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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03화 (80권) (1,601/1,794)

템빨 80권 - 1화

가리온과 백호의 성격은 명백히 다르다.

가리온은 손상 된 땅을 수복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활동해온 반면 백호는 애초에 땅이 훼손되지 않게끔 수호했다.

가리온이 대지의 상처를 모조리 어루만지는 권능을 지녔고, 백호가 대지의 상처를 모조리 차단하는 권능을 지녔단 의미는 아니다.

다만 노력을 해왔단 말이다.

그런 두 신의 성격 차이는 서대륙과 동대륙의 문화 차이를 만드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대륙의 건축 양식이 석재를 중심으로 발달한 것과 달리 동대륙의 건축 양식은 목조를 중심으로 발달한 이유.

동대륙의 땅과 암석이 워낙 단단해서 석재를 확보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서대륙이 자랑하는 높은 성벽과 화려한 건축물들을 동대륙에서 보기 힘든 이유는 동대륙의 문명이 상대적으로 저열해서가 아니라 환경적인 요인이 큰 것이다.

저 백호로부터 비롯된 환경.

푸화하학!!

“...!”

백호의 가슴에서 솟구치는 선혈이 현장의 모두를 경악시켰다.

황길동과 활빈당원들도, 미르와 예음도, 청호와 함께 달려온 십이지들도.

하나 같이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경기를 일으켰다.

놀라기는 청룡도 마찬가지였다.

백호와 1,000번을 싸웠던 청룡은 백호의 저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반쯤 죽여 놔도 결코 쓰러지는 법이 없던 지긋지긋한 놈.

단단하기로는 동대륙 신화에서 최강인 백호가 무참히 썰리고 핏물을 쏟다니?

‘저건 당최... 하늘을 쪼개놓기라도 한 건가?’

청룡의 시선이 그리드의 검에 못 박혔다.

황혼.

노을에 물든 하늘의 일부를 뚝 떼어놓은 듯한 검.

강대한 신격이 느껴졌다.

양반 미르와 협력 중인 그리드를 환국의 일원으로 오해 할 수밖에 없던 청룡이 새로운 해석을 내놨다.

-귀하는 어지간히도 한울의 기대를 받았었나 보군. 한울 그 이기적인 놈이 제 신격을 나눠준 것을 보면. 귀하가 배신하고 별도의 파벌을 만들었을 때 한울이 받았을 충격이 극도로 컸겠어.

한울은 하늘의 동의어이기도 하다.

타고난 힘과 권능, 의미와 상징성에 이르기까지.

한울이 즉 하늘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든 것이다.

그리드의 검에 하늘이 담겼다는 건 그리드가 한울의 비호를 받았다는 뜻과 같았다.

물론 그리드 입장에선 황당한 억측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해를 풀 상황이 아니다.

말을 궁리할 시간에 검로를 떠올려야 했다.

꽈아아아앙!

거대한 크기는 그 자체로 무기가 된다.

백호가 휘두르는 앞발은 수십 미터의 거리를 찰나에 점했다.

그리드가 전속력으로 전개하는 이동 스킬과 미르의 현란한 경공을 손짓 한 번으로 즉시 뒤쫓았다. 미래를 예지하듯 앞지르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백호의 별 의미 없는 행동 하나하나가 두 사람에게 순보를 강제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드래곤과 싸워본 경험이 있다.

백호보다 거대하면서 크기를 자유롭게 변화시키는 드래곤들의 전투수법은 단순히 거대할 뿐인 백호보다 훨씬 더 까다로웠다.

푸욱!

그리드의 검이 백호의 손목 측면에 박힌다.

콰앙! 콰앙! 꽈아앙!!

그리드를 떼어 내려고 팔을 요란하게 휘두르는 백호의 행동이 연신 소닉붐을 일으켰다. 일대의 공기가 압축됐다가 폭발하기를 반복하면서 그리드를 거세게 압박했다.

어지간한 전설도 고막이 찢어지고 뇌와 장기가 흔들려서 온갖 물리적인 상태이상을 겪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멀쩡했다.

두 자루 검을 백호의 팔에 번갈아 박아가면서 클라이밍 하듯이 기어올랐다.

벼룩...까지는 좀 심하게 과장이고 매미가 된 심정이었다.

백호의 팔을 거목으로 비유하자면 그리드는 좀 커다란 곤충에 불과했으니까.

‘지금.’

그리드가 허리를 크게 비틀었다.

검무를 전개하여 백호의 팔을 베고 자연히 백호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백호의 팔은 엑스자에 가깝게 교차하고 있었다.

그리드를 떼어내려고 급기야 손을 쓴 것이다.

덕분에 미르의 숨통이 트였다.

백호의 공격을 피할 때마다 무조건 순보를 소모 중이던 그가 처음으로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파지직!!

청룡의 기운이 미르를 감싼다.

정작 청룡의 허가를 받지 않고도 개세적인 위력의 뇌기를 불러일으켰다.

꽈아아앙!!

미르가 백호의 몸을 관통했다.

말 그대로 가죽과 살을 꿰뚫어버렸다.

사신 중 최강이라는 청룡의 힘을 위시했다지만 기대 이상의 결과였다. 미르 본인도 놀랄 만한 위력이었다.

미르가 힘의 근원을 빠르게 눈치 챘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그리드의 신검이 청룡의 뇌기를 극한까지 벼려주고 있음을 파악했다.

‘청룡을 품었던 도보다 도리어 낫다. 이것이 템빨신께서 예찬하시는 템빨인가.’

-이놈들...

백호의 푸른 동공이 흔들렸다.

공격을 허용할 때마다 살이 찢기는 고통을 느껴야한다는 사실이 그를 몹시 당혹케 만들었다.

단단함을 위시해서 적을 짓뭉개온 그에겐 생소한 통증이었다.

아스가르드에서 쫓겨난 침략자들에게 봉인 당했던 그날을 제외하면 이 정도로 고통스러운 경험은 처음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마. 네놈들의 무기가 대단해서 내게 낯선 고통을 주는구나.

-낯설 리가 없는데?

청룡이 끼어들었다.

-그 정도 고통쯤이야 내게 최소 1,000번은 겪지 않았나?

-뭐라는 거냐? 나한테 진 놈이.

청룡의 말을 끊어버린 백호가 심호흡했다.

그의 거대한 몸을 뒤덮고 있는 백색 털들이 너울졌다.

백색 털 사이로 왕의 문양을 그리는 흑색 털들이 촘촘하게 일어났다.

신이기에 앞서 백수의 왕.

백호의 심상이 강림한다.

금의 성역이 만든 협곡 위로 수백수천 마리의 맹수들이 포효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하나가 백호의 심상으로 이뤄진 백호의 분신이자 수족이었다.

꾸어어어어엉!!

맹수들이 협곡을 내달렸다.

곰, 호랑이, 사자, 표범 등등.

온갖 종류의 맹수들이 저마다 다른 몸놀림을 선보이며 그리드와 미르를 덮쳤다.

대부분 그리드가 아닌 미르를 노렸다.

금의 성역이 실시간으로 만드는 무구의 세례를 돌파하는 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드는 백호의 본체가 맡았다.

-1대1로 정정당당하게 승부다!

미르 탓에 집중할 수 없었노라고, 백호는 주장한다.

부풀린 신격만큼이나 우람해진 몸집을 위시해서 협곡을 돌파해오는 기세가 흉흉했다.

그리드의 표정은 어느덧 무심해져 있었다.

NPC의 강함은 대개 세계관에 끼치는 영향력에 비례하는 바.

그리드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전히 ‘잊힌 신화’였을 사방신의 신화는 Satisfy의 세계관에서 중심이 될 수 없다.

그리드 덕분에 부활한 시점부터 사방신의 위계는 그리드보다 낮았다.

설령 그리드 덕분에 부활한 게 아니었다고 해도 현재 그리드의 위계가 너무 높았다.

천상의 신들과 대적해온 것은 물론이고 고룡과 인연을 쌓았으며 바알을 죽이지 않았나.

안타깝게도 백호는 그들과 비할 위치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잊혔던 거다.

콰콰콰콰콰쾅!!

무한히 겹쳐지는 발할라의 행렬이 백호의 기세를 차츰 죽여 갔다.

백호는 하나의 발할라를 돌파할 때마다 신격을 소모했고 어느덧 그리드 앞에 도착했을 땐 수천 자루의 무구에 둘러싸이고 말았다.

-환국이 괴물을 만들었구나...!

끝까지 오해하고 한탄하는 백호에게 그리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애초에 검으로 설득 하리라 마음먹지 않았던가.

콰자작!!

그리드는 6융합 검무를 아끼지 않았다.

금의 성역이 생성한 수천 자루의 무구와 300개의 갓 핸드가 휘두르는 검의 보조를 받으면서도 전력을 다한 공격을 휘둘렀다.

백호의 단단함을 인정해서다.

-크아아악...!

백호의 비명이 금의 성역을 뒤덮었다.

그의 심상이 만든 맹수들이 더 이상 미르를 위협하지 못하고 소멸해갔다.

대적 불가.

그리드의 힘을 절실히 느낀 백호가 판단하고서 청룡에게 외쳤다.

-도망쳐라, 청룡...! 네가 감당 할 상대가 아니다...!

‘저놈이 정녕 주제 파악이 안 되는군.’

하수 따위가 뭐라는 거냐.

청룡은 백호의 경고를 무시했다.

물러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는 이 땅의 수호신이니까.

파지직!!

어지럽게 방출되어 풍경을 수만 갈래로 갈라놓던 뇌기가 한 점으로 집결한다.

이어서 인공 감각조차 놓쳐버릴 정도의 광속으로 쏘아졌다.

인공 감각은 그리드가 관통당하고 나서야 요란하게 출렁여댔다.

콰르르륵!!

청룡이 자취를 감췄다.

정확히 말하면 형상을 지웠다.

더 이상 용의 형상을 유지하지 않고 번개 그 자체가 되어선 사방팔방으로 나부껴댔다.

휘몰아치는 천둥번개가 금의 성역을 때려 부수길 반복하며 차츰 그리드를 둘러쌌다.

-귀하가 나보다 고강하다는 건 충분히 알겠다. 연배에 비해서 극도로 오만할 만 해. 하지만 강함은 필승을 뜻하지 않아. 나의 필패를 논할 수 없다는 의미일세. 나는 베이지 않거든.

꽈르르르릉!!

그리드를 중앙에 가둔 벼락이 폭풍을 이뤘다.

청룡이 사방신 중 가장 고강하며 한울의 가슴을 꿰뚫는 충격적인 신화를 쓸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청룡이라는 존재의 특별함에 있었다.

자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상시 유지되는 번개.

신격으로부터 말미암은 그 번개는 한없이 자유롭고 쾌속했다.

신들 사이에서도 기형적이라고 불리는 수준.

태초신들에게 버림받았던 동쪽 땅의 돌연변이가 바로 청룡이다.

쩌어어어어엉...!

폭풍 틈새로 송곳 같은 벼락이 튀어나왔다.

그리드의 심장을 재차 관통 할 위력을 내포한 채다.

태초신 한울의 가슴을 꿰뚫었던 신화가 청룡의 힘을 가일층 증폭시키고 있었다.

그리드의 심상을 이루는 발할라조차 벼락의 송곳을 막아내지 못하고 처참하게 관통당하고 말았다.

퍼엉!

그리드의 가슴에 두 번째 구멍이 꿰뚫렸고,

서걱!

그를 둘러싼 채 폭풍을 이루고 있던 번개가 반으로 갈라져버렸다.

낙월검에 의해서다.

-...!

대상이 무엇이든 베는 검이 조건부 검성의 권능과 맞물려 청룡을 깔끔하게 베어버린 것이다.

무지막지한 후폭풍이 뒤따랐다.

착용자의 모든 스탯을 합산한 후 대상의 레벨을 곱한 만큼 적용되는 피해량이 청룡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더 큰 문제는 무조건 발생하는 치명타와 모든 버프 효과를 제거하는 효과에 있었다.

청룡이 번개가 갖는 모든 이점들을 상실했다.

존재감이 흐릿해졌다.

3분 동안 지속되는 효과다.

반면 그리드가 진행 중인 긴급 퀘스트는 아직 11분이나 남았다.

퀘스트가 끝나기 전에 낙월검을 한 번 더 휘두를 수 있었다.

-저 약해빠진 놈...

자신과 달리 불시에 제압당한 청룡을 백호가 비난했다.

안 그래도 끔찍한 고통에 휩싸인 청룡의 이성을 상실시키는 태도였다.

분노한 청룡이 한계 이상의 힘을 끄집어내려는 순간.

스카카카카칵!!

6융합 검무가 청룡의 기세를 끊어버렸다.

난도질당한 청룡이 맥없이 곤두박질 쳤다.

목숨은 붙어있었다.

청호가 안도했다.

“손속에 자비를 두셔서 다행이다.”

-...

-...

청룡과 백호가 허망해져선 고통과 분노마저 잊었다.

수치심도 느끼지 못했다.

주제 파악을 끝낸 것이다.

미르가 쐐기를 박았다.

“템빨신께서는 저와 다르십니다.”

환국이 만든 괴물 따위가 아니다.

“인류의 기원으로 탄생하신 신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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