

대륙제일창 키리누스.

크라우젤의 스승으로도 알려진 거물이 한 발 늦게 현장에 도착한 것이다.

인마대전 이후.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돕기 위해 속세에 나선 그를 바사라가 직접 초빙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성공적으로 섭외한 모양이었다.

“기쁘게 받아들일게요.”

플레이어를 제외한 인물 중에 초월의 격을 쌓을 만한 사람이 누구일까.

템빨단원끼리 재미삼아 논의할 때 자주 언급되는 인물 중 하나가 키리누스였다.

혁혁한 공을 쌓아올리고 있는 검성 크라우젤에게 가르침을 줬었다는 업적 자체가 키리누스의 격을 크게 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는 몇 년 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상태였다.

피아로, 유페미나, 카일과 비교하면 당연히 손색이 컸지만 대천사의 공격을 한 번씩 차단하는 활약을 펼쳤다.

덕분에 천사들의 위기감은 갈수록 커졌다. 대천사들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들보다 카일이 느끼는 불쾌감이 수천 배는 더 컸다.

대천사들이 민망해서 분노를 표출하지 못할 정도였다.

끝내.

“도망친 신들이 일을 망쳤군요. 물러나도록 하죠.”

대천사들이 퇴각 명령을 내렸다.

동대륙으로 도망친 무능한 신들이 실시간으로 템빨신의 양분이 되어준 까닭에 낭패를 겪은 거라며, 작전의 실패 원인을 순전히 환국의 신들에게 전가했다.

어지간히 콧대가 높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퇴각 명령을 내린 시점도 몹시 늦었다.

이미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후에 명령을 내린 까닭에 천상으로 도망치는 그들의 모습은 초라했다. 등장했을 때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수준으로 말 그대로 패잔병이었다.

“우와아아아!!”

천사 대군을 물리쳤다.

순전히 우리들의 힘만으로.

템빨신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새로운 경험이 병사들과 마법사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바사라와 공작들, 피아로와 라엘라, 그리고 유페미나도 밝게 웃었다.

이제야 조금씩 그리드에게 도움이 되기 시작했단 사실에 엄청난 충만감을 느끼면서다.

다만 카일만큼은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피아로가 허허 웃었다.

“스스로의 활약에 만족하지 못하는 건가? 본 받을만한 향상심이다. 폐하께서도 그대의 소식을 접하면 크게 기뻐하실 테지.”

“...제발 곱게 죽여라.”

언제까지 겁박하면서 갖고 놀 셈이냐...

카일의 소심한 투덜거림이 사람들의 환호소리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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