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0권 - 5화
뿌드드득!!
기이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드가 찔러온 검의 측면을 후려친 풍사의 손등에서부터다.
생김새처럼 포악하게 날뛰는 황룡의 검기에 살갗이 벗겨지고 뼈가 분쇄됐다.
꽃잎으로 형상화 되는 화(花)의 검기와 함께 나부끼는 선혈.
만들어진 신은 개념이 아니라 생물이라는 증거였다. 스스로는 부정해도 인신에 가까웠다.
꽈르릉...!
그리드의 검이 운사가 발악적으로 집결시킨 구름에 갇혔다.
황룡의 검기가 표적을 상실했고 그리드는 잠시 무방비해졌다.
하지만 삼사는 그리드의 빈틈을 노리지 못했다.
그리드의 대응이 너무 좋아서다. 즉시 청룡의 힘을 운용하더니 구름을 매개로 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전광을 흩뿌려댔다. 적의 힘을 고스란히 역이용하는 것이다.
‘빌어먹을 괴물 놈.’
소란에 모인 시선이 많다.
지상의 인간들이 삼사의 신격을 실시간으로 강화시키고 있었다.
우리가 섬겨온 신이 패배할 리 없다는 믿음이 삼사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렇다.
파국의 백성들에겐 그리드가 정체불명의 침략자였다.
백호가 부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거짓 된 신화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삼사의 존재가 거짓 신화를 붙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상처를 회복한 삼사가 빠르게 연계했다.
천상의 신으로 태어나 여태껏 단 한 번도 땅에 발을 디딘 적 없던 존재들.
그리드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공중전 경험을 적극 활용했다.
드넓은 하늘을 관통하고 선회와 체공을 반복하며 그리드를 교란시켰다. 위아래를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어 그리드의 공격이 명중하기 힘들게끔 유도하는 동시에 반격의 실마리를 찾았다.
무려 셋이나 되는 신이 그리드 단 한 명을 제압하기 위해서 협력하는 것이다. 일절 방심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후우.”
하늘에 가상의 벽을 세운 것처럼 특정 지점에서 자꾸 가속하는 삼사.
어지럽게 교차하는 그들의 협공에 잠시 주춤하던 그리드가 심호흡했다.
황룡의 숨결.
누른 빛깔의 숨결이 흘러나온다.
순간 그리드의 흑발이 신성과 똑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너울지는 신성이 절묘하게 덧씌워져서 생기는 착시다.
그리드의 머리카락은 때때로 노을빛 장발로 보였다. 등을 덮는 수준의 길이. 잘 어울린다. 얼굴에 음영이 질 정도로 발달한 티존 덕택에 그리드는 의외로 여러 가지 스타일을 소화했다.
‘앞으로 내가 싸우는 적들의 수준은 최소 이 정도인가.’
전투가 시작되고 몇 번의 공방을 나누는 사이.
삼사는 급진적인 발전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울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권능엔 한계가 없다고 외치듯이, 날씨를 변화시키는 자신들의 권능을 차츰 전투에 적합하게 활용해갔다.
이쯤 되면 그리드 본인이 양분이 되어주고 있다는 착각이 드는 수준이었다.
삼사의 협공을 견뎌내면서, 그리드는 상념에 잠겼다.
황제 그리드는 여러모로 불편했다.
지존이라는 사회적 배분의 문제였다.
황제 그리드가 공적인 자리에서 극진한 예를 ‘갖춰도 되는’ 대상은 부모님이나 탑의 결사들 정도밖에 없었다.
그 외의 대상에겐 법도의 문제로 고개를 숙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저절로 고독해졌다.
말과 행동 하나에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아서 내심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반면 템빨신 그리드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신들의 세계에서 그는 막내나 다름없으니까.
특히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엄청난 메리트로 작용했다.
자신보다 배분이 훨씬 더 높은 초월자나 절대자들을 상대로 손해를 본다고 해서 그 누가 함부로 비난하겠나?
자칫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맞이할 경우엔 격이 떨어질 우려가 있었지만, 적어도 아직까진 그 정도의 위기를 겪지 못했다.
운 좋게도 매번 도움을 주는 존재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이곳 파국은 아직 환국의 지배 하에 있었다.
탑의 결사들을 비롯한 템빨계의 신들이 즉시 개입하기엔 거리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무리가 컸다.
사도를 소환하기엔 사지로 몰아넣는 격이다.
주작과 현무는 각자의 영토를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며 지금 막 부활한 청룡과 백호는 상태가 온전치 못했다.
갑자기 사정 좋게 드래곤이 나타날 리도 없었다...
그리드는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승리를 거둬야만 했다.
당연하게 쟁취해야 할 승리였다.
삼사.
태초신의 측근이며 환국의 주신이라지만 손색이 크다.
날씨를 관장하는 그들의 역할은 당장 사방신만 해도 대체할 수 있었다.
지크조차도 삼사에겐 고개를 숙이지 않았었다.
그들을 단독으로 격퇴하지 못한다면 템빨계라는 새로운 신계를 세운 그리드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
그리드는 상기했다.
애초에 환국의 신들은 패배자다.
태초신 한울을 지켜내지 못한 머저리들이다. 전반적으로 무능하다고 봐야 옳았다.
‘무조건 이겨야 돼.’
져선 안 될 싸움이 있다.
바로 지금이 그랬다.
자각하는 그리드의 마음가짐이 차츰 바뀌어갔다.
템빨신이 아닌 황제 그리드의 마음가짐이었다.
실패라는 개념 자체를 섭리에서 지운다.
화르륵!
그리드가 재차 화와 파의 검무를 전개했다.
비와 우레, 폭풍으로 광역 공격을 일삼는 삼사를 상대로 똑같이 물량공세를 펼쳤다. 스킬을 무효화시키는 무패왕의 검무를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꽈르릉...
하늘이 미쳐 날뛰는 것처럼 보였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다가 거짓말처럼 뚝 멈추고 노을에 물든 채로 천둥번개가 떨어지고.
신들의 전쟁은 상상보다 더 끔찍했다.
세계가 비명을 지르는 느낌.
영원히 살아가는 존재들의 전쟁이니만큼 어쩌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게 아닐까.
사람들에게 그런 두려움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으윽...”
정작 하늘 위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삼사의 몸에 상처가 늘어갔다.
궤적을 남길 때마다 노을에 물든 하늘을 분절시킨 듯한 착각을 주는 그리드의 검.
그 안에 담긴 위력을 삼사는 쉽사리 감당하지 못했다.
그리드가 6융합 검무를 썼을 때는 양반들을 열댓이나 방패로 삼아서 간신히 목숨을 연명했을 정도다.
이대론 정말로 질 수도 있겠다...
전쟁의 신에게 쫓길 때와 비견되는 공포에 짓눌린 삼사가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한울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시기를.
그때였다.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그리드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하늘이 세우는 법칙>
난이도:SSS+
지금부터 삼사에게 상처를 입을 때마다 주변 환경이 환국과 닮아갑니다.
지금부터 당신이 삼사에게 상처를 입힐 때마다 주변 환경이 환국과 닮아갑니다.
“...?”
다짜고짜 떠오른 퀘스트.
현재의 그리드를 상대로 드물게 ‘최고 난이도’로 책정 된 퀘스트의 내용은 몹시 황당한 것이었다.
삼사에게 상처를 입을 때마다, 게다가 상처를 입힐 때마다 주변 환경이 환국과 닮아간다고?
인계에 강림한 여파로 약화 된 삼사가 자연히 힘을 회복하게 된다는 의미가 됐다.
그리드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건이었다.
내심 당황하는 그리드를 둘러싼 삼사의 표정 또한 긴장으로 굳은 채다.
그들은 한울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신탁이다.
그리드에게 상처를 입히고 입을수록 격을 회복할 거라는 인도였다.
태초신 한울의 고유 권능이었다.
적과 아군에게 퀘스트를 내리고 일방적인 페널티, 혹은 보상을 내리는 권능.
그것은 과거 양반 가람에게 힘을 실어줬었다.
그리드를 쫓아 동대륙을 찾아왔던 수백 명의 기술자를 죽음으로 인도했던 원흉이기도 했다...
“...”
상황을 파악한 그리드의 표정이 바뀌었다.
결의에 찼던 얼굴이 살의로 물들어갔다.
꿀꺽.
삼사가 마른 침을 삼켰다.
한울의 신탁을 받은 이후 그들의 얼굴이 도리어 긴장으로 굳은 이유는 단순했다.
템빨신에게 상처를 입거나 템빨신에게 상처를 입힐 때마다 지상이 신계로 바뀌어갈 거란 내용의 신탁.
시사하는 바가 너무 컸다.
한울은 템빨신의 위계를 삼사보다 훨씬 높게 책정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유리한 내용의 신탁이 완성 된 것이다.
“어찌하여...”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낱 인간이었던 자를 상대로 이토록 큰 격차가 벌어졌단 말인가.
인정할 수 없다.
한울께서 뭔가 단단히 오해하신 게 분명하다.
“우오오오!!”
재차 폭풍우를 일으킨 삼사가 그리드에게 돌진했다. 탄생 이후 최초로 기합을 내지르며 스스로를 분기시켰다.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리드는 갓 핸드를 회수하고 있었다.
양반을 방패로 삼는 삼사의 태도를 보고 혹시 몰라 지상에 내려 보냈던 300개의 갓 핸드들.
사람들이 전투 여파에 휩쓸리지 않도록 보호해주고 있던 그것들이 일제히 그리드의 좌우로 도열했다.
흑금색 날개가 펼쳐진 듯한 광경이었다.
갓 핸드들이 무장한 검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느냐에 따라서 날개의 면적이 커졌는데 그땐 은색으로도 보였다.
“검무.”
금의 성역.
그리드의 심상이 세운 협곡의 풍경이 검을 붓 삼아 그려진다.
산용수상(山容水相)의 전조였다.
그리드는 2종류의 6융합 검무를 왼 손으로, 오른 손으로 동시에 휘둘렀다.
감당하기 힘든 탈력감을 느끼면서다.
그리드가 보유하고 있는 검기와 마나 등의 자원이 순식간에 고갈됐다.
온갖 회복 효과가 무의미한 이유는, 자원이 회복되는 즉시 다시 고갈되길 반복해서였다.
그리드는 그야말로 찰나지간에 수십 번이나 진이 빠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삼사와의 거리가 실시간으로 좁혀지는 가운데 시야가 수십 번 암전 됐고 정신이 아찔해졌다.
갓 핸드로 펼친 날개가 펄럭이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300개의 갓 핸드가 일제히 검무의 동작을 취하는 여파였다.
만약 그리드가 여전히 스태미나에 발목을 붙잡히는 입장이었다면.
즉 평범한 플레이어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결코 감당하지 못했을 도전이었다.
꽈르르르르르릉...
하늘에 수천 줄기의 은색 빗금이 그려졌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무시무시한 광경.
삼사를 집어삼키는 검무의 해일이었다.
사람들이 봤을 땐 그리드가 날개를 몇 번 펄럭이자 발생한 이변이었다.
“아...”
삼사는 제대로 된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수만 갈래로 찢겨졌다.
지상의 환경이 어느새 환국과 닮아졌지만 무의미했다.
육신을 잃은 그들은 더 이상 싸울 수 없었고 긴급히 현장에서 탈출했다.
망가진 육신만큼이나 훼손되는 격을 느끼면서다.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뇌리에 오랜 신화가 맴돌고 있었다.
한울께서 이 땅에 강림하실 때 수백의 신하를 거느리셨으니 그들이 인류에게 문명을 전파하였다.
그중에서도 삼사가 재해를 막아주고 농업을 도와 으뜸이었다.
...거짓이다.
조상들께선 신들의 도움 없이 문명을 세웠다.
힘들 때면 백호 신께 기원했었다.
우리의 신이란 그때야 비로소 탄생했던 것이다.
인류를 저열하게 묘사하는 이딴 신화가 진실일 리 없다.
[파국의 백성들이 거짓으로 점철 된 신화에서 해방 됩니다.]
[파국에서 백호와 사방신의 신화가 부활합니다.]
[파국에 템빨신의 신화가 뿌리를 내립니다.]
[파국이 템빨계에 융합되는 속도가 빨라집니다.]
가짜 신들이 물러나고 푸르러진 하늘에 민들레처럼 새하얀 백호의 털이 나부낀다.
오랜 세월 메말라 있던 파국의 대지 위로 스며들어 양분이 되어주는 수호신의 신성이었다.
그 중심에 그리드가 있었다.
어흐흥...
백호와 파국의 백성들이 고개를 조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