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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04화 (1,602/1,794)

템빨 80권 - 2화

“여러분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리드는 역지사지로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듣도 보도 못한 플레이어가 신화 클래스를 손에 넣었다면?

쉽게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생각보다 세상이 넓고 천재는 많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그렇다.

신화가 되는 건 재능과 운의 영역이 아니니까.

유일무이한 업적을 수차례 쌓아올린 수준으로도 부족했다.

사람들에게 숭배와 염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이미 경험해본 그리드조차 그 방법을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를 필요로 했다.

여기서 말하는 무언가란 초월적인 것이 아니다.

숭배란 대개 이해(理解)로부터 비롯되고 미지는 도리어 공포를 유발하기에.

그리드는 자신의 서사를 복기해보았다.

서사 속에서 자신은 대부분 평범했다.

그 대상이 인간이든 아니든, 거의 항상 누군가와 함께였고 교감했다.

되도록 선한 의도로 활동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드라는 인물의 성격에는 특별할 게 없었다.

단지 좀 많은 활약을 해왔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것이 신화가 된 계기라기엔 부족했다.

양반들을 상대로 신이 되겠노라 선언했던 사건?

그 사건 또한 그리드를 신화로 만든 계기라기엔 억지였다.

당연하다.

시스템이라는 건 플레이어의 바람이나 의지 따위에 상시 호응하는 편리한 개념이 아니니까.

그러므로 힘든 것이다.

신화가 되는 건, 계산의 영역이 아니었다.

특히 Satisfy의 설정에 존재하지 않는 플레이어가 의도적으로 숭배의 대상이 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의미에서 청룡과 백호에겐 그리드가 낯설고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신이라고 해서 전지전능하진 않기에.

그들이 신이라고 한들 어찌 기적을 이해하겠나.

“한낱 인간이 같은 인간들의 바람으로 신이 되어 당신들 앞에 섰습니다. 여러분 입장에서 저를 보면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겠죠.”

의심해도 좋다.

다만 되도록 비난은 피해 달라.

사람들의 염원으로 두른 신격이다.

그 근원을 의심받는 수준을 넘어 비난받으면 참기 힘들다.

그리드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엔 상당히 민망한 구석이 있었다.

최근 들어 감히 인류를 대변하듯 말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주제넘다는 자각이 있었다.

하여 간략하게 전달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제가 이겼는데.”

-...

-...

안 그래도 패배의 후유증을 심하게 겪고 있던 청룡과 백호가 흠칫 놀랐다.

환국 태생이라기엔 너무나도 자비로운 모습.

패배자들의 입장을 이해하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던 그리드가 다짜고짜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약하면 그냥 잠자코 있어라.

그렇게 지껄이는 그리드의 태도는 호의적인 말투와 상반되게 몹시 패도적이었다.

여기서 한 마디라도 반박했다간 살신 예고라도 날릴 것 같았다.

‘저자는 쫓겨난 신들과 다르다.’

‘뭔가를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어. 조금만 수틀리게 행동했다간 우리를 봉인하는 게 아니라 아예 죽여 버릴 기세다.’

신을 죽일 수 있느냐, 아니냐는 부차적인 문제다.

살의를 품을 거라는 사실 자체가 두려웠다.

지금 당장 그리드가 청룡과 백호를 죽이려 들 경우, 청룡과 백호는 도망칠 수밖에 없고 이는 즉 자신들의 땅을 버리는 셈이 됐다.

영영 버리는 게 아니라 일시적인 것일지라도 문제가 컸다.

땅을 빼앗기는 것과 스스로 버리는 건 완전히 다른 개념이니까.

책임을 외면하는 신은 신격에 심대한 타격을 입는다.

청룡과 백호의 신격은 흔들릴 것이고 동대륙의 균형은 무너질 것이었다.

주작, 청룡, 백호, 현무.

총 넷의 수호신이 감당하기에도 벅찼던 이 광활한 대지가 두 신을 잃는 즉시 혼란에 빠지고 환국의 손아귀에 들어가리라.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그리드는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했다.

입을 다문 청룡과 백호가 자신에게 품었던 의심을 차츰 지워가는 중이라고 믿었다.

긴 이야기를 꺼냈다.

이곳에 도달하기까지의 모든 여정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전달했다.

청룡과 백호는 점차 귀를 기울였다.

그리드에게 따스한 눈초리를 보내는 주작과 현무의 태도를 토대로 그리드가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 있음을 눈치 챘다.

끝내.

-어흐흥흥!!

백호가 구슬프게 울었다.

파지지직!

청룡의 몸을 이루는 번개가 희미하게 흩어져갔다.

미약했던 존재가 시들고 피어나길 반복한 끝에 자신들의 눈앞에 서있는 것이다.

그리드의 서사는, 신화는, 타고나길 신으로 태어난 존재들의 신화와 명백히 달랐다.

비할 바 없이 무거웠다.

처절하고 때로는 비참했다.

그래서 더 각별하게 다가왔다.

-템빨신... 위대한 템빨계의 창조신이여.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신이었고 당연하게 숭배 받았소. 하여 부끄럽게도 늘 스스로가 옳다고 믿었소이다. 귀하에게 느낀 생소함을 이해하려하지 않고 의심하여 감히 결례를 범한 우리를 부디 용서해주시오.

-이제는 우리 또한 당신을 아끼고 존경하는 주작과 현무의 마음을 이해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봉인을 풀어주어서 감사하오.

15분의 시간 제한을 두고 발생했던 긴급 퀘스트, <무력 진압>의 클리어 보상은 그리드에게 엄청난 혜택을 선사했다.

청룡의 숨결과 백호의 숨결 각 5개.

여전히 드래곤의 비늘 바로 다음가는 가치를 지닌 최고급 제작 재료를 무려 10개나 한꺼번에 확보한 것이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뇌신>과 <지신>을 비롯한 청룡, 백호 관련 스킬의 위력을 영구적으로 상승시켜주는 칭호를 얻었다.

하나 같이 물리적인 보상들이었다.

아무래도 ‘무력으로 진압한다.’는 퀘스트 내용 탓인지 청룡과 백호의 호감도를 얻진 못했다.

유일하게 아쉬운 부분이었는데 이 순간 아쉬움이 사라졌다.

[사방신 ‘청룡’과의 호감도가 최대치가 되었습니다.]

[사방신 ‘백호’와의 호감도가 최대치가 되었습니다.]

청룡과 백호는 주작의 말대로 금수에 가까웠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서 매가 약으로 작용했다.

약육강식의 생리에 온전히 따르는 수준으로 그리드를 즉시 우상화했다.

물론 그리드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아마도.

‘다행...?’

이로써 부활한 동대륙의 신화 전체를 든든한 우군으로 얻었다...

기뻐서 미소 짓던 그리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상상도 못했던 알림창.

신화 등급으로 전직했을 때처럼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시스템 메시지가 그의 시야 한켠에서 점멸하고 있었다.

[모든 사방신이 당신의 신격을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사방신의 숭배가 동대륙에 새로운 신화를 세웁니다.]

동시에 월드 메시지가 떠오른다.

[동쪽의 사방신이 템빨신 그리드를 숭배합니다.]

[사방신의 숭배가 새로운 신화 <황룡>의 서막을 올립니다.]

“뭐...?”

당황하는 그리드의 신격이 변화를 맞이했다.

쉬지 않고 너울지던 노을빛의 기운이 그리드의 등 뒤로 밀집했다.

1차로 지름 3미터의 원형을 이뤘고, 2차로 원형 안에 용의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청룡과 닮은 동방 용의 모습이다.

번개로 이루어진 청룡과 달리 그리드의 신격으로 이루어진 황룡(黃龍)이었다.

[<황룡>은 긴 세월 봉인 되었던 사방신의 무의식이 탄생시킨 신입니다.]

[고립 된 사방신이 고난의 세월을 견디고자 의지했던 환상 속의 신격이 이 순간 당신을 통해서 현실에 강림합니다.]

“허...”

목격자들이 침음했다.

감탄하고 경악하는 식의 반응들이 아니다.

하나 같이 황홀경에 빠진 얼굴이었다.

그리드의 등 뒤로 떠오른 황룡의 형상에 순수하게 매료된 눈치다.

그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템빨신 ‘그리드’가 22번째 서사시를 써내려 갑니다.]

[서사의 시작은, 나약함을 드러내지 못했던 동쪽 땅의 수호신들이 품어온 열망에서 비롯합니다.]

서사시의 내용은 앞서 그리드에게 전달 된 것과 같았다.

긴 세월 봉인당해 있던 사방신들.

몹시 괴로웠던 나머지 그들 또한 인간처럼 의지할 곳을 찾게 됐고 자신들을 초월하는 환상의 신 <황룡>을 무의식중에 만들어냈다.

그들이 그리드를 숭배함에 따라서 그리드가 황룡을 품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전율적인 내용이었다.

실시간으로 서사시를 접하는 사람들의 피부 위로 닭살이 돋아났다.

그리드에게 품어온 감정과 별개로 똑같이 전율했다.

당사자 그리드 역시 두 손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

..

[서사시의 스물 두 번 째 페이지가 완성되었습니다.]

[서사시 완성 보상으로 새로운 신화 <황룡>이 당신의 일부가 됩니다.]

[서사시 완성 보상으로 초월자의 격이 최대치에 도달하였습니다.]

[어렴풋이 절대자의 편린이 보이기 시작...]

[...!]

[...!!]

[절대자의 편린을 구체화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을 상징하는 유일무이한 개념이 너무 많습니다. 측정에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짤랑.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여태까지와 달리 가까운 곳에서다.

진짜로 가까웠다.

흠칫 놀란 그리드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세상이 멈춰 있었다.

‘유일신’의 강림은 최소 절대자들이나 인지할 만한 시간의 틈새에서 이루어졌다.

“템빨신 그리드.”

[무신 ‘치우’가 강림하였습니다.]

[이해 불가한 미지의 현상들이 당신을 압박합니다.]

“그럼에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가. 괜찮다. 그대의 발전은 충분히 빠르다.”

“...치우 님, 당신의 바람은 여전히 같습니까?”

“그래, 나의 바람은 공교롭게도 그대의 의무가 되기도 했다. 그건 힘을 지닌 자에게 강요하는 책임 따위가 아닐세.”

“...”

그리드도 이해하고 있었다.

미르.

양반 중 유일하게 신살을 꿈 꿀 자격을 지녔던 존재.

치우의 몇 안 되는 희망이기도 했던 그가 이제는 완전히 그리드에게 매료되어 그리드를 숭배하고 있었다.

곁에서 실시간으로 변해온 미르의 심경이 그리드에게 확실히 전달됐다.

그리드는 미르를 취할 셈이다.

마지막 사도로 삼을 작정이었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치우의 바람을 이뤄줄 의무를 짊어지게 된 것이다.

물론 외면해도 될 일이었지만... 그건 도리가 아니었다.

그리드는 치우의 호의와 은혜를 잊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제는 알고 있다.

의무를 잊은 신.

존재할 가치를 잃은 신이 세계에 존재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어째선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그대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선 신살의 자격이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 올 걸세.”

짤랑.

해후는 짧았다.

치우는 시간의 틈새가 닫히기 전에 떠났다.

현장에 있는 존재들이 자칫 자신을 인지했다간 큰 혼란이 야기 될 것을 알고 배려해준 것이다.

방울소리에 섞인 치우의 음성이 그리드의 뇌리에 스며든다.

지크, 하야테, 뮐러, 미르.

자신이 탐냈던 인물 중 셋이 그대를 따르게 됐음에 커다란 운명을 느낀다면서, 깊은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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