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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06화 (1,604/1,794)

템빨 80권 - 4화

인간은 신화에서 서술하는 신의 말씀과 행동을 해석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신들 역시 같았다.

때때로 두문불출하는 레베카와 한울.

신들은 제 어버이의 의중을 헤아리고자 항시 노력해야만 했다.

삼사도 그랬다.

양반.

쫓겨난 신들의 검이 되어줄 인공 천사들.

삼사는 그들을 무조건 강하고 날카롭게 벼리기 위해서 애썼다.

그것이 한울께서 바라시는 일이며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다.

미르의 기억을 소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환국과 명백히 대적하는 템빨신에게 호의를 품은 미르를 좌시하지 못했다.

그 결과가 이거였다.

‘순식간에 제압당하다니!’

그리드에게 습격당한 미르가 너무 손쉽게 패배했다.

환국에서 이변을 뒤늦게 눈치 챘을 정도다.

게다가 미르는 목숨을 연명하려고 오작교를 작동시켰다.

덕분에 한달음에 파국까지 도착한 그리드가 마지막 사신기를 간단히 손에 넣었다.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비록 양반을 존중할 필요는 없다지만 기억을 함부로 만지는 건 지양했어야지요. 부작용을 고려하지 못했던 겁니까.”

소별왕이 대놓고 조소했다.

한울께서 실망하시기 전에 어서 사태를 수습하라는 채근과 함께였다.

말하지 않아도 삼사는 즉시 나설 생각이었다.

양반들을 최대한 대동하여 지상에 강림했다.

솔직히 말해서 상황은 나쁠 게 없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청룡과 백호를 부활시키는 건 결코 쉽지 않았으니까.

템빨신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운명이었다.

초국과 씽국을 포기하고 청룡과 백호를 부활시키느냐.

초국과 씽국 대신 청룡과 백호를 포기하느냐.

청룡과 백호를 부활시키려면 반드시 주작과 현무의 도움이 필요하므로 강요되는 선택지였다.

전력을 반으로 나눈 삼사는 초와 씽을 포위했다.

환국의 신화에서 벗어나 사방신의 신화를 되찾은.

삼사들의 입장에서 봤을 땐 배신자들의 소굴과 같은 영토들을 언제든지 다시 되찾고자 신격을 일으킨 채였다. 날씨가 그들의 의지대로 바뀌어대면서 그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하지만 삼사가 나설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

청룡과 백호의 기파가 어렴풋이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까지도 주작과 현무가 자리를 떠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드가 부활 의식을 포기했다는 의미가 됐다.

살의를 품은 청룡과 백호가 날뛰는 기척이 점차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현재 위치가 조금씩 특정되어 갔다.

‘어리석은 자다.’

‘과연 인간 출신답게 사사로운 것에 얽매여서 대사를 그르치는군.’

청룡과 백호의 봉인을 푸는 것보다 초국과 씽국의 안위를 우선이라고 판단한 것이냐...

그리드의 선택을 비웃은 삼사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삼사는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청룡과 백호가 더 큰 소란을 일으켜서 그들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할 수 있는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재차 생각해도 여러모로 잘 됐다 싶었다.

활빈당.

한낱 인간들의 조직 주제에 긴 세월 환국을 훼방 놓았던 놈들의 본거지를 찾아낼 기회이기도 했으니까.

오늘 그리드를 패퇴시키고 활빈당을 깔끔하게 정리하리라.

위대하신 한울의 가슴을 꿰뚫었던 청룡의 저력이라면 필시 그리드를 위험에 빠뜨릴 테고, 우리에게 그것은 너무나도 큰 기회로 작용할 것이다...

‘청룡과 백호도 되찾는다.’

삼사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짙어지는 그때였다.

쏴아아아아아!

세상이 일순 금빛으로 물들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삼사는 분명하게 느꼈다.

이 땅의 질(質)이 바뀌었음을.

미세한 변화이긴 했다.

거대한 사막에서 고작 한줌의 모래가 색을 바꾸면 이럴까 싶었다.

신경 쓸 가치가 없단 의미다.

삼사가 묘한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그때 템빨신의 기척이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예전에 마주했을 때보다 도리어 신격이 약했다.

꺼지기 직전의 횃불처럼 흐릿했다.

그와 대치하고 있는 청룡과 백호의 존재감과 비교하면 우습게 느껴질 지경으로.

“찾았다.”

삼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청룡과 백호의 협공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템빨신의 기척을 느끼고서도 들뜨지 않고 차분한 것이다.

위대한 신답게 방심 따위를 안 한다는 증거였다.

이쯤 되면 만인의 귀감이 될 만하지.

스스로 자부하는 삼사의 발밑으로 거대한 구름이 몰려왔다.

삼사를 비롯해 수십 명의 양반을 태운 구름은 비바람을 뿌리며 대륙을 질주했다.

청룡과 백호, 그리고 죽어가는 템빨신의 기척이 느껴지는 현장까지 찰나지간에 도착했다.

“음...”

현장에 도착한 삼사가 진법의 잔재를 발견했다.

긴 세월 활빈당의 근거지를 숨겨왔을 진법들.

인간이란 생물이 의외로 대단하단 생각이 들 정도로 복잡한 묘리를 품고 있었다.

삼사는 그 묘리를 즉시 이해했다.

앞으로 활빈당이 세상 어디로 도망치든 삼사의 손바닥 위가 될 터였다.

“템빨신이 약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은 비록 그 신격이 희미해졌을지언정 저력을 얕보지 말고 철저히 제압해라.”

“청룡과 백호도 온전치 못할 테지. 되도록 셋 전부를 포획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썩 미덥지 않은 양반들에게 신신당부한 삼사가 구름의 형상으로 하늘을 수놓은 진법들을 파훼해나가는 순간이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훼손 된 진법의 틈새로 빛의 기둥이 솟구쳤다.

삼사 중 운사를 노렸다.

운사가 부리는 구름의 영향을 크게 받는 우사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기습이라 볼 수 있었다.

“크악!”

구름에 붙잡혀 끌려온 양반 하나가 운사를 지키는 방패가 되어주었다.

운사 대신 섬광에 얻어맞고 가슴이 꿰뚫렸다.

양반을 꿰뚫은 섬광은 그대로 운사에게까지 도달했다.

섬광의 위력이 기세보단 약하다는 사실을 파악한 운사가 손을 휘둘러서 쳐냈다.

‘브레스?’

하찮은 위력과 별개로 드래곤의 브레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특성을 지닌 일격.

운사가 어떤 불안을 감지함과 동시였다.

꽈앙!

완전히 무너진 진법의 파편들이 요란하게 비산했다.

불시에 발생한 충격파에 의해서다.

충격파는 의외의 존재가 만들어냈다.

“뭣...?”

템빨신 그리드.

무지막지한 속도로 솟구쳐 올라온 그가 삼사를 경악시켰다.

일전에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신성을 등에 업고 있어서다.

광신광룡일 때와도 달랐다.

신격의 형질이 바뀌었다.

존재 자체가 바뀐 느낌에 가까웠다.

‘약해진 게 아니었다.’

그리드의 기척이 몹시 미약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깨달은 삼사는 숫제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약해진 게 아니라 바뀌었던 거라니.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현재의 그리드가 지닌 신성이 이 땅의 질을 바꿔놓은 무언가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에 있었다.

이 세계가.

오랜 세월에 걸쳐서 환국의 신화로 덧칠됐던 동대륙이 그리드의 신화로 물들기 시작했다...

“당최... 당최 뭐냐? 특별할 것 없는 그대가 어찌하여...?”

삼사가 한울의 말씀과 행동을 해석하기 위해 노력해온 이유는 그들에게도 한울이 미지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드의 근원은 미지와 거리가 멀었다.

그의 시작은 미약한 인간이었으며 신이 되기까지의 서사는 대부분 세상에 상세하게 전파됐다.

삼사 또한 듣고 본 서사였다.

그리드의 근원을 이해하고 있단 말이다.

한데 광신광룡 때부터 그리드를 문득문득 이해할 수 없게 됐다.

마치 한울처럼.

모든 세상을 통틀어도 단 셋밖에 존재하지 않는 태초신처럼 말이다.

“무엇이 그대를 자꾸 그런 돌연변이로 만드는 거지?”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삼사들 본인이 거짓 된 신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었다.

진정으로 숭배 받아본 적이 없기에, 그들은 인간과 드래곤, 급기야 사방신의 염원으로 거듭난 지금의 그리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드가 깨달았다.

“치우께서 고독하신 이유를 알겠다.”

자연을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힘을 숭상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신.

무신 치우가 신들 중에서도 유일한 존재였던 이유는, 다른 신들이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신으로 만들어져 당연하게 숭배 받아온 천상의 신들은 숭배의 진정한 가치를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치우의 탄생 배경을 뻔히 알고도 내심 특별할 게 없다고 폄하해 왔겠지.

처음부터 신이었던 자신들이 치우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고 믿으며 치우를 단순한 돌연변이쯤으로 치부하지 않았을까.

하여 늘 혼자였던 치우에게 이 세상은 굉장히 어긋나고 무가치한 것처럼 보였으리라.

“진정으로 선택 받은 건 너희가 아니라 우리인데.”

그리드의 말은 몹시도 파격적이었다.

자신이야말로 진정으로 선택 받았다고?

태초신께서 빚어낸 우리보다 제깟 놈이 더 우월하다고?

“그대... 운 좋게 얻은 힘으로 기고만장해서 망언을...”

얼굴을 붉힌 삼사가 폭풍우를 불러일으켰다.

운사, 우사, 풍사.

세 신의 협력은 각자일 때완 차원이 다른 파괴력을 만들어냈다.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쯤 가볍게 무너뜨릴 재해를 의지만으로 발생시키는 수준으로, 인간들의 입장에선 그들의 분노가 즉 세상의 종말을 암시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리드에겐 큰 위협을 못 줬다.

애초에 폭풍우 따위가 무슨 수로 신의 진격을 막는단 말인가?

삼사의 역할은 싸우고, 승리하는 게 아니다.

그들의 권능이 날씨를 부리는 것에 있는 이상 그들의 역할은 다스리는 것에 있다.

전투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미르의 기억을 소거하는 악수를 뒀던 것이다.

콰르르르르릉...!

“...!”

“...!”

“...!”

삼사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리드가 폭풍우에 발을 들인 순간 그를 불태웠어야 할 낙뢰들이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푸른 전광 중 일부가 황색으로 물들더니 역으로 삼사에게 쏘아졌다.

삼사의 시선이 뒤늦게 그리드의 신성으로 고정됐다.

황색용의 형상을 한 신성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용이 토하는 숨결이 때로는 번개를 다스리고 불을 다스리며 폭풍우의 위력을 약화시켰다.

“헉...!”

운사가 기함했다.

그가 불러 모은 구름의 틈새에서 황색 전광으로 이루어진 용이 강림했기 때문이다.

그리드가 불시에 운용한 청룡의 힘으로 사용한 <내리쳐라!>의 효과였다.

“흡...!”

우사가 침음했다.

그의 의지가 쏟아낸 폭우가 빠르게 증발하기 시작한 까닭이다.

황색 불꽃으로 이루어진 주작의 날갯짓이 일대에 뜨거운 열기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리드가 불시에 운용한 주작의 힘으로 전개한 <날아오르라!>의 효과였다.

“크윽...!”

풍사가 휘청거렸다.

그가 다스리던 폭풍이 표적을 잃고 맥없이 흩어져갔다.

그리드가 청룡과 주작의 힘에 이어서 백호의 힘을 운용한 결과다.

<백호 울음>과 <울부짖어라!>의 효과가 연계되면서 풍사를 경직시키고 공격 명중률을 떨어뜨렸다.

“어찌 이런 정신 나간 일이...!”

잦아드는 폭풍우 속에서, 삼사가 똑같은 울분을 토했다.

비명에 가까웠다.

그리드가 사방신의 권능을 온전하게 품었단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였다.

그리드의 변화한 신격이 사방신의 숭배에서 비롯됐다는 것.

신들의 숭배를 받는 신이 탄생한 것이다.

태초신을 제외하면 아마도 최초일 터였다.

꽈아아아아앙!!

믿기 힘든 상황에 안색이 하얗게 질린 삼사의 몸이 이리저리 휘둘렸다.

그리드의 검로를 따라서 승천하고, 강림하고, 똬리를 틀기를 반복하는 황룡 형상의 검기에 마구 베이고 타격을 입길 반복하면서다.

도시 곳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파국 백성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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